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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리스본에서 만난 10개의 풍경, 10개의 단상

‘평범한 직장인의 여행스케치’라는 주제로 펜 드로잉 클래스를 하고 에세이를 쓰는 ‘그림 그리는 IT 기획자’ 오건호(@geonhooh)는 무작정 떠난 리스본에서 머물며 그곳에서 만난 의미 있는 장소들을 그림과 글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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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회사를 다니다 문득 미래가 두려워져 리스본으로 가셨다고요. 수많은 여행지 중 리스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리스본을 다녀온 지인이 저와 리스본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어요. 도시가 가져다 주는 분위기가 제게 예술적인 영감을 불어줄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요. 그 한 마디가 머리 속에 남아있었던 것 같아요. 이후 시간이 흘러 ‘어디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바로 리스본이 떠올랐거든요. 그래서 크게 고민하지 않고 리스본으로 여행을 결심하게 된 것 같아요. 직접 리스본에 가보니 지인이 어떤 생각으로 제게 그렇게 말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었어요.


회사를 다니다 미래가 두려워졌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이었나요? 회사를 다니며 한 번도 행복하게 일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어요. 직장인으로서 재미있게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이런 하루 하루가 모여 내 인생의 절반이 된다면 ‘과연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면서 막연한 두려움이 시작되었죠. 한번 사는 인생을 좀 더 의미 있고 좋아하는 일들로 채워 나가고 싶다는 욕심은 커져가지만 경제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은’ 계속 다녀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됐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함이 두려움으로 이어졌고요.

리스본에 도착해 얼마나, 어디서 머무셨나요? 포르투갈에 도착하여 3박 4일 그리고 ‘포르투’를 다녀와서 1박 2일을 머물렀습니다. 숙소는 에어비앤비를 이용해서 첫 3박은 Avenida역 근처의 일반 주택 그리고 마지막 1박은 Oriente역 근처 일반 주택에서 머물렀습니다.


리스본에서 여러 장소들을 그림으로 남기셨어요. 그리게 되는 풍경이나 장소의 기준이 있다면요? 길을 걷다 구도가 예쁜 곳, 빛과 그림자가 잘 어우러진 곳, 수많은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는 전망 등을 마주했을 때 그림으로 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바로 실행에 옮깁니다. 줄을 서서 기다릴 때나 기차를 기다릴 때 등 기다림이 필요한 시간을 마주할 때 주변 풍경을 그림으로 담아 보기도 해요.


누구에게나 미래가 두려워지는 순간이 있죠. 리스본에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안해졌나요? 리스본 여행을 계기로 어떤 점들을 느끼고 깨달았나요? 두려움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막연한 걱정에서 오는 법이죠. 리스본에 있는 동안은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현재에만 집중을 하게 되었어요. 당장 며칠 뒤의 리스본은 제게 없는 곳이 될 것이니까요. 리스본이 주는 분위기도 그랬지만 현재만 바라보니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사실 여유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의 자신에 대해 생각으로 해보려고 했는데, 그 여유를 누린다고 오히려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사실 리스본 여행을 계기로 무언가 크게 깨달은 것은 없었던 것 같아요. 다만, 리스본 여행을 하면서 마주했던 사람들, 장소를 통해 순간 순간 영감을 얻고 감동을 느꼈던 시간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드로잉의 대상으로 삼는 피사체의 특별한 기준이 있나요? 작가님의 드로잉 작업 방식이 궁금합니다. 한 가지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서 바뀝니다. 시간이 넉넉한 경우에는 현장에서 그려요. 이번 리스본 여행 동안에는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펜으로 바로 그렸습니다. 더 그리고 싶은 곳이 있지만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현장 드로잉이 불가능 할 때는 마음에 드는 구도로 사진을 찍은 다음 여행이 끝난 뒤에 사진을 보고 그리기도 합니다.


리스본에서 어떤 매력을 발견하셨나요? 언덕이 많아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멋진 전망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가 많아요. 길을 헤매도 좋을 만큼 예쁜 골목들도 많고요. 풍경을 그림으로 담는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죠.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사람들이 비교적 친절하고 낙천적인 편이라 여행하는 동안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리스본은 화려하진 않지만 평온함을 주는 매력이 있는 도시 같아요.


리스본에서 가장 아끼는 장소, 가장 마음이 가는 장소는 어디였나요? ‘베쿠 다스 파리냐스(Beco das Farinhas)’라는 골목에 가면 영국 사진작가 카밀라 왓슨이 몇 년간 리스본에 머물며 담은 동네 주민들의 모습을 그들이 살고 있는 집 앞에 작품으로 설치해 둔 것을 볼 수 있어요. 좁은 골목 양 옆으로 파스텔톤의 벽에 걸려 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걸어가면 마음이 매우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리스본에서 가장 영감을 받은 곳이라 기억에 남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의 여행스케치’라는 주제로 펜 드로잉 클래스도 진행하고 있다고요. 여행지를 그리게 된 건 언제부터였나요? 첫 드로잉은 2012년 피렌체에서 시작되었어요. 그 전까지는 그림을 배운 적도 그린 적도 없었죠. 피렌체에 가보신 분들은 공감하시겠지만 이곳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탄생한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도시가 아름답습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피렌체를 돌아다니는 동안 여행자들이 자리를 가리지 않고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어요. 그 영향 때문인지 폰테 베키오가 보이는 다리를 걷던 중 ‘이 풍경을 꼭 그려봐야겠다’는 충동이 느껴져 수첩과 펜을 꺼내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림을 완성하고 나니 여행지에서 하나 밖에 없는 나만의 기념품이 만들어진 것 같아 너무 뿌듯하고 기뻤어요. 이후 여행을 갈 때마다 인상 깊은 곳을 찾아 한 두 장 씩은 그림으로 담아오다 지금까지 오게 되었어요.


이제 어디로 떠나고 싶으신가요? 잘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의 소도시들을 자유롭게 여행하며 그곳의 모습들을 드로잉으로 담을 계획이에요. <레터스 투 줄리엣>이라는 영화를 보고 막연하게 이탈리아 소도시 로드 트립을 꿈꾸게 되었는데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이탈리아 소도시들의 이미지만을 게시하는 계정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 사진들을 보면서 꿈이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오게 되었어요.

1. 리스본의 첫 인상 (Avenida역 근처)

‘Avenida’. 미리 외워둔 숙소 근처의 지하철 역 이름이 전광판에 나타났고 나는 마치 이곳에 며칠은 머물럿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캐리어를 끌고 내렸다. 밤 11시의 리스본. 첫 만남이다.

2. 리스본 호시우(Rossio) 역

외출 준비 끝. ‘딸깍’ 숙소 현관문을 닫고 가벼운 마음으로 밖을 나선다. 허겁지겁 지갑과 핸드폰,사원증을 챙겨 나오던 평소 출근길 아침과는 다르게 느긋한 아침.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어떠한 임무도 없다. 상쾌한 아침 공기와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무엇을 눈에 담아볼까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걷는다. 얼마쯤 걸었을까. 저 멀리 건물들로 둘러싸인 넓은 광장이 보인다. 길 건너 맞은편에는 몸체에 심장을 달고 있는 듯한 평범하지 않은 느낌의 건물이 시선을 이끈다. 건물 1층에 스타벅스가 있는 것으로 보아 유동인구가 많은 곳임은 틀림이 없다. 백화점일까? 미술관일까? 그곳이 무엇이든 나는 몹시 이곳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싶다. 심장 모양의 입구가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는 듯 건물이 살아 숨쉬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저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사랑에 빠지고 싶은 생각이 들 것만 같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은 신트라행 기차가 출발하는 리스본 호시우(센트럴) 역이었다.

3. 산타 주스타 전망대에서 바라본 리스본

전망대 입구를 지나 나선현 철계단을 오르니 머리 위로 푸른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꼭대기에 완전히 올라서자 세찬 바람이 두 볼을 스치고 탁 트인 리스본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정면의 시선 끝에는 상조르즈성이, 왼쪽과 오른쪽에는 동 페드루 4세 광장과 코메르시우 광장이 리스본 전경을 감상하는 재미를 준다.

4.제로니무스 수도원

후기 포르투갈 고딕 양식인 마누엘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500년이 넘는 역사를 품고 있는 제로니무스 수도원. 한 때 부유했던 포르투갈의 국력을 대변하듯 화려하면서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사각형의 회랑 복도를 한 바퀴, 두 바퀴 돌며 걷다 보니 여기서 얼마나 걸었는지 가늠을 할 수 없게 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곳의 일부가 된 것처럼 나 자신을 잠시 잊은 채 계속해서 걸었다.

5. 벨렝탑

제로니무스 수도원 근처 강어귀에 자리한 벨렝탑으로 향했다. 건물 입구로 이어지는 다리길 위로 이미 방문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벨렝탑 앞에서 입장을 기다리는 시간. 펜과 종이를 꺼내 든다. 무력하게 흘려보낼 수도 있었던 시간을 멈춰 세워 눈 앞의 순간을 종이 속에 담았다.

6. 발견기념비

벨렝탑에서 다시 제로니무스 수도원 방향으로 강변을 따라 걸으면 발견기념비가 나온다. 포르투갈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선원들과 그 후원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로 총 33인의 인물이 각자 특징 있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불안감을 뒤로하고 새로운 어떤 것을 성취하기 위해 도전한 자들. 과연 저들이 현재에 만족하고 안주했다면 굳이 항해를 시작했을까? ‘현실에 안주해 도전을 멈추는 순간 새로운 것은 없다’ 기념비에 올라선 그들이 던져주는 메시지 같았다.

7. 에그타르트 맛집 ‘Pasteis de Belem’

포르투갈 하면 에그타르트, 에그타르트 하면 바로 이곳 ‘Pasteis de Belem’. 직역하면 ‘벨렝 제과’ 정도. 이곳에서는 ‘나타(Nata)’라 부르는 에그타르트 원조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이 에그타르트 원조라 불리는 이유는 바로 옆에 있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에그타르트가 처음 탄생했기 때문이야. 예전 수도원에서는 옷을 빳빳하게 하기 위해 달걀 흰자를 썼는데, 그 때 남은 노른자를 사용해 디저트를 만들기 시작해 탄생한 것이 바로 에그타르트, 즉 나타였어.” 긴 줄을 서 있던 중 말동무가 필요한 듯 말을 걸어온 어느 할아버지의 말이다.

8. 리스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목 ‘Beco das Farinhas

“리스본은 어제 왔나? 원한다면 내가 리스본 투어를 시켜주지! 대신 여기 술 한 병만 사주게” 무슨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제안을 수락한 후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걸었다. 미로 같은 리스본의 골목길을 걷다 ‘이 좁은 골목은 조금 특별한 곳’이라며 안내판을 가리켰다. ‘골목집의 벽에 걸려 있는 사진들은 이곳에 살고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들께 바치는 작품입니다. 그분들은 매일 이 골목길을 걸어 다니며 따뜻한 마음과 미소로 이곳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고 계십니다’ 그는 설명을 덧붙인다. “영국 출신의 사진 작가 카밀라 왓슨이 몇 년간 이곳에서 지내면서 동네 어르신들의 사진을 찍어 그분들이 살고 있는 집 벽에다 걸어둔 것이 지금의 이 거리를 만들었어. 술이 숙성하듯이 저기 저 사진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내겠지. 허허” 한 손에 쥐고 있던 체리주를 들어 올리며 말을 하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이 멋진 곳을 평생 보지 못할 뻔했어요.”

9.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

바다를 보는 듯 넓게 펼쳐진 테주 강과 언덕을 따라 들어선 주황빛 지붕의 건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인상 깊은 전망을 연출하고 있는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 전망대에서 버스킹을 하는 연주가들의 음악 소리가 산산한 바람을 타고 들려오니 분위기에 취한다는 표현이 바로 이럴 때 쓰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이 평온하다. “나는 이만 내려가 보도록 하겠네” 잠시 여행을 함께 해준 그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는 듯 이제 떠날 준비를 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즐거운 여행시간이 되었어요. 건강하세요.” 자네도 남은 여정 동안 즐겁게 여행하고 포르투갈을 사랑할 수 있길 바라네.” 그는 엄지를 치켜들며 작별 인사를 하고는 전망대 옆 트램길을 따라 유유히 사라졌다.

10. 비 내리는 리스본의 밤 그리고 연주하는 노인 (Calcada do Duque 골목)

다가가서 보니 비에 젖은 계단에 앉은 한 노인이 홀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는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긋이 눈을 감고 연주를 하고, 나는 함께 비를 맞으며 묵묵히 그를 바라본다. “Obrigado.”(고맙습니다) 어느새 연주가 끝이 나고, 주머니에서 꺼낸 2유로짜리 동전을 살포시 기타 케이스 안에 올려두며, 나 또한 감사함을 전달했다. “낭만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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