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의 추악하고 낯부끄러운 민낯
서울 강남구 수서동은
이성계의 일곱째 아들 무안대군 부부와
광평대군 자손들 묘가 있어
궁마을 또는 궁촌으로 불렸습니다.
원래 여기는 경기 광주군
대왕면이었는데
서울 편입 때 한강 서쪽에 있다고
수서동이라 불렀죠.
옆 마을은 동네에 있던
‘일원’서원의 이름을 따서
일원동이 됐는데요.
수서지구 개발로
수서동과 일원동은 금싸라기 땅이 됐죠.
원래 개펄이던 개포동이나
뽕밭이던 잠실도
반세기 전엔 황무지였습니다.
부동산 투기와
부패정치의 결정판인 수서비리는
1991년 2월3일자
이용식 세계일보 기자의 특종으로
세상에 드러났는데요.
그러나 검찰은
이 사건을 꼼꼼하게 조사하지 않고
몇몇 단역들만 잡아 넣었죠.
한보그룹 비자금이
300~400억원에 달한다는 보도에도
검찰은 12억원밖에 안된다고
축소해 발표했는데요.
장아무개 청와대 비서관 혼자서
이렇게 큰 일을 해낼 수 없으리라는
심증이 있었지만…
검찰이 더 움직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이대로 묻혔습니다.
일벌백계를 피해간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은
믿는 것이 있었는데요.
바로 기자들을 장악하는 것이었죠.
정태수 회장이
서울시청 기자들을 상대로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씩
촌지를 돌린다는 이야기가
1990년대 초에 파다했죠.
1990년대 서울시청을 출입하면서
정 회장의 돈봉투를 받았다가
되돌려 준 기자에 따르면
액수가 상상을 초월했다고 합니다.
1990년 결혼한 한 언론사 기자는
정 회장에게 축의금으로
1000만원을 받았다고 하네요.
사실 정태수 회장은
언론계에 뚜렷한 인맥이 없었습니다.
4·19 세대로 고려대 법대를 나온
이아무개씨를 사장으로 앉힌 뒤부터
언론 로비에 적극 뛰어들었죠.
이 사장은 언론사 사장과
국장급 이상 간부진으로 구성된
‘4월회’를 로비 창구로 이용했죠.
1997년 4월5일 동아일보는
한보 리스트를 보도했는데요.
여기엔 중견 언론인 40명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검찰은 이 역시 덮고 말았는데요.
1990년대 초부터 집권한
신한국당 내 일부 민주계 의원들은
기자들에게
“한보 사건에서 기자들은
과연 깨끗하냐”고 힐난했죠.
1991년 ‘6공 최대의 비리’라 불리던
수서비리가 터지자
언론은 자정선언을 했지만
나아진 것은 별로 없었는데요.
그래도 언론계 자정을 위해
노력하는 사이
1990년대 중반 대부분의 출입처에서
촌지 문화가 사라지기 시작했죠.
그러나 한보그룹은
이보다 더 크게 움직였는데요.
1996년 한 해에만
3개 지상파 방송사 150여편의 프로그램에
협찬 명목으로 50억원을 지원하고
언론재단 설립까지 추진했죠.
당진제철소 완공을 앞두고는
출입기자와 논설위원까지 모셨습니다.
그리고 1996년 9월
인도네시아 한보건설 현장에서
큰 사고가 났지만
대부분의 언론들은 이를 외면했고
당시 유력 공영방송은
취재기자가 출고한 기사도 누락시켰죠.
한보 비자금 이면엔
한국언론의 민낯이 드러나는데도
우리 언론은
더 이상 캐려 들지 않았는데요.
IMF로 한보그룹이 무너진 뒤
돈 받은 기자들은 조용히
가슴을 쓸어 내렸을 뿐이었죠.
그 때만 해도
기자들이 담합해 보도 안 하면
천지개벽할 사건도 묻혔는데요.
한보 비자금은
언론인, 자신들의 치부였으니
당연히 보도는 절대 안했죠.
날마다 다이내믹한 한국에서
1등 신문의 민낯을 잠시 드러냈던
‘박수환 문자’도 금세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20년전이 아닌데요.
온라인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곳곳에 저격병처럼 도사리는 21세기에
없었던 일이 될 걸로 믿는다면
크나 큰 오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