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100년, 조선일보의 기록
오늘(3월5일) 조선일보가
100년이 된 날입니다.
이후엔 권위주의 정부,
북한의 세습 독재와 맞서 싸웠다.
운동권 좌파의 괴담과도 맞섰다.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
시대와 맞서고
시대를 이끌어온 100년이었다.
- 2월29일 조선일보 1면
창간 100년을 맞는 조선일보가
2월29일자 1면 기사에서
지난 100년을 자평한 대목인데요.
기사 제목은
‘3·1운동으로 태어나,
불의한 시대에 저항했다’
였습니다.
미디어오늘이
조선일보의 지난 100년을
몇 개의 장면으로 추려봤습니다.
01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방응모(아래 사진)는
1922년부터 5년간 평안북도에서
동아일보 신문지국장이었으며
신문 대금이 밀려
본사로부터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금광을 발견해 벼락부자가 되어
1933년 3월21일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02
조선일보는
이봉창의 폭탄 투척 사건이 있었던
1932년 1월10일자에서
“어료차(천왕의 마차)에 이상이 없어
오전 11시50분 무사히
궁성에 환행하시었다”고 보도했으며,
그해 5월8일자에선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사건을
“흉행(兇行)”으로 보도했다.
03
조선일보는
1937년 1월1일 1면에
일왕 부부 사진을
1면에 크게 실었으며
1940년 폐간 전까지
매년 1월1일 일왕 부부 사진을 싣고
충성을 맹세했다.
04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한
1950년 6월28일
조선일보는 호외(아래 사진)를 내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경애하는 수령인 김일성장군 만세!”
라고 적었다.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한 사실이 없으며
인민군이 조선일보사의
남겨진 시설을 이용해 만든
선전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05
조선일보는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호외에서
‘군부 쿠데타’로 명명했지만
이틀 뒤인 5월18일
‘쿠데타’란 단어는 사라졌고
19일 사설에선
“지향할 바를 몰라
방황할 뻔하였던 대다수 국민에게
극히 축복스러운 일”이라며
“그(박정희)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었다.
06
조선일보는 1968년
정부의 지급보증 특혜로
일본에서 민간차관 400만 달러를 들여와
코리아나호텔을 짓게 됐다.
조선일보는 현금 한 푼 없이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호텔을 갖게 됐다.
07
전두환 신군부시절
언론인 강제해직, 언론사 통폐합,
보도지침, 언론기본법 등
독재적 언론 통제를주도했던
허문도(사진)는
1964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해
동경특파원을 거친 뒤
1980년 신군부에 발탁,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과
문화공보부 차관 등을 거치며
‘20세기 최악의 폴리널리스트’가 됐다.
08
조선일보는 1980년 8월23일
‘인간 전두환’ 특집기사를 싣고
“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
“사에 앞서 공…
나보다 국가 앞세워”,
“자신에게 엄격하고
책임 회피 안 해”,
“남에게 주기 좋아하는 성격”,
“운동이면 못하는 것 없고
생도 시절엔 축구부 주장”
따위의 부제를 달았다.
전두환은 4일 뒤 단일후보로
11대 대통령이 됐다.
09
조선일보는 1986년 11월17일
‘김일성 총 맞아 피살’이란
호외를 내고
“세계적 특종”이라고 자평했다.
그리고 김일성은
18일 오전 평양 공항에 모습을 드러내
이 신문의 “세계적 오보”를 알렸다.
10
조선일보는 1998년 10월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이던
최장집 고려대 교수를
사상 검증한다며
그의 논문 중 일부만 발췌해
김일성을 찬양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최장집 죽이기’ 사태로 이어졌고
최 교수는 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이 사건은 ‘안티조선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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