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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2세가 머문 베를린의 은신처는 어디?

조회수 2020. 1. 20. 15: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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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칼럼니스트 박선영이 소개하는 전망 좋은 방 첫 번째 이야기. 빌헬름 2세의 주문으로 지은 베를린 저택, 패트릭 헬만 슐로스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뤼네발트 숲 속에 신비롭게 숨어있는 슐로스 호텔.

해마다 여름이면 베를린을 찾게 된다. 고색창연한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과 달리, 그 역사성을 짐작하기 어려운 모던의 희미한 그림자가 도시 곳곳에 드리워져 있는 까닭일까. 혹은 전쟁의 상흔 위로 거듭 쌓여가고 있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쿨함과 개방적인 기운에 매료되어서일까. 여기에 하나 더한다면 도시의 여백 사이에서 보석처럼 숨쉬고 있는 베를린의 클래식한 공간들도 나의 걸음을 재촉하는 요인임이 분명하다.

베를린 서쪽, 그뤼네발트라는 드넓은 숲은 빼곡히 높은 나무들, 깊이를 알 수 없는 너른 호수를 품은 채 도시의 신비를 담당한다. 패트릭 헬만(Patrick Hellmann) 슐로스 호텔은 그런 그뤼네발트 숲 초입에 은신처처럼 숨어 있다. 이곳이야 말로 클래식한 베를린의 전형을 만날 수 있는 장소다. 후기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이 저택은 황제 빌헬름 2세로부터 변호를 부탁 받은 뮌헨의 저명한 변호사 발터 폰 판비츠가 거주지를 베를린으로 옮기게 되면서 1914년 완공됐다. 세계 대전 이후 크로아티아 대사관과 영국군 클럽 등으로 사용된 이곳은 3년간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의 대대적인 디자인 보수 과정을 거쳐 1994년 호텔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현재는 독일의 디자이너 패트릭 헬만에게 인수되어 그만의 모던하고 감각적인 터치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빌헬름 2세의 지시로 지어진 저택이 칼 라거펠트, 페트릭 헬만의 감각을 거쳐 호텔로 재탄생했다.

호텔을 찾은 계절은 녹음이 선명히 발색하던 초여름. 브람스 거리에 위치한 호텔 입구는 우아한 붉은 지붕의 대저택으로의 진입로를 따른다. 드리워진 초록은 건물의 위용을 부드러운 기운으로 감싼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호텔 로비에 들어서면 패트릭 헬만 수트를 입은 직원이 정중한 인사를 건넨다. 이곳의 직원들에겐 독일인답지 않은 쾌활한 친절이 묻어나는데 오래된 책상에 앉아 체크인을 하는 사이 끊임없이 살가운 대화를 건넨다. 빌헬름 2세가 이 집의 첫 번째 손님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호텔 곳곳의 명칭은 독일어로 황제를 뜻하는 ‘카이저(Kaiser)’를 따른다고.

1910년대 고가구들과 오리지널 프레스코화 사이를 거닐며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곳.

“2백 평방미터쯤 되는 공간에 프라이빗 라이브러리와 오리지널 프레스코화, 1910년대 가구들로 채워진 카이저 스위트룸이 가장 비싼 방이라는 비밀스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묵을 곳은 이그제큐티브 스위트로, 두 개의 방에 거실과 침실이 분리되어 있는 개방적인 구조다. 그레이 톤의 모던한 공간에 간결하지만 장식적인 가구들, 다양한 각도로 커팅된 벽과 모서리에서는 라거펠트의 재치가 묻어났다.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웰컴 메시지는 마음을 정겹게 만들어 주었으며, 창 밖으로 보이는 그뤼네발트 부촌의 풍요로운 풍경이 너울거렸다. 무거운 몸을 공중으로 띄워줄 것만 같은 푹신한 침대에 잠시 누워 긴장된 설레임을 다독이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어느새 조금씩 어두워지는 대기를 의식하며 로비로 내려가 오늘의 저녁 식사를 고심하다가 오롯이 슐로스 호텔의 무드에 하루를 맡겨 보기로 했다.

방에서 창 밖을 바라보면 그뤼네발트 부촌의 풍요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프로이센 왕국의 화려함을 연상케 하는 레스토랑과 바.

로비를 지나 호텔 1층의 레스토랑 비발디로 향했다. 미슐랭 가이드가 “독일의 수도에서 가장 강렬하고 럭셔리한 레스토랑”이라고 평가한 이곳에선 클래식한 지중해식 요리를 선보인다. 거위간이 들어간 비프 필레, 가자미와 새우가 가미된 부야베스. 환상적인 요리와 함께 19세기 샹들리에가 오크 우드의 화려한 벽을 감싸는 그야말로 촛불 속의 저녁이었다. 온통 붉은 실크 벽지, 나무와 금박으로 장식한 높은 천장, 그리고 레스토랑 비발디(Vivaldi)로 이어지는 관능적이고 화려한 프랑스적 터치. 와인을 기다리며 잠시 로비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옛날 프로이센 왕국의 향연이 이러했을까 싶어진다.

찬연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아침은 또 다른 감각을 선사한다.

호텔을 신비롭게 만든 밤을 지나, 다음 날 아침에 만난 풍경은 또 다시 새로운 국면이었다. 레스토랑의 식기와 테이블, 화병, 온실처럼 유리로 둘러싸인 이곳의 모든 게 새하얗기만 하다. 갖가지 치즈들과 신선한 샐러드, 갓 구워 따듯한 빵들이 잘 조율된 디스플레이처럼 완벽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창 밖의 우람한 나무들이 더욱 명징한 초록을 반짝이는 찰나. 레스토랑의 분주한 서버들의 움직임 사이로, 창 밖의 몇몇 정원사들과 풀밭 위의 나뭇잎들을 허리 숙여 줍고 있는 어느 직원의 정중한 손놀림을 본다.

“이곳의 모든 아름다움 속에서 느낀 편안함은 저들의 열정이 만들어낸 것임을, 그러니 베를린에서의 비범한 하루를 꿈꾼다면 주저 없이 슐로스 호텔을 찾으면 된다.”

영화 < 클라우즈 오브 실즈 마리아 > 속의 한 장면.

베를린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를 다시 보게 됐다. 영화 초반부의 극적인 스토리에 몰입될 즈음 영화 속 낯익은 장소에 나도 모르게 반색했다. 빌렘 멜키오르 감독 추모 행사를 마친 마리아 앤더스(줄리엣 비노쉬)가 클라우스 감독에게 ‘헬레나’역할을 제안 받는 밤의 파티장 신이 그려지는 곳이 다름아닌 슐로스 호텔이었다. 영화에서는 스위스 취리히의 어느 저택으로 그려지지만 실은 완벽한 베를린 로케이션이었던 것. “그 둘은 동일 인물이에요. 시그리드였던 당신만이 오직 헬레나 역을 할 수 있어요. 20년 후의 시그리드가 헬레나가 되는거죠.” 미묘한 감정이 오가는 두 배우의 연기가 주를 이룬 앵글이었지만 화려한 밤의 아름다움이 너울거렸던 그 공간은 내 기억 속에서 다시 재생되었다.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공간과의 조우. 그 특별한 밤은 내내 각별한 추억으로 변주되는 중이다.

ADD Schlosshotel Berlin by Patrick Hellmann, Brahmsstraße 10, 14193 Berlin

INQUIRY +49-30-895-8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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