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의 타계로 가장 주목받은 것은?

조회수 2020. 10. 29. 11:0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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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삼성을 있게 한 혁신, 이병철 회장의 '도쿄선언'
출처: KBS 뉴스 영상 캡처: 고 이건희 회장(좌), 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우)


이건희 회장의 타계 소식과 함께 1993년 그가 외친 ‘신경영 선언’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삼성의 도전정신이 여실히 담겨있는 한 마디,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라”

이에 못지 않게 이건희 회장에 앞서 삼성을 이끌었던 이병철 회장의 ‘도쿄선언’ 역시 삼성이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도전정신을 보여준 사건 중 하나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의 심장부에서 울려 퍼진
삼성의 도전장, 도쿄선언!

출처: 디씨멘터리 "일본과 미국의 멸시와 무시를 존경으로 바꿔버린 이 남자"


1980년대만 해도 한국은 일본에 비해 기술력이 상당히 떨어졌다. 당시 연초가 되면 우리나라 대기업 임원들이 일본에 가서 신기술 동향을 파악하고 사업기회를 살펴보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그 시기에, 정확히는 1983년 2월, 이병철은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겠다는 패기 넘치는 포부를 세상에 발표했다. 그것도 반도체 분야에서는 이미 세계적 우위를 선점하고 있던 일본, 도쿄에서 말이다. 이것이 이른바 ‘도쿄선언’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도전을 선포하다니! 선포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지만, 사실상 삼성그룹 전체의 명운을 좌우할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도전’이라 쓰고
‘도박’이라 불리던 삼성의 행보

출처: SBS CNBC 뉴스, SBS 뉴스, YTN 뉴스 영상 캡처


당시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일본이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고 있었고, 기술 선진국인 독일이나 프랑스도 조심스럽게 진입 가능성을 살피던 때였다. 이병철 역시도 미국 방문 후, “반도체가 중요한 것은 알겠는데 너무 늦었기 때문에 쫓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국내 기술로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룰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신기술에 들어갈 막대한 자금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던 시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재계 순위에서 앞서던 현대가 반도체 산업진출을 선언했기에, 삼성으로서는 더 이상 고민할 수만은 없었다.


이러한 삼성의 선언에 대해 여론도, 업계도, 반도체 전문가들도 모두 회의적이었다. 삼성이 국내 대기업이긴 했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인지도 낮은 저품질 가전회사에 불과했고,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출발한 삼성반도체는 아직 기초적인 수준에서 선진 기술을 습득하는 단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


심지어 미국의 인텔은 이병철의 도쿄선언에 대해 “과대망상증 환자” 라고 평가했고, 일본의 미쓰비시연구소는 한발 더 나아가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그 5가지 이유는 ‘한국의 작은 내수시장’, ‘취약한 관련 산업’, ‘부족한 사회간접자본’, ‘기업의 열악한 규모’, ‘빈약한 기술’이었다.


이들이 내린 결론이 다소 격하게 표현된 것은 있으나, 그 진단 근거는 정확했다. 이병철 스스로도 삼성의 절반이 날아갈 수 있는 모험사업임을 알고 있었다고 인정했다. 만약 삼성이 반도체에서 실패하면 삼성에 위기가 올 것이고 그럴 경우 취약한 국내 경제 전반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으리라는 우려도 있었다.

보란듯이 전 세계를 뒤집은
삼성반도체의 혁신!

출처: SBS CNBC 뉴스 영상 캡처


이 모든 부정과 우려 속에 시작된 삼성의 도전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 반도체 혁신의 시초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삼성은 우선 기흥에 대규모 공장 부지를 확보하면서 본격적으로 반도체 연구와 생산에 착수했다. 당시 창립 직원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들이 세운 목표는 64K D램을 개발하는 것이었고, 정신무장을 위해 64km 산악행군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무모한 도전은 불과 6개월 만에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후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선두로 치고 나갔다. 10년이 지난 1992년에는 64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면서 D램 분야에서 매출액 세계 1위를 달성했고, 도쿄 선언으로부터 10년이 지난 1993년에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 자리에 올랐다. 또 1994년에 256MB D램 역시 세계 최초로 개발하면서 일본 기업들과의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고 우위를 점했다.


전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며 발생한 치열한 경쟁, 과잉 공급으로 인한 판가하락, 컴퓨터 산업의 불황이 한꺼번에 밀려와 일본의 반도체 선두기업들 마저 하나 둘 씩 무너져 가던 시절에도 삼성을 비롯한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살아남았다. 불황기에 더 과감히 투자했기 때문. 웨이퍼에서 나오는 완성품에 불량이 없을 정도로 효율성을 높여 경쟁기업과의 가격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했고, 저가 경쟁 시기가 찾아와 경쟁기업들이 무너질 때 시장 점유율과 수익을 확보하는 전략으로 여러 차례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삼성은 지금까지도 최고의 효율성과 신기술 개발로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삼성이 써내려 간 한국 반도체 성공신화,
그 비결은?

출처: SBS CNBC 뉴스 영상 캡처


삼성반도체의 혁신과 생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정부는 대기업의 반도체 산업 진출에 회의적이긴 했지만, 반도체 사업 개발 초기에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에 고무되어 국내 반도체 산업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1985년에는 ‘반도체 산업 종합 육성 계획’을 새로 발표하고, 연구비 지원을 큰 폭으로 늘리는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부의 지원 규모는 1991년 말 30대 재벌 주력업체 재무구조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 72개사의 평균 부채비율은 435.2%. 반도체 산업의 막대한 투자자금을 부채로 충당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금융시장에 대한 정부의 영향은 매우 컸고, 금융시장에서 대규모 투자를 뒷받침하지 않았다면 반도체 성공 신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덕분에 삼성뿐 아니라 현대, LG도 세계 선두 수준으로 기술을 따라잡으며 한국은 반도체 강국이 되었다. 한국의 반도체 성공신화는 모험을 마다하지 않은 기업가 정신의 발로이면서 정부의 적극적 지원에 의해 발전한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또한 정부는 민관과 산학을 망라한 협업에서도 많은 지원을 하며 전방위적 소통과 교류의 장을 만들었다. 1985년 대기업삼성, 현대, 금성은 관련 중소기업과 함께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는 연구조합인 한국반도체연구조합을 결성했다. 그리고 여기에 투입된 총 1,900억 원의 연구비 중 600억 원을 정부가 지원했다. 말 그대로 기업과 정부, 대학과 연구원이 모두 합심한 사업이었고, 단일 사업으로는 당시 사상 최대의 국책사업으로 알려진 초대규모 연구개발 사업이었다. 이 연구개발 사업으로 인해 금성과 현대가 세계 주요 D램 기업으로 성장했고, 나아가 한국이 D램 시장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삼성의 도전과 혁신이 말하는
우리의 현재, 그리고 미래


이병철의 도쿄선언과 삼성의 혁신은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보게 한다.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한국경제가 보유하고 있던 능력이 지금은 사라진 것은 아닐까? 만약 그 능력을 회복한다면, 다시 우리는 세계적인 기업을 키울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과 논의가 담긴 초대 중소기업벤처부 장관 홍종학의 『K-이노베이션』을 통해 그 해답을 밝혀낸다면 한국경제는 다시 혁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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