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천재, 하나의 이야기
여기 한 천재가 있습니다.
3살 때 미적분을 풀고
5살 때 5개 국어에 능통했죠.
7살이 되자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석·박사과정에 입학,
8살엔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
화성 탐사 연구원으로 스카우트됐죠.
"아인슈타인의 IQ를 능가한다"
"세계 최고 지능지수 보유자"
수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천재, 그의 이름은
그런데
이 아이에게 닥친 시련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아이의 발목을 붙잡았죠.
한국인은커녕 동양인 한 명
찾기 힘든 주변 환경과
자신을 향한 과도한 세상의 관심이
천재소년의 어깨를 짖눌렀죠
그렇게 인생의 첫번째 실패를 경험하고
1978년 귀국길에 오릅니다.
그의 나이 16세의 일이었죠.
그리고 비록 미국 유학은 실패했지만
'한국 천문학에 기여 하겠다'는
새로운 꿈을 꿨던 아이는
또 다른 장벽에 절망합니다.
천문학 연구를 위한 배움이 필요했을 뿐
학위 취득에 연연하지 않았던 그에게
한국 사회는 '졸업장'을 요구했죠.
한국사회는 나사에서 연구원 생활을
할 때조차 요구하지 않았던 학위를
요구했습니다.
학위가 없다면
국내의 그 어떤 연구소에서도
일할 수 없었죠.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지능이 높은 아이는
한국에서 초·중·고 검정고시를 보며
이 사회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실패한 천재'라는 낙인과 함께...
결국 그는 가장 사랑했던 '물리학'과
이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천재 송.유.근
5살 때 미적분을 풀고,
7살에 양자역학을 이해했죠.
시작은 김웅용씨와 매우 비슷했습니다.
선배 천재의 삶을 알았기 때문일까?
과학기술연합대학(UTS)의 천문우주과학
석·박사 통합과정에 입학하죠.
사람들은 국내 최연소 박사 탄생을
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지나지 않아
실망스러운 소식이 전해집니다.
몇 해 전 해외 학술저널에 투고했던
송유근 씨의 논문이 표절 판정을 받아
저널 게재가 철회된 사건이 일어납니다.
또 한번 사람들은 '천재의 몰락'을
걱정하기 시작했죠.
그러나 송유근 씨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논문 표절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과거 지도교수의 논문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인용 문구를 넣지 않아
표절 논란에 휩싸인 것일뿐"
"나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블랙홀 연구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우주와 밤하늘, 천체물리학이 좋아
이 길을 선택한 것"이라 말하며
그는 세상의 시선에 휩쓸리기 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소신있게 가고 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그의 결기 때문이었을까?
이후 송유근씨는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아
일본 도쿄 미타카 국립천문대에
연구원으로 초청받게 됩니다.
`오카모토 방정식`의 신화로 유명한
오카모토 이사오 명예교수의 지도하에
천문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게 됐죠.
오카모토 교수는 그의 학위도,
표절 이력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가 가진 재능과 학문적 열의만을
평가해 그와 함께하기로 결정했죠.
비슷한 삶을 산 두 천재의 이야기를 보며
학위, 학력, 졸업장이라는 틀에 매여
개개인의 재능이 개발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씁쓸한 뒷면을
생각하게 됩니다.
백승진 유엔 경제사회위원회 정치경제학자
/임창연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