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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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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2014년 10월 31일에 미스핏츠에서 발행되었습니다.
너와 함께한 시간, 곳곳에 책갈피

그 날, 수업에 들어온 교수님은 “여러분은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뜬금 없는 질문에 학생들은 꿀 먹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교수님은 말했다. “저는 요며칠 가끔씩 울컥 할 정도로 많이 우울하네요. 조금 더 늦게 뉴스를 봤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그녀는 신해철의 이야기를 꺼냈다. “여러분 나이 때 듣던 노래들이죠.” 신해철의 노래와 함께한 삶 곳곳에 책갈피가 꽂혀있다고. 그래서 그를 추억하며 자주 울컥한다고.


그리고 그녀는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나를 노래한 사람

서른줄의 한 지인은 신해철의 부고를 듣고 글 하나를 썼다. 신해철 얘기를 듣고 갑자기 생각이 났다며 그는 지난 기억을 꺼냈다.


산꼭대기 작은 반지하방에 그가 있었다. 소설가가 되겠다고 집을 나왔던 그였다. 작업실로 마련한 그 반지하방이, 그가 빠질 수 있는 가장 깊고 어두운 수렁이었다. 그는 그 지하에서 소설을 썼다. 끝나지 않는 글을 붙들고 여러날 제대로 자지도, 제대로 눈뜨지도 못하던 나날. 그 방에 누워 그는 ‘민물장어의 꿈’을 들었다.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두고 온 고향 보고픈 얼굴 따뜻한 저녁과 웃음소리

고갤 흔들어 지워버리며 소리를 듣네

나를 부르는 쉬지 말고 가라 하는


저 강물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익숙해 가는 거친 잠자리도 

또 다른 안식을 빚어 그 마저 두려울 뿐인데

부끄러운 게으름 자잘한 욕심들아

얼마나 나일 먹어야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


하루 또 하루 무거워지는 고독의 무게를 참는 것은

그보다 힘든 그보다 슬픈 의미도 없이

잊혀지긴 싫은 두려움 때문이지만


저 강들이 모여 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일 년 후, 그는 그 반지하방을 나와 회사에 취직을 했다.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메고 출근을 했다. 반지하방으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가 다니던 회사는 영수증을 만드는 회사였다. 그 곳에서 그는 행정과 회계를 담당했다. 지금 그는 다시 직장을 때려치고 반은 직장인으로 반은 소설가로 살아간다. 그에게 신해철은 2009년의 반지하방에서의 자신을 노래해준 사람이었을 것이다.

출처사진= Flickr, CC By Luca Cerini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과정
1년째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친구 하나는 얼마전 오랜만에 정장을 꺼내입었다. 내 또래 세대에게 신해철은 노래보다는 라디오 DJ로 더 친숙한 사람이다. 새벽이면 침대에서 뒹굴며 엄마 몰래 이어폰을 꼽고 고스트스테이션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어색한 정장차림으로 신해철의 빈소에 갔다. 아마 빈소 안에는 그가 아는 얼굴 하나 없었을 거다. 그는 익숙하고 또 낯선 영정 앞에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직접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빈소에 왜 찾아갔느냐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일종의 의식같은 게 아니었을까. 자신의 학창시절, 새벽시간을 함께 해준 한 사람을 보내는 혼자만의 의식.

상실의 의식.


누군가를 잘 잃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아파하고, 또 기억하며, 남은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그 모든 시간. 그 시간을 지나지 않고서는 누군가를 잃고서도 묻을 수가 없다. 누군가를 온전히 보내지 못한 사람은 상실의 시간 안에 갇힌다.
사소한 일 모두가 멈추는 시간

출처사진=Flickr, CC By Henri Louis Hirschfeld

어떤 소설이었을까.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중년의 여자가 남편을 잃었다. 이웃집 여자는 가끔 그녀의 집에 들러 설거지를 해주고, 방을 쓸고 닦아준다. 딸이 그녀에게 묻는다.


“엄마, 왜 저 아줌마는 설거지도 안 하고 집에 가만히만 있어요?”

“응. 사람이 너무 많이 슬프면 설거지를 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머리를 빗고 그런 게 다 힘들 때가 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누군가를 잃고, 슬퍼하는 여자를 위해 이웃집 여자는 그저 함께 기다려줄 뿐이다. 웃고, 농담하고, 집안을 정리하고, 머리를 빗고 새 화분을 들이는 것. 그런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사소한 일을 다 할 수 없는, 그녀의 슬픔을 그저 함께 한다. 아이는 엄마에게서 슬픔에 빠진 사람을 보듬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상실의 시간을 함께 견뎌준 이웃이 있어, 그녀는 어느 날 아침엔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넘겼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다시 살아간다.

상실 앞에서 우리는 참 나쁜 이웃이다

삶에서 죽음이 이렇게 가까웠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허망한 죽음이 많았던 한 해. 신해철의 부고를 듣고 나는 “올해 정말 많은 사람을 잃는다”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얼마 전 판교 환풍구 참사에서, 올 초 마우나리조트에서 목숨을 다 한 대학생들까지. 군대에서 허망하게 가버린 내 또래의 청년들과, 요양병원 화재로 잃은 할머님, 할아버님들. 그리고 세월호 참사로 잃어야 했던 295명의 사람들.


어느덧 찬바람에 외투를 여미는데, 아직도 9명의 실종자는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그 뿐일까. 올해 잃은 수많은 사람들. 그 가족들, 그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진 멍이 어떻게 벌써 아물었을까. 그들은 아직 상실의 시간 속에 있을 것 같다.

출처사진= Flickr, CC BY botterli

우리는 참 나쁜 이웃이다.


그 옆에 우리는 그들에게 얼른 돌아오라고 다그친다. 정말 슬픈 게 맞냐고 묻고, 왜 그렇게 초라하게 앉아있냐고 묻는다. 함께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네가 슬퍼할 자격이 있냐”고 한다. 29일 새벽에, 단원고 고 김동혁군의 어머니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동혁이 동생이 종일 울었다며,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했다. 반 친구들과 사소한 오해로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세월호 유가족이 거지라고. 거리에서 잔다고 말이다.


판교 환풍구 참사가 나자 사람들은 쉽게 말했다. 그러게 왜 거기에 올라가냐. 올라간 사람이 잘못 아니냐. 신해철 씨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에게 누군가는 이렇게 비난했다. 지인의 죽음도 아닌데 누가 죽으면 그렇게 난리들을 한다고.


우리는 왜 그렇게 슬픔을 고까워하나.
누군가를 잃고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쉬운 말로 돌을 던지나.

단원고 고 김동혁 군의 어머니 김성실 씨의 페이스북 글

윤 일병의 어머니가 국방부 청사를 향해 날린 보라색 종이비행기는, 윤일병의 몸에 든 멍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다. 그 보라색 비행기는 국방부의 담을 넘어 날아갔다. 허나 ‘정말’ 그 담을 넘었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국회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또 외면 받았다. 어느 환풍구 위에는 유리벽이 세워졌고, 다시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우리는 너무 조급하고,너무 쉽게 말한다. 누군가를 보듬는 이웃이 되기는 커녕, 다시 삶으로 돌아올 시간도 주지 않는다. 그들이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건 ‘돌아오라’는 다그침이 아니다.


상실은 그렇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글 / 썸머

작성자 정보

미스핏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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