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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콤달콤

한반도에서 전쟁 일어날 때마다 일본의 경제는 성장했다?

매일경제가 매콤달콤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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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4일 명국 정벌을 내세우며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에 조선의 국토는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했습니다. 명군의 참전으로 도움을 얻었지만 군의 지휘권을 침해당해 갖은 수모를 겪어야 했죠.


조선·명나라 연합군과 왜군 사이의 전투상황을 그린 ‘도산전투도’

출처울산박물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기습 남침을 단행한 북한군으로 인해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됩니다. 이후 참전한 연합군과 중공군은 전쟁이 장기화되자 정전협정을 체결하지만 협상 테이블에 대한민국은 없었습니다.


출처연합뉴스


'임진왜란'과 '6.25 전쟁'은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무려 400년이라는 긴 시간차를

두고 있는 두 전쟁은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을까요?





한반도 전쟁 때마다
'경제 성장' 이룬 日

임란(임진왜란)'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리는 이유는 잡혀간 조선 도공들 덕에 일본에 도자기 문화가 꽃피웠기 때문입니다. 7년의 전쟁 기간 동안 납치된 조선 도공은 3만~1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는데요. 이때 전파된 도자기 제조기술은 일본 경제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 도공들의 도자기 생산 덕에 일본은 중국제 수입량을 80%나 줄일 수 있었습니다. 1658년 경 유럽·중동을 상대로 시작한 도자기 수출로 세계 시장에 '재팬'이란 존재를 각인시켰습니다. 17세기 이래 번성하던 일본의 경제 성장은 에도 시대의 번영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19세기 메이지유신 등의 밑거름이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임란 때 일본에 끌려간 '도자기의 신' 이삼평. 일본 사가현 아리타에서는 매년 5월 `도조(陶祖)제`를 열어 그를 기립니다.

출처매경DB


6.25 전쟁 또한 일본 경제가 도약하는 발판이 됐습니다. 패전 후 침체돼 있던 일본은 한국에 전쟁물자를 공급하며 불어닥친 '조선 특수' 바람으로 경제 부흥에 박차를 가한 것입니다.


일본경제기획청에 따르면 1950년부터 1955년 사이 일본이 조선 특수로 벌어들인 외화 수입은 약 40억 달러로, 당시 일본 한 해 국내총생산(GDP)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6.25 발발 소식을 들은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가 "이제 일본은 살았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죠. 


자동차 수출도 400배 이상 늘어 도요다 에이지 전 도요타자동차 회장은 6.25를 "구제의 신(神)"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한반도에 들어오는 적대세력
막아내는 中의 심리

일본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조선군에 '명의 참전'은 큰 도움이 됐습니다. 하지만 명이 출병한 이유는 선조의 요청이나 의리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이 무너지면 다음 차례는 명이라는 게 분명한 상황에서 전적으로 자국의 안보를 위해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이왕 전쟁을 해야 한다면 자국이 아닌 남의 영토에서 싸우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것이죠.


일본에 함락됐던 평양성을 조·명 연합군이 탈환하는 장면을 그린 `평양성 탈환도`.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를 해양세력의 진입을 막는 완충지대로 인식해 왔기 때문에 한반도에 적대세력이 들어서는 것만은 꼭 막으려 해왔습니다. 마오쩌둥의 6.25 참전 결정 또한 이 같은 판단 과정을 거친 결과입니다.


중국은 6.25를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부르며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와 승리한 전쟁`이라고 선전해왔습니다.

출처바이두


또한, 중국은 한반도의 전쟁을 내부 결속을 도모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도 사용해 왔습니다. 중국은 중공군이 한반도에 처음 진입한 10월 25일을 '항미원조 기념일' 이라며 매년 기려왔습니다. 중국의 개입으로 미국에 처음 패배를 안겼다고 선전하며 대내적으로는 반대파를 제거하는 계기로 삼고, 자국민에게는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주어 결속을 도모한 것입니다.


이달 17일 중국 국영방송 CCTV는 항미원조 승리 70주년을 맞아 6.25를 주제로 한 드라마 '압록강을 건너' 촬영에 들어갔다고 밝혔습니다. 이 드라마 역시 중국 국민들의 내부 결집을 노린 의도로 분석되는데요. 중국 당국의 이 같은 선전선동은 미·중 대립이 극에 달한 최근 더 두드러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죠.





韓 지배층 무능이 부른 비극

임란을 얘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것이 '조총'입니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부산 상륙 후 20일 만에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밀고 들어왔고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신하고 맙니다.


자국에 표류해온 포르투갈인들로부터 현재 가치로 2억엔(한화 20억원)에 상당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조총 2자루를 입수한 일본은 약 2년을 공들인 끝에 조총 독자 생산에 성공하게 됩니다.

출처일본 위키피디아


당시 조선 조정이 조총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조총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고 수차례 경고했지만 신립 등 많은 중신들이 귀담아듣지 않았고, 그 결과 큰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죠.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있었던 사건을 직접 정리한 징비록.

출처연합뉴스


360년 뒤,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북한 최정예 3, 4사단과 105 전차 여단의 공격에 국군 제7사단 등 수도 방위군은 속절없이 무너지며 국가 지도자의 도망은 재현됐습니다.


소련군 전차 중 가장 최신식인 T-34 탱크를 240여 대나 보유하고 있던 북한과 달리, 국군에게는 전차가 단 한 대도 없었으며 T-34를 파괴할 만한 화기도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북한군의 탱크를 잠재운 건 '미군'이 투입한 신형 전차 M46이었죠.


6.25 발발 3일 만에 서울에 나타난 북한군 105여단 소속 T-34 전차.

출처미국립문서보관소


전쟁과 분단의 원인은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 강대국들 간 정치적 이해관계 등 여러 요인이 언급되고 있지만, 결국 한 마디로 '국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전 국토가 일본에 유린당하고 400년 뒤 남북 분단이라는 상처까지 남게 된 것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고 국력 신장의 기회를 날려버린 지배층의 지독한 무능을 탓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한 대가는 모두 백성과 국민의 몫이었습니다.

 



이 같은 역사를 상기해 볼 때

일본을 무릎 꿇리고

중국의 오만함을 잠재울 지름길은

그에 걸맞은 '국력'을 갖추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콘텐츠는 매일경제의 기사 

日경제도약·中의 꼼수·원숭이 부대...6.25 닮은꼴 임진왜란을 참고하여 제작했습니다.


[신윤재 기자 / 신소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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