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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녹는 온도, 정이현 신간

조회수 2017. 12. 11. 09: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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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을 줄 알면서도 눈사람을 만드는
당신을 위하여
이 도시에 살면서 동물원에 가본 적 없다는 은우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동물원과 미술관과 가족놀이공원과 경마장을 가진 그 도시에 은우는 세 해 전에 이사 왔다.

사슴이의 건강에 본격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였다.
춘천역 광장에 햇빛이 어설프게 내려앉았다. 벚꽃 봉오리들이 희게 피어나고 풋내나는 바람이 불었다. 서로의 마음을 칠십퍼센트만 내비친, 연인이 되기 직전의 남자와 여자가 마주보고 터트리는 수줍은 웃음 같은 바람이었다.
제주는 처음이었다. 공항에서 100번 버스를 타고서 제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동 일주 노선버스가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잔잔한 풍경들이 지나갔다.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버스는 그녀를 작은 마을 정류장에 내려놓았다.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오직 거기 도착하는 것만이 목표라는 듯이 그녀는 열심히 걸었다. 멀리 이층집 한 채가 보였다. 나흘 밤을 머물 곳이었다.

문을 열자, 한 남자가 보였다.
두 사람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목적지는 동해안. 자동차를 운전해서 갈 것이고, 금요일 저녁에 떠나서 일요일에 돌아올 것이다. 그 외에 또 무슨 계획이 필요하단 말인가? 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여행을 일주일 앞둔 날, 윤은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선이 보낸 것이었다. HWP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다.

제목은, 플랜A였다.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 224-1. 1호선 부평역 지하에 위치한 부평역 상가는 우리나라 최대의 지하상가다. 수연은 그 사백여 개가 넘는 점포들 중 한 곳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최저 시급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이었고 이제는 월급을 받는 매니저가 되었다.

상혁과 처음 만나게 된 건 그 사이의 어떤 하루다.
M과 J는 스무 살 때부터 친구 사이였다. 거듭 ‘그냥 친구’라 설명했지만 남들의 귀에는 그런 말은 걸러서 들리는 장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왜 둘이 사귀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했다. 둘 다 처음엔 다만 웃으면서 ‘우리는 친구’라고 답하곤 했다. 그래도 상대가 수긍하지 않고 자꾸 딴소리를 하거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면 정색을 하고 “우리는 아니야”라고 잘라 말했다.

M과 J가 서른두 살이 되었을 때 각자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축복하며 응원했다.

언제 한번 넷이서 저녁이나 먹자고 제안한 건 M이었다.
그들은 맞선을 통해 만났다. 둘이 처음 만난 곳은 지금은 없어진 명동의 한 커피숍이었다. 음료를 주문해야 할 때 여자는 커피를 마시겠다고 했다. 8월이었고 기온이 30도에 가깝게 무더운 날씨였으므로 남자는 그녀가 당연히 차가운 커피를 주문하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주문을 받는 직원에게 그녀는 말했다.

“저는 뜨거운 커피요.”
“성악을 전공했다면서요.”
“그만큼 잘하는 다른 것이 없었으니까요. 다른 어떤 것을 해도, 노래를 부를 때만큼 칭찬받거나 주목을 끌지 못했어요. 어림도 없었죠. 보시다시피 전 아주 평범하게 생겼고, 학창 시절에 수학도, 달리기도, 종이접기도 못했어요. 친구들이 착착 색종이를 접어 학도 만들고 꽃도 만들고 비행기도 날릴 때 저는 그 야무진 손끝을 바라보고만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음악 시간엔 달랐군요.”
“네. 음악 시간이나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는요. 제가 노래를 시작하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곤 했어요. 평소엔 말도 별로 없고 아무런 존재감이 없던 조그마한 아이였으니. 언젠가부터 모두 저를 ‘노래 잘하는 아이’라고 불렀고, 저한테도 그게 자연스럽게 귀에 익었어요.”
“그때는, 그러면, 지금 같은 증상이 없었나봐요.”
그들이 애초에 따로 떨어져 살게 된 이유를, 이제 와 자세히 기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장미는 지숙의 딸이고, 열 살 이후에는 엄마와 다른 집에서 살았다. 장미는 할머니와 아빠와 함께 살았다. 같이 살지 않는다는 것이,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회원님.”
그녀가 불쑥 해미를 불렀다.
“제가 하나 마나 한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네? ……네.”
“속이 상할 때는요, 따뜻하고 달콤한 걸 먹으면 도움이 좀 되더라고요. 제 경우에는요.”
“네, 그렇군요.”
“그렇다고 상한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잠시 잊을 수 있으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해미는 트레이너를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아주 짧은 동안이었다. 이곳에 와서 자신이 처음 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트레이너도 해미를 마주보고 웃었다. 맑은 웃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해미는 아직 그녀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땅 위에 눈이 푹푹 쌓여갔다.
눈사람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
거기에 더해진
정이현의 목소리

어떤 눈도 녹는다는 것,
녹고 만다는 것.

처음도 끝도 아닌,
처음과 끝을 포함한 여러 개의 조각들에 관하여.
녹을 줄 알면서도 눈사람을 만드는
당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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