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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낭에서 한달 살이하며 직접 고친 서촌 한옥 집

조회수 2020. 3. 25. 17:4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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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 작가 이서재의 서촌 한옥 집은 흙과 빛이 조우하는 삶의 터전이다.
서촌 한옥 집 마당에 선 이서재 작가.

아침 10시, 이서재에 도착했다. 마당의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만들어내는 햇볕과 그림자의 너울거림을 꼭 봐야 한다며 집 주인이 제안한 시간이다. 이서재利敍齋는 ‘이롭게 펼치는 집’이라는 뜻으로 서촌 북악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오래된 작은 한옥, 그러나 이 집이 품은 뜻은 깊고 크다.

2015년, 프랑스에서의 유학과 삶을 뒤로하고 13년 만에 돌아온 이서재 작가(@iseojae_roots_project)는 우연히 만난 이 한옥을 자신의 운명적인 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어느 대가족의 삶의 도구들로 꽉 차있던 집을 ‘꼭 필요한 것들만 담긴 간소한 공간’으로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에 서촌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가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둠을 만난 뒤로 이곳에 살아야겠다 결심했고, 가장 먼저 찾은 집이 이서재예요. 물론 당시 모습은 지금과 너무 달랐지만 옛 문, 기둥, 대들보가 매력적이었죠. 한 달 반 동안 침낭에서 자며 도배와 가구 도면, 조명 공사 등을 직접 했어요. 집의 느낌을 가능한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그 운치를 유지하고 싶었어요.”

1 손과 흙 불의 기운이 만나 빚어진 도자기들.
2 집안에서도 마당의 대나무를 볼 수 있다.

삐그덕 소리를 내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바깥과는 동떨어진 어떤 세계에 당도한 듯싶다. 담벼락에 나란히 선 대나무들, 세월에 반들반들해진 미닫이문, 광주리의 야채와 과일들, 나무 선반에 그득히 놓인 도자기들과 그녀가 붓으로 쓴 ‘집’이라는 담백한 한 글자까지. 늘 바지런한 그녀의 손과 습관이 만들어 놓은 조화롭고 일상적인 모습이다. 프랑스에서 사진, 영상, 설치 등 미디어 위주의 작업을 해왔던 그녀라고는 짐작하기 어려운 작가의 내밀한 공간이다. 이서재에 삶을 꾸림과 동시에 그녀는 전국의 산천을 돌아다니며 수묵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흙을 매만져 도자를 만들었다. 때론 우리 술을 빚고 궁궐을 탐구했다.

3 삶과 예술 작업이 공존하는 이서재.
4 작가가 ‘평화다방’이라 이름 붙인 다실 공간.

“프랑스에서의 시간은 제게 차이를 이해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돌아오면서 우리의 뿌리에 기반을 둔 작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우리 땅의 정서와 생김을 이해하기 위해 먹과 붓으로 그린 지리지 그림 그리고 흙과 교감하며 우리 뿌리의 미감을 오늘의 삶으로 가지고 오려는 마음의 작업에 집중하고 있어요.” 작은 평상 위에는 가장 최근 가마에서 꺼낸 새하얀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우리의 흙과 나무, 불로 만들어지는 도자야 말로 완벽한 재료와 의미적 타당성을 가진 매체이며, 그 중에서도 매일의 음식을 담는 그릇을 빚는 일은 존귀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서재의 맨 끝 방에는 그녀가 ‘평화다방’이라고 이름 붙인 다실이 있다. 오래된 소반 위, 곱게 우린 차와 딸기, 갓 구운 호밀빵과 오렌지가 그녀가 만든 그릇들에 담겨 올라왔다. 때는 따스한 봄볕이 툇마루를 따라 길게 다실로 떨어지는 찰나다. 작가가 함께 나누자던 아침의 빛. “오전 10시 즈음부터 마당에 심어둔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만들어내는 빛 그림자가 차실로 들어와요. 일 년 중 딱 이 무렵에만 만끽할 수 있는 평화의 시간이에요.”

5 그림을 그려 넣으려고 가져다 둔 백자 초벌기들.
6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동백 숲길’ 수묵화와 지난 전시 '우주적' 에서 전시된 도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차마 판매할 수 없었던 보물 같은 그릇들이다.
7 방과 주방 사이의 삼베 가림막은 공간을 따뜻하게 나눈다.
8 이서재에서 봄을 맞을 준비를 하는 식물들과 갓 구워낸 항아리.

그녀는 요즘 도자수리를 직접 하고 있다. 한국식 도자수리법의 이름이자 자신의 방법을 '새 그릇 되기' 라 스스로 이름을 주었다. 깨지거나 이가 나간 그릇을 쌀풀과 옻을 섞어 붙히고 마감하면 또 하나의 다른 새 그릇이 되는 것이다. “흔히들 그릇이 깨지면 버린다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깨진 그릇도 다시 붙여서 고쳐 쓴다는 생각이 저에게는 태도의 문제이기도 해요. 도자는 쓰면서 더 차분해지고 음식도 귀하게 여기게 되는 그런 가르침을 줘요.”


옻으로 잇고 채워 넣어 '새 그릇이 되기'위한 준비들.

이서재에서는 늘 어떤 풍경을 본다. 방의 작은 창밖엔 멀리 인왕산도 보이지만 그것은 밖을 품은 전망이라기보다 안으로 끌어들여 ‘나와 조우’하는 풍경에 가깝다. 결국 이서재의 전망이란 그녀가 매만진 하나하나 삶의 도구들과 모양새, 그것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과 계절 안에서 하나 되어 더욱 풍요로워지는 모습일 것이다. “사실 한옥은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집은 아닌 것 같아요. 소중히 매일을 일궈가는 것들을 안에서 투영해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마당의 대나무도 바라만 보는 게 아니라 잎 사이 바람이 지나갈 때의 소리들. 그리고 그늘을 드리움으로 인해 느껴지는 눅눅함 같은 것까지 오감이 펼쳐지는 집, 그게 바로 이서재의 전망 같아요.” 삶이 일어나는 집의 풍경, 그것은 사실 이서재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각자의 소박하지만 매일이 밀어내는 단단한 삶, 그 한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전망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금 만날 수 있는 이서재 작가의 전시

<새로운 시의 시대>, 경남도립미술관 

3.15 의거 60주년을 맞아 열린 이번 기념 전시에 출품한 이서재 작가의 작품은 <집의 역사> (2020). 옛 민화의 책가도에 나오는 책장의 형식에 책거리에서 물건의 배치를 차용하고, 문자도의 그림을 도자에 그리는 방식으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우리의 역사를 담았다. 지난 몇 년간 ‘태도로서의 예술’을 지향하며 우리의 뿌리 미감을 찾아 사유하고 체화한 것들이 고스란히 이번 작업으로 연결되었다. 전시는 6월 14일까지. 

글, 사진 박선영

에디터 이다영(yida@noblesse.com)

디자인 장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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