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아닌 영화관에서 꼭 봐야 될 이유

조회수 2021. 3. 22. 17: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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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자산어보' 묵 빛 산수화 사이 엿보이는 시대와 사람과 작은 파랑새

스크린에 수 놓인 현대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OTT가 영화관을 대체할 수 없는 명약관화한 이유

이준익 감독이 돌아왔다. ‘황산벌’부터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사도’, ‘동주’에 이르기까지 국내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수많은 명작을 선보였던 이준익 감독. 그는 ‘자산어보’를 통해 다시 한번 그의 필모그래피를 빛내는 데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동주’ 이후 두 번째로 흑백 스크린에 담은 사극 ‘자산어보’는 지극히 섬세한 수묵화가 주는 감동과 같이 보는 이의 마음 깊은 곳에 파문을 일게 만들었다.

순조 1년, 신유박해로 조선의 끝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설경구). 호기심 많은 학자인 그는 흑산도에서 바다 생물에 매료돼 책을 쓰기로 하고, 바다를 훤히 아는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에게 도움을 구한다. 하지만 창대는 사학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단칼에 약전의 요청을 거절한다.

그러던 와중 약전은 창대가 혼자 글공부를 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창대에게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한다. 거래라는 말에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창대. 청년 어부와 점잖은 사대부는 신분과 나이의 격차를 넘어 서로의 스승이자 벗이 되어간다.

그렇게 책을 쓰는 데 여념이 없던 어느 날, 창대가 출세를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약전은 크게 실망하고. 창대 역시 약전과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 그의 곁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고자 결심한다.

영화 ‘자산어보’(감독 이준익)는 흑산으로 유배된 후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과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 그리 큰 그대는 하지 않았다. 언제나 눈길을 사로잡는 뛰어난 작품들을 내놓았던 이준익 감독이었지만, 미리 살펴본 흑백 포스터와 예고편이 괜스레 영화가 정적일 것이란 편견을 심었던 탓이다.

허나 직접 관람한 ‘자산어보’는 조금도 정적이지 않았다. 바다를 담은 장면에선 스크린 가득 들어찬 파도의 선 하나하나가 힘차게 맥동했으며, 인물들이 감정을 나누는 모습을 담은 장면에선 절절한 감동이 밀려왔고, 약전과 창대의 눈을 통해 바라본 당대의 뒤틀린 현실은 그 어떤 스릴러보다 더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영화가 이토록 강력한 흡입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에는 단연 흑백으로 이야기를 담아낸 덕이 크다. 색을 덜어내니 이야기의 본질이 더욱 명확히 그려지고, 눈앞을 어지럽히는 현란함이 없으니 인물들이 토해내는 감정선 역시 보다 뚜렷하게 마음에 와닿는다. 영화에는 색채가 드러나는 장면이 딱 세 번 있는데, 해당 장면들에선 까맣던 밤하늘에 폭죽이 쏟아지듯 카타르시스가 터져 나와 절로 고개가 끄덕인다.

이는 큰 스크린으로 영화를 관람했기에 가능한 감동이기도 했다. 창대의 큰 눈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눈물의 이미지가 여전히 뇌리에 생생한데,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그 작은 눈물들은 스크린이 아닌 모니터였다면 미처 발견하지 못했으리라. 눈앞을 가득 채운 이준익 감독의 진경산수화가 스크린과 관객 사이를 단숨에 좁혀 온전히 빠져들도록 했다.

영화의 기술적 형식을 떠나 지난 역사를 조망하는 이준익 감독의 시각 역시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지난 사극 영화에서 정치, 문화적으로 큰 파란을 일으켰던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당대를 설명했다면, ‘자산어보’는 비교적 비주류들의 삶을 그린다.

명망 높은 학자였으나 사학죄인으로 유배된 사대부, 서자라는 이유로 과거조차 보기 힘든 어부, 죽은 이에게까지 세금을 매기는 시대에도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는 민초들. 이준익 감독은 작고 사소하지만, 진실로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모습을 통해 진솔한 삶을 들춰내며 남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물론 베테랑 배우들의 명연기 역이 ‘자산어보’의 빼놓을 수 없는 핵심축이다. 자타공인 최고의 연기파 배우 설경구는 두말할 것 없이 완벽한 연기로 정약전을 재현하였고, 류승룡, 김의성, 조우진 등 우정 출연으로 얼굴을 비친 여러 배우들은 극을 풍성히 채웠다.

특히 창대를 연기한 변요한의 연기는 놀라웠는데, 순박했던 청년 어부가 지니던 순수한 욕망부터 현실에 좌절해 분노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흠잡을 것 없는 탁월함으로 스크린을 압도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지극히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고, 묵 빛이면서도 찬란하다. 색채는 빠졌지만 자연 풍광은 그 어떤 작품에서 만난 것보다 생생하고, 인물 사이 오가는 감정은 어느 하나 허투루 사라지는 것 없이 보는 이의 마음을 간질인다. 단언컨대 이준익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유독 빛난다.

개봉: 3월 31일/관람등급: 12세 이상 관람가/감독: 이준익/출연: 설경구, 변요한, 이정은, 민도희, 차순배, 강기영/제작: ㈜씨네월드/배급: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러닝타임: 126분/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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