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이 난리인데 래퍼들은 왜 조용할까?
시국에 침묵하는 래퍼들을 향한 대중의 비난이 뜨겁다.
‘스웨그(swag)' 넘치고 멋지다는 찬양을 한 몸에 받던 이들이 ‘힙찔이(힙합찌질이)'로 조롱당하고 있는 거다.
그동안 미디어를 통해 주목받아온 유명 래퍼들은 랩이라는 수단으로 어떤 대상을 향한 원색적인 비난, 여성 혐오와 공존하는 예쁜 여자친구 자랑, 돈 자랑, 개인적인 분노 등을 서슴지 않고 펼쳐왔다.
아티스트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기에 이런 말초적인 화법은 힙합이라는 문화 안에서 대중의 이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전 국민이 분노하는 시국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이 비겁하고 얄밉다는 반응이다.
이런 모습이 ‘작은 일에만 분개 하는 겁쟁이’라는 인상을 주게 된 거다.
최근 산이가 발매한 시국 비판 가사가 담긴 음원 ‘나쁜X’이 화제가 됐다.
이 곡의 여성 혐오 논란은 논외로 하면, 유명 래퍼가 용기 있게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비난의 화살은 또 다른 인기 래퍼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연예인이 래퍼만 있는 건 아닌데 사람들은 왜 래퍼들에게 시국 비판의 총대를 매라고 요구하고, 래퍼들은 왜 대중이 원하는 시국 비판 랩을 속 시원하게 펼치지 못하는 걸까?
가요 관계자들도 이 점에 대해 지적했다.
MC메타나 제리케이의 가사를 보면 정말 깊이 있고 좋거든요.
물론 확실히 이 상황에 대해서 이해를 못했거나 판단력이 없으면 가만히 있는 게 낫습니다.
그런데 확신이 있는데도 가만히 있는 건 비겁하다는 생각이에요.
좀 더 인지도가 센 사람들이 나서줘야 하지 않나요? (힙합 레이블 관계자 A)
블랙리스트의 압박
물론 래퍼들 입장에서는 굳이 시국 비판 랩을 하는 위험을 감수하기 쉽지 않다.
암암리에는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니 인기와 돈을 다 가진 입장에서 잃을 것이 많은 베팅은 안 해도 그만인 셈이다.
첫 번째 고비가 세무조사에 대한 우려에요. 그 영향이 없잖아 있을 거고요.
이미 잘 되고 있는데 사명감을 갖고 시국에 대해 얘기할 래퍼들이 1세대 아니고는 거의 없어요.
있을 수야 있지만 회사가 막았다고 방패삼아 얘기하는 것도 많을 거라고 봐요. 스스로 생각하고 나서서 할 거라고는 기대하기 힘들죠. (힙합 레이블 관계자 B)
게다가 이미 메이저 화 된 힙합 신에서는 대기업과 유통사 관계를 생각했을 때 선뜻 본인의 뜻만으로 나서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독립성을 유지하는 레이블은 용기 있게 하는데 몸집이 큰 레이블일수록 몸을 사릴 수 있어요.
대기업에 속해있다거나 큰 유통사와 계약이 된 레이블일수록 적극적이지 않을 수 있죠. (힙합 레이블 관계자 A)
모르거나, 관심 없거나
외적인 압박의 문제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다음 이유는 래퍼 본인에게 있다.
시국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명확하게 파악할 자신이 없거나, 용기가 없거나 셋 중 하나다.
파악을 하더라도 이해도가 낮고 깊이가 없죠.
섣불리 했다가 욕먹는 거 보단 안하는 게 낫다고 보는 게 아닐까 싶어요. (힙합 레이블 관계자 A)
특히 외국 출신 래퍼들은 국내 정서에 무지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비판 가사를 쓸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도 고려할 수 있다.
그 친구들 중에서는 ‘있는 척’만 하지 국내 역사나 정서 등에 전반적으로 무지한 경우가 많아요.
굳이 나서서 싸우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문제없으니까요. (힙합 레이블 관계자 B)
여기서 ‘요즘 래퍼’들이 조롱받는 가벼운 가사에 대한 문제가 다시 등장한다.
깊이가 없고 가사에 돈 자랑, 여자 얘기, 자기 자랑밖에 남질 않는다는 지적이다.
그러니 시국 비판 가사가 나올 환경은 애초부터 메말라 있었던 거다.
그런데 요즘 인기 있다는 래퍼들의 음악은 자아가 없고 돈과 허세, 여자 얘기만 가득해요.
아마 앨범의 1번과 5번 트랙의 가사를 맞바꾸든, 1절과 2절의 가사를 뒤바꾸든 전혀 상관없을 거고요.
랩 스킬이나 플로우, 콘셉트를 잘 잡는 ‘기능장’은 많지만 ‘장인’은 없는 느낌인 거죠. (힙합 레이블 관계자 B)
“시국 비판 랩 맡겨놨어요?”
이런 상황에 대해 몇몇 래퍼들은 “시국 비판 랩을 당연히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몰아붙이는 대중의 반응에 “맡겨놨느냐”고 반박한다.
그들은 힙합이 저항 정신에서 탄생했다는 말은 와전된 것이며, 다양한 장르의 주제에 대해 노래할 수 있지만 래퍼들이 꼭 시국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낼 의무는 없다는 입장이다.
이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슬픔이나 분노를 래퍼들에게 강요할 이유가 없다”고 공감하고, 질타하는 입장에서는 “그건 발 빼고 싶은 자기들만의 비겁한 합리화다”라고 말한다.
물론 누가 맞고 아니고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다. 어떤 가사를 쓰든 그건 창작자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결국 판단은 대중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시국 비판에서 슬그머니 발을 뺀 래퍼들의 돈과 슈퍼카와 예쁜 여자친구 자랑 노래가 앞으로도 환호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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