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거석이형, 이 형은 또 눈깔이 또 왜 이랴?

조회수 2020. 1. 6. 14:39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시동' 마동석의 부릅뜬 눈알의 의미

‘시동을 걸다’ 그리고 ‘기대를 걸다’

-걸다: (사람이 기계 장치를) 작동하게 하다.

-걸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기대나 희망을) 품거나 가지다.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참조

시동과 기대는 공통적으로 ‘걸다’라는 타동사를 취하는 목적어다. 시동을 건다는 것은 어디에 도착하게 될지 목표를 품고 앞으로 나아감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기대를 거는 행위와 맞닿아 있다. 마동석의 파격 단발머리를 앞세워 코믹으로 중무장된 영화 ‘시동'(감독 최정열)이 우리 삶을 전혀 가볍지 않게 다루는 것은 어쩌면 이런 연유에서다. ‘시동’은 그저 단순히 웃기기만 한 코미디 영화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원작인 조금산 작가의 웹툰 ‘시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택일(박정민)의 탈선이 순화됐지만, 여전히 그의 면면은 사회가 정해놓은 전형적인 ‘문제아’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고등학교 자퇴, 탈색 머리, 집을 나와 중국집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등.


물론 여기에 딱히 그 어떠한 범죄적 요소도 결부돼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이미 그를 ‘불량 청소년’, ‘잠재적 범죄자’, ‘인생 예비 실패자’로 낙인찍기 바쁘다. 부끄러운 현실을 반영한 공감 가는 설정이다. 유일한 피붙이인 엄마 윤정혜(염정아) 조차 택일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자신이 살아온 일련의 삶을 잣대로 스파이크 귀싸대기를 올리며 ‘보통의 틀‘ 안으로 떠밀기 급급하다.

“그냥 날 좀 믿어주면 안 돼?”


택일은 서럽고 억울하다. 든든한 내 편이 돼주길 바라는 한 사람조차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현실이 답답하고 속상하다. 그럴수록 의도와 무관하게 더 엇나간다. 이제 겨우 인생 초입에 서있는 만 18세 택일의 시동이 좀처럼 걸리지 않고 요란하게 공회전만 반복되는 안타까운 모습은, 영화 초반 등장한 고물 중고 오토바이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럴 때마다 원망을 분출할 외부 대상을 찾아내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것으로 본질적 문제를 회피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늘 누군가에게 맞고 또 맞아서 바닥에 고꾸라지기 일쑤다. 몇 번이고 넘어지고 일어나는 일의 반복이다.


장풍반점에서 만난 정체불명 주방장 거석이 형(마동석)은 그러한 택일의 성장에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그는 택일의 깐죽거림을 폭력으로 응징하지만, 전면에 나서 무언가를 섣불리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눈을 부릅뜬 채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지켜본다. 핀잔을 듣거나 무시를 당해도 묵묵히 지켜보기만 할 뿐 그 이상의 무엇을 하지 않는다. 이는 여느 어른들의 태도와 상이하다.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봐주는 행위를 통해 택일이 취한 선택을 존중하고 믿어준다. 그토록 바랐던 단 하나, ‘누군가 나를 믿어주는 것’이 충족되는 순간이다.

인생은 종종 의도와 무관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녹록지 않은 상황을 맞닥뜨려 실패하더라도, 다시 털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으로 체득한 거석이 형은 그것을 묵직하고 일관된 시선에 실어 택일에게 건넨다. 무언의 지지와도 같다. 택일은 자신이 내딛는 모든 걸음에 사력을 다하는 태도로 화답한다. 잘못된 길로 들어선 상필(정해인), 힘겨운 상황에 직면한 경주(최성은)도 어느 순간 연쇄적으로 변한다. 쉬울 리 없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원망하고, 욕설 섞인 푸념으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을 내비치기도 한다.


“똥 눴으면 니가 닦아.”


거석이 형이 강조한 것은 결국 딱 하나다. 각자의 인생이고 각자의 선택이니 그것을 수습하고 책임지는 것 역시 각자가 떠안아야 한다는 간단명료한 사실. 소중한 건 직접 지키라는 뼈 때리는 진실이다.


인생에는 수많은 선택지가 존재하고, 그 결과에 가닿지 않고서 알 수 없는 일 투성이다. 당장의 편의를 위해 편법을 쓰거나 누군가의 손을 빌리는 일은 쉽지만, 그렇게 해서는 삶이 제대로 성장하거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분 단위로 터지는 웃음의 조각이 걷혀진 순간 이러한 핵심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강요는 어디에도 없다.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차용된 ‘사채업자’ ‘철거’ ‘미성년 성매매’ ‘조직폭력배’ 등의 클리셰는 몹시 아쉽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삶과 선택에 어떤 식으로든 기대를 걸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바닥에 고꾸라진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고 일어나고자 부단히 애를 쓴다. 되든 안 되든 각자의 인생에 올라타서 몇 번이고 시동을 거는 것으로 이를 대변한다. 그렇게 도달한 장소가 기대해 마지않던 목적지와 일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재차 발을 굴려 시동을 건다. 어디로든 가닿기 위해서.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