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왕따를 만들어내는 방법

조회수 2019. 10. 24. 08:5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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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은 1942년 알베르 카뮈가 발표한 작품이다. 작품은 발표하자마자 카뮈를 문단의 일약 스타로 만들어 놓았다.
이방인은 다른 나라 사람, 혹은 언어나 사고 방식 따위가 아주 다른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작품 속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사고 방식을 지닌 사람이다.
작품은 다수의 사람과 다른 개인을 사회와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외면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작품이 나온 1942년 당시와, 현재.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우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버려진
부조리한 개인의 이야기
1. 어머니의 죽음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전보를 받고 양로원으로 향했다. 양로원에 도착한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였지만 오히려 다른 이들은 뫼르소보다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였다.
장례식이 끝나자 뫼르소는 해수욕장으로 향했고, 그 곳에서 마리를 만나게 된다. 오래전부터 마음이 있던 마리와 해수욕을 즐긴 뫼르소는 집으로 돌아와 집밖 거리의 모습과 사람들을 구경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끝났고, 주말도 끝이 났고 내일은 다시 회사에 나가 일을 해야했으므로, 결국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2. 그리고 아랍인의 죽음.
뫼르소는 장례식 이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같은 층에 사는 이웃 레몽과 알고 지내게 되었다. 레몽은 소문이 나쁜 사람이었지만, 뫼르소에게는 그러한 점이 그와 친구가 되지 못할 이유는 아니었다.
레몽에게는 내연녀가 있었는데 레몽은 그 여자에게 경제적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속고 있었다면서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뫼르소에게 집을 나간 그녀를 꾀어내기 위한 편지 한통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누가 봐도 들어주기에 좋은 부탁은 아니었지만 뫼르소는 편지를 써주지 않을 이유도 없었기에 편지를 써주었다. 그리고 레몽은 뫼르소의 편지 덕분에 그의 내연녀를 불러들여 복수하는 것에 성공한다.
3. 다수와 개인, 정상과 이방인의 경계.
뫼르소는 그 이후 레몽과 어울렸고, 둘은 뫼르소의 연인이 된 마리와 함께 레몽 친구의 별장으로 놀러가게 되었다.
별장 근처에는 해변이 있었고 그들은 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기다가 그곳에서 레몽의 내연녀의 오빠와 그의 아랍인 친구 패거리들이 따라온 것을 알게 되었다.
레몽과 레몽의 친구, 그리고 뫼르소는 그들과 다툼을 벌이게 되고 결국, 뫼르소는 레몽이 건네준 권총을 받아들어 눈부신 태양의 빛을 이기지 못하고 아랍인 한 명을 쏘아 죽이고 만다.

이방인은 총 2부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1부에서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담담한 모습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지니고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모습들을, 그리고 소문이 좋지 않은 레몽을 만나 한 아랍인을 죽이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2부에서는 살인죄로 재판에 서게 된 뫼르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람들은 재판 과정에서 뫼르소가 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보다 어머니의 죽음을 별로 슬퍼하지 않은 점과 그 이후 해수욕장을 가거나 연인 마리와 함께 시간을 보낸 점에 더 주목하며 손가락질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뫼르소는 분명 타인과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작품 내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거짓말을 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있다. 살인이라는 죄를 짓고 서 있지만 재판에서 죄를 뉘우치지 않을지라도 거짓으로 뉘우친 척 하지는 않는다.
작품 내에서 살인자인 뫼르소보다 뫼르소를 손가락질 하는 이들이 위선자 같아 보이는 아이러니함은 여기에 있다. 적어도 뫼르소는 작품 안에서 타인의 평판이나 시선보다는 자신의 셍각과 신념으로 행동하고 있다. 그것이 다수가 생각하는 ‘정상‘ 아닐지라도 말이다.
작품 곳곳에서는 부조리한 모습들을 엿볼 수 있다. 재판에 등장한 뫼르소의 죄는 ‘살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 아랍인의 죽음보다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에 진정으로 슬퍼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뫼르소를 ‘죄인’으로 몰고간다. 또한 아랍인의 죽음과 관련된 재판이지만 재판정 어디에도 아랍인 방청인의 모습은 없다. 아랍인의 죽음은 뫼르소가 재판에 불려온 한가지 이유에 불과한 느낌마저 든다.
다수와 다른 개인을 이방인과 죄인으로 만드는 사회. 우리는 아직도 그러한 사회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개인의 부조리함은 정말 이 사회와는 무관한 것일까?
어쩌면 부조리한 사회가
우리 주변의 이방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반성이 필요한 당신에게 이 영상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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