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분, 아담 램버트
“He’s no Freddie Mercury”(그는 프레디 머큐리가 아니다)
내년 1월 내한을 앞둔 록밴드 퀸(Queen)의 공연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말이다. 퀸의 프론트맨으로 활동 중인, ‘아메리칸 아이돌’ 출신의 미국 팝스타 ‘아담 램버트’가 자주 하는 오프닝 멘트다.
7년 동안 퀸과 함께하고 있지만, 그는 프레디 머큐리가 아니다. 그 자신이, 이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다. 매 공연 시작도 전부터 프레디 머큐리를 향한 그리움부터 쏟아내는, 이 청년과 퀸의 인연은 사실 특별하다.
어쩌면, 아담 램버트를 소개하는 일은 불필요할지 모른다. 팝을 좋아하는 사람 중, 그의 노래를 모르는 팬은 드물다.(맥주 CF가 자동 연상될 수 있다.) 국내에는 이미, 한 리포터의 실수로 ‘아름다운 분’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오늘 하루만 사심 가득한 퍼블리시스트가 될 수 있다면, 조금은 색다른 관점에서 그를 이야기하고 싶다. “자신만의 색깔을 지니고도, 함께 걸어온 퀸의 역사”를 완벽하게 이해한, 이 영민한 청년의 진실된 면면을 펼쳐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은 긍정적인 시선이 압도적이다. But, 아직도 남아 있을 아담 램버트를 향한 선입견을 날려 버리고 싶은 게 솔직한 이유다. 퀸의 두 거장에게는 ‘신이 내린 선물’이라는 아담 램버트의 본격 영업글을 시작한다. 미리 밝혀두자면, 전지적 글램버트(아담 램버트 팬덤) 시점이다.
아담 램버트는 재능 넘치는 아이였다. 넘치는 에너지를 방출하고자(부모님 피셜), 어린 시절부터 뮤지컬을 배웠고, 대학까지 뮤지컬 전공으로 입학했다. 타고난 무기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그의 인생은 잘 풀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Why?
축구보다는 망토 뒤집어 쓰기를 좋아했던 소년은, 학창시절 내내 외톨이 신세를 져야 했다. 열두 살이 되고는 자신의 성 정체성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했다.
대학을 중퇴한 후에는 더욱 지독해졌다. 벌레가 들끓는 집에 살며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그의 부모님은 모든 지원을 끊었다.)
19살 무렵, 가까스로 크루즈선 밴드 보컬 일을 구했다. 유럽을 횡단하며 겪은, 무시와 괄시 섞인 편견은 참을만 했다. 실력으로 뒤집어 놓을 때 더 멋졌다고.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시련의 조각은 모이지 않았다. 드디어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게 됐으나, 언더스터디 역할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갈증을 느낀 아담 램버트는 ‘록스타’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때마침 ‘아메리칸 아이돌’을 보게 됐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때부터였다. 준비된 괴물 신인의 포텐은 무섭게 터져 나왔다. 독설가로 유명한 사이먼 코웰의 선입견까지 녹여내며 준우승으로 졸업했다.
행보는 말하기도 입아프다. ‘For Your Entertainment’라는 데뷔 앨범 제목 그대로였다. ‘아담 램버트’라는 이 인물은, ‘아메리칸 아이돌’을 넘어 팝 시장에 단비 같은 존재가 분명했다. 그가 내딛는 모든 걸음은, 더 이상 거친 오르막길이 아닌 자연스러운 기록의 물결로 이어졌다.
그는 신중했다. 폭발적인 화제성에만 의존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1집 앨범 후 3년이 흘러서야 2집을 발표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트랙간의 스토리 흐름을 더 강조한 듯 했다. 그러면서도 눈치 보기 식 구성도 없었다.
타이틀 곡 ‘Trespassing’은 발매 첫 주 만에 1위를 차지했다. 미국에서 커밍아웃한 가수가 빌보드 200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적은, 단언컨대 없었다. 외신의 “역사적인 결과”라는 칭찬도 당연했다.
준비 운동이 길었다. 앞의 설명이 꼭 필요한 순간이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퀸버트’의 역사가 펼쳐졌다.
퀸과 아담 램버트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아담 램버트는 퀸의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로 오디션을 봤다. 프로그램 출연 당시에는, 함께 무대를 꾸미기도 했다.
두 팀의 엔터테이너 적 영혼은, 곧바로 균형을 이뤄냈다. 아담 램버트는 2012년부터 퀸의 프론트맨으로 함께하고 있다.
퀸이 택한 이 남자는, 판타지 같은 현실을 용기있게 마주했다. 결코 프레디 머큐리의 빈자리를 채우려 애쓰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를 되살릴 수 있도록 스스로를 비웠다는 것. 기존의 틀 안에서, 자신의 색깔을 조율하며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흉내 내기에 그치지 않으려 한 것이다. 프레디 머큐리의 정신을 담아내고 싶었던 그가 선택한, 퀸의 현재를 이어가는 방법으로 보인다.(퀸 멤버들 역시, 각자의 색깔을 유지하며 퀸 활동에 임해왔다) 결국은 그들을 향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10대 시절부터 꾸준히 쌓아온, 내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결국은, 시간 문제였다. 그의 겸손한 균형은, 수많은 관객들의 선입견을 마침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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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의 두 거장도, 인정하고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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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 활동은, 그에게 자극과 힐링을 동시에 선사했다. 아담 램버트는 3집 앨범(The Original High)으로도 기록을 썼다. 좀 더 현실적인 삶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고, 관객들도 각각의 ‘오리지너 하이’를 찾은 듯했다.
‘골드 레코드’, 아메리칸 아이돌’ 출신 뮤지션 중, 2015년 한 해 수익 1위(약 1천만 달러·한화 약 120억 상당) 등의 성적이 말해줬다.
그리고 4년 후, 그는 뜻밖의 소식(?)을 들려줬다. 메이저 레이블을 떠나, 독립 레이블로 이적했다는 것.
의아해하는 모두에게, 그는 힘겨운 사실을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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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상업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일련의 상황에 좌절을 느낀 듯 보인다.(아담 램버트는 오해하지는 말아달라며, 자신의 작업들에 자부심을 느낀다고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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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과의 콘서트 덕분에 활기차고 창조적인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목표도 밝혔다. 타임리스 음악을 하고 싶다는 것. 시대를 불문하고 사랑받는, 퀸의 노래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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