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찌질한 복수 열전

조회수 2017. 5. 2. 1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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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XIM 글 민경란, 정리 박소현
미운 대상은 뭔 짓을 해서든 엿 먹이고 싶은 법이다.
뒤통수 가격 당하기 싫으면 조심하자.
오늘은 역사 속 찌질한 복수 열전을 모아봤다.
출처: MAXIM KOREA
# 시월드 미워요 - 조세핀 황후
나폴레옹의 첫 번째 부인인 조제핀 드 보아르네는 나폴레옹과 만났을 당시 파리 사교계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조제핀에게 푹 빠진 나폴레옹은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애정공세를 했다. 조세핀에게 나폴레옹은 썩 내키지 않는 상대였지만, 장래가 유망하다는 사실 하나로 결혼을 강행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쿠테타를 통해 황제가 되었고 로또 맞은 조제핀은 황후라는 높은 지위를 등에 업고 사치와 유흥을 즐겼다.
출처: MAXIM KOREA
황제인 나폴레옹조차 평생 쩔쩔 맬 정도로 제멋대로였던 그녀에게 유일하게 대든 사람은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폴린 보나파르트 뿐이었다.

사실 조제핀이 황후에 올랐을 때, 폴린은 조제핀보다 한 수 위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잘나가는 사교계의 신성이었다. 사교계 투톱이 앙숙이 된 이유는 정반대인 성격과 취향 탓이었다.
기품과 교양으로 승부하던 조제핀과 달리 폴린은 화려하고 섹시한 매력을 뽐내는 여성이었다.

말하자면 파리의 '수지 vs. 현아' 격이었달까?
조제핀에게 폴린은 천박한 시누이, 폴린에게 조제핀은 가식쟁이 새언니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서로를 죽도록 미워하던 두 사람은 나폴레옹이 조제핀과 이혼하고 난 뒤 급격하게 친해졌다.
두 사람에게 나폴레옹의 두번 째 부인인 마리 루이즈라는 공통의 적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제핀이 이혼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면서 두 여자의 동맹은 금세 깨지고 말았다.
출처: MAXIM KOREA
# 널 포토샵으로 지워주마 - 스탈린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인 스탈린.
그에게는 '인간백정'이라는 별명이 따른다. 이는 그가 반대파를 모두 몰살하는 '대숙청'으로 약 2,000만 명의 정치인 및 민간인을 학살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출처: MAXIM KOREA
이 계획의 선두에 서서 학살을 주도한 것이 스탈린의 친구이자 충복인 니콜라이 예조프였다. 그는 스탈린의 반대파로 의심되는 사람은 모두 역모죄로 몰아 숙청했다.
출처: MAXIM KOREA
예조프의 입지가 날로 커지자 불안해진 스탈린은 그를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1940년, 비밀 재판을 통해 유죄를 선고받은 예조프는 결국 쥐도새도 모르게 처형당한다.

그를 죽인 것에도 모자랐는지, 스탈린은 조금 더 치사한 방법을 동원한다. 자신과 예조프가 함께 찍은 사진들을 죄 모아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예조프의 모습을 깨끗이 지워버린 것!
출처: MAXIM KOREA
내가 포토샵으로 예조프를 지운 것이 아니다. 실제로 스탈린이 저렇게 만든 거다. 위의 사진에는 있던 예조프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포토샵은커녕 그림판도 없던 시대에 사진작가들이 죽음의 문턱 앞에서 예조프를 지워내려 애를 썼을 모습이 눈에 훤할 지경이다. 지우개 복수라니...
출처: MAXIM KOREA
# 너는 나의 개다 - 프리드리히 대왕
프로이센(현 독일) 영토를 널리 확장해 강대국으로 만든 프리드리히 2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이라 불리는 위대한 지도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이런 그에게도 해결하지 못한 골칫거리가 있었다. 당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여성 지도자 3명은 그에게 라이벌이자 눈엣가시였다.
출처: MAXIM KOREA
1740년, 신성로마제국에서 황녀 마리아 테레지아의 국가 계승 문제를 두고 전쟁이 일어났다.

사실상 말이 반대지, 땅 내놓으면 허락하겠다는 게 그들의 시커먼 속내였다. 강대국 중 하나였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은 슐레지엔 지역을 넘겨받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윤허한다.
앉은 자리에서 영토를 빼앗긴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이를 갈며 살벌한 복수전을 계획하고 7년전쟁을 발발시킨다.
일명 '삼부인 동맹'이라 불린 이 세 여걸의 연합은 유럽, 북아메리카, 남아시아에 피바람을 일으켰다.
출처: pixabay
전쟁 후반, 영국군이 이런 저런 변명을 하며 프로이센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이에 오스트리아 연합군의 다구리가 빛을 발했다. 벼랑 끝에 몰린 프리드리히 대왕은 언제든 자결할 수 있도록 독약을 소지하고 다닐 정도였다.
출처: MAXIM KOREA
그러나 운 좋게도(?)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급사하고, 프리드리히 대왕 빠돌이었던 독일 출신 표트르 3세가 러시아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쟁 전 영토를 돌려받는 유리한 조건으로 종전 협상에 성공한다. 수도 베를린까지 함락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대단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출처: pixabay
사실상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세 여자에 대한 프리드리히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는 암캐 세 마리를 입양해 세 여성 지도자의 이름을 각각 붙였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튕기면 퐁파두르(라는 이름의 개)가, 휘파람을 불면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이름의 개)가 달려오도록 만들었다. 엘리자베타 여제의 이름을 딴 개는 가끔 말을 안 들으면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다고. 찌질의 극치다.
출처: MAXIM KOREA
# 소심해도 깔 건 다 깐다 - 쇼펜하우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특유의 냉소적인 철학관으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다. 그에게는 일생의 라이벌인 철학자 헤겔이 있었다. 헤겔과는 반대로 쇼펜하우어는 '무욕과 고통'을 주장했다. 문제는 쇼펜하우어가 무욕을 주장하는 것 치고는 강한 자뻑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에 매우 집착하였는데, 누굴 만나면 "오늘은 나를 만났으니 당신에게 몹시 영광스러운 날이오! 허허!"하고 인사할 만큼 자기애가 강했다.

그의 이름을 따 자신의 평판에 집착하는 증세를 뜻하는 '쇼펜하우어 증후군'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
출처: MAXIM KOREA
그러나 독일 철학계에서 그의 입지는 좁고 위태로웠다. 그가 가난에 쪼들리고 있을 때, 헤겔은 베를린 대학에서 가장 잘 나가는 철학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헤겔에게 베를린 대학 교수 자리를 부탁하고 헤겔은 흔쾌히 그를 돕는다. 그러나 헤겔의 도움을 받은 것이 자존심 상했는지, 쇼펜하우어는 헤겔과 같은 시간에 강의를 열며 전면전을 선포한다. 물론 결과는 처참할 수준이었다. 쇼펜하우어의 수업에는 강의를 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적은 인원만이 앉아 있었다.
출처: pixabay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쇼펜하우어는 교직을 관뒀다. 그는 교수 자리에 있을 당시 썼던 그의 철학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헤겔을 포함한 다른 교수들을 저격하기도 했다.

"급료가 높은 강단에서 내뱉는 철학은 경험이 없이 이성으로만 사고하는 철학이다. 교수들은허구에서부터 교묘하게 꾸며낸 이성을 주장하며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딱 이거다.
"알지도 못하는 자식들이 구라까면서 나대지 마!"
출처: pixabay
재밌는 점은 그의 간절한 자뻑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거다. 독일 시민혁명이 실패하고 헤겔이 사망하면서, 독일 사람들은 그동안 헤겔을 비롯한 많은 철학가들이 주장했던 계몽적 철학관에 대한 맹신을 접게 되었다. 관심은 곧 쇼펜하우어의 인생에 대한 고찰로 향했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시골집으로 도착한 팬레터 더미에 파묻힐 정도의 인기를 누리며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역사 속 대단해 보이는 위인들도 이런 찌질한 복수 전투를 벌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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