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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심 테스트? 반복되는 북한의 도발 7

조회수 2017. 5. 25. 10: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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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XIM 글 김민석/정리 정도윤
1953년 이후 반백 년이 지나는 세월 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전쟁의 위협,
그 일촉즉발의 순간들을 정리해본다.
출처: MAXIM KOREA
김신조 일당 침투 사건(1968. 1. 21)
박정희 암살 및 주요 기관 테러를 목적으로 북한군 31명이 침투했던 사건. 이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적군이 대통령이 머무는 관저 코앞까지 쉽게 진입했다는 점 때문. 말 그대로 보안이 개판이었다는 얘기다.
출처: MAXIM KOREA
앞마당(?)까지 적군이 쳐들어온 것에 빡친 박 대통령은 검문검색의 강화를 위해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만들고, 육군3사관학교를 창설했다. 오늘날 남성들을 괴롭게 만드는 예비군 제도 역시 이 사건 때문에 생겨났다.
출처: MAXIM KOREA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1976. 8. 18)
JSA 내에서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UN 장교 두 명을 북한군이 도끼로 찍어 죽인 사건이다. 제대로 빡친 미국은 북한을 지도에서 지워버리려는 계획을 세운다. 데프콘 3가 발령되었고, 미 본토에서 핵 폭격기가 날아왔다.
출처: MAXIM KOREA
2차 대전 이후로 오랜만에 '진짜 열 받은' 미국의 모습을 본 세계는 숨을 죽였다. 소련과 중국도 북한을 도와줄 엄두를 못 냈을 정도.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했던 북한은 이후 미국에게 직접적인 무력 도발을 하지 못했다.
출처: MAXIM KOREA
아웅 산 묘소 테러 사건(1983. 10. 9)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북한이 자행한 폭탄 테러 사건. 이 공격으로 인해 남한 측 인원의 다수가 사망했다. 애초 목표였던 전두환 대통령은 스케줄 지연으로 현장에 없었기에 살 수 있었다.
출처: MAXIM KOREA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1996. 9. 18)
동해안에서 정찰 활동을 벌이던 북한군 잠수함이 좌초되면서 해상 복귀가 불가능해지자 육지로 상륙해 벌어졌던 사건. 육해공 3군을 비롯하여 예비군과 경찰까지 풀가동되어 공비 소탕 작전을 벌였다.
출처: MAXIM KOREA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우리 군의 무능한 작전 수행 능력이 드러났던 사건. 해당 지역 군 지휘관들의 목이 모조리 날아간 것은 당연한 결과다. 북한이 이례적으로 공식 유감 표명을 한 보기 드문 사례기도 하다.
출처: MAXIM KOREA
제2연평해전(2002. 6. 29)
NLL을 침범한 북한 측 경비정과 우리 해군 고속정이 교전을 벌였던 사건. 이 전투로 '참수리 357호'가 침몰되었고, 6명의 해군이 전사했다. 월드컵이 치러지고 있던 시기여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출처: MAXIM KOREA
천안함 침몰 사건(2010. 3. 26)
초계함 '천안함'이 북한 해군의 어뢰 공격에 의한 폭발(로 추정되는)로 침몰한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해 46명의 해군 장병이 사망했다. 네티즌 사이에선 사건의 원인을 두고 수많은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출처: MAXIM KOREA
연평도 포격 사건(2010. 11. 23)
전쟁 이후 최초로 북한군이 민간인 거주 지역을 공격한 중대한 무력 도발 행위다. 전 국민이 TV와 인터넷을 통해 불타는 연평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했으며, 그로 인해 받은 충격과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출처: MAXIM KOREA
당시 미 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게이츠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사건에 대한 우리 측의 보복 작전이 준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계획이 너무나 공격적이어서 오바마 미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을 말렸다고 한다.
우리의 영토와 영해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육 해군 장병들의 투혼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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