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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골목, 철의 시간, 을지로에 퇴적된 철의 역사 〈루트 메탈리카〉

조회수 2021. 1. 28. 17:5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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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예술센터가 위치한 산림동의 철공소 골목은 늘 부산스럽다. 금속을 깎고, 자르고, 연마하는 예리한 절삭음이 거리에 넘쳐난다.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이곳에선 금속과 금속이 맞닿으며 발생하는 소음이 거리의 활기를 대신하고 있다.

을지로라는 작은 용광로가 근대 제조업을 지탱하기 위해 들인 묵묵한 노력은 철의 시간이 되어 을지로 거리에 켜켜이 쌓여 있다.〈루트 메탈리카〉는 퇴적된 철의 이야기가 담긴 을지로의 장소성을 바탕으로 출발하였다. 근대 제조업의 산실이자, 예술가들의 밀집소. 을지로 일대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발전한 산업은 현대 예술과 어떤 구조적 결합을 띄고 있는가.
철의 경로를 따라 살펴보는
을지로의 과거와 현재

〈루트 메탈리카〉


끊임없이 돌아가는 「GoodBye」

정성윤 〈Goodbye〉 세 개의 바퀴, 기어, 알루미늄, 120x120x220, 2012 외


어둑한 건물, 철제 계단을 올라 3층에 위치한 을지예술센터에 도달하면 실외로 연결된 밝은 전시장이 펼쳐진다.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정성윤 작가의 〈Goodbye〉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레버를 돌리면 상단의 「GoodBye」가 끊임없이 돌아가도록 설계된 이 장치를 통해 제작자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려 했을까. 답을 알 수 없는 의문 속에, 인간관계의 허무와 무상만 공허하게 메아리쳐 돌리던 레버가 지겨워질 즈음, 다음 작품을 향했다.

손쉽게 돌아가는 레버의 무게만큼이나 가벼운 헤어짐이었을까, 하찮은 이별로 기억되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었을까.

정성윤 〈Friday Chair〉


〈Friday Chair〉는 을지로 골목의 기술자에게서 얻은 여성용 자전거 안장을 이용해 만든 의자로, 매력적이지만 편안히 머물 수는 없는 존재에 대한 뜨거운 냉정을 담고 있다.


 앉기조차 힘들게끔 불친절하게 설계된 이 안장은, 휴식은 커녕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을 자아내고, 가늘지만 완고한 태도로 이곳을 빨리 떠날 것을 재차 독촉한다.


잠들어 있는 을지로 골목

김준 〈다른 시간, 다른 균형〉 11채널 사운드 설치, 앰프, 스피커, 사진, 이미지 북, 2020


암막을 제치면 나타나는 김준 작가의 〈다른 시간, 다른 균형〉은, 어둠에 잠긴 을지로 골목 어딘가를 그대로 모방해 온 듯하다. 서서히 밝아오는 거리와 지저귀는 새소리로 동이 틀 무렵이라는 걸 유추할 따름이다.


  철제 컨테이너로 구성된 전시장이, 생기를 되찾기 직전인 이곳의 을지로스러움을 더욱 배가시켜 준다. 가만히 서서 을지로의 새벽녘을 체험하고 있으면 무언가 경을 외는 듯한 소리도 들린다. 매일 아침 을지로에선 종교의식이라도 행해지는 걸까. 아직 잠들어 있는 설치 공간을 뒤로하고, 다음 전시장으로 발을 옮기자 이번엔 밝은 장소가 나타났다.

이따금 들리는 인기척은 또 다른 오늘을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일터로 향하는 노동자의 애환인가, 한바탕 젊음을 탕진하고 새벽이 돼서야 아쉬운 걸음을 옮기는 젊은 날의 과욕인가.

불균형 속 균형에서 느끼는 평온

전장연 〈숨을 고르고, 정지 (Pause)〉 철근, 스프링, 운동기구 액세서리, 쇠사슬, 석고, 가변크기, 2020


다양한 오브제가 얽혀서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전장연 작가의 〈숨을 고르고, 정지 (Pause)〉는 금속의 복원성에 주목하여 설치된 작품이다. 요가매트, 탄력밴드, 보호대, 공 등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물을 빌려 금방이라도 풀려날 듯 한 동세를 표현했고, 용수철이나 사슬같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물성을 지닌 금속을 덧댐으로 분산을 억제하고 운동에너지를 포용하여 불균형 속 균형을 추구한다.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갈 듯하면서도 자신만의 평온을 유지한 이 작품들은, 센터 건물의 진동에 따라 균형점이 미묘하게 변화하며 이 공간에 생기를 더해준다.


녹으로 찍어낸 발자국

변상환 <Live Rust> 가변설치, 방청 페인트, 종이, 형강 활자 인쇄, 2020


다음 전시장을 향하다 보면 또 다른 작품이 근처에 있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어 얼핏 〈숨을 고르고, 정지 (Pause)〉의 일부로 착각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변상환 작가의 〈Live Rust〉다. 나무를 사용하여 건설 현장에서나 볼법한 철골을 구현한 이 작품의 뒷면엔, 실제 H빔을 붓처럼 사용하여 나타낸 다양한 형태의 형강*이 그려져 있다. 살아있는 녹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자국을 겹겹이 찍어 표현한 이 작품은 마치 생명체가 지나간 발자국 같아 보이기도 한다.


*형강:여러 가지 횡단면을 한 봉 모양 강철 재료의 총칭.  



을지로의 지난 10여 년간 변천사

최황 〈사건 지평선 Event horizon〉 싱글채널 비디오, 9분 25초, 2019


이어지는 다음 공간엔 최황 작가의 〈사건 지평선 Event horizon〉이 재생되고 있다. 포털 사이트 로드뷰를 통해 을지로의 지난 10여 년간 변천사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철저하게 외부자적 입장에서 을지로를 조망하고 있다. 을지로의 모습을 간직한 낡은 가택을 허물고, 첨단 건축물이 빈 공터를 채우기까지. 도심 외각을 순항하며 그저 담담하게 내레이션을 읊조릴 뿐이다.


 을지로를 터전으로 삼아온, 누구보다 내부적인 작가가 이런 역설적 태도를 취함으로 관객의 마음은 혼란에 빠진다. 누구나 접근 가능한 객관적 기록을 정련한 최 작가의 날카로운 해석은, 청자에게 을지로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명확한 화두를 투사한다.

2020년 현재 이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시 중구 산림동 82-12 번지의 토지 공시지가는 1㎡당 10,800,000 원이다.

금속의 물성이 가득한 오브제

이학민 〈호기심의 집 House of Curiosities〉 가구 및 오브제, 가변 설치, 2020


오직 상승 곡선만을 취하는 부동의 가치에 대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막연함으로 답답해진 가슴을 안고 걸음을 옮기다 보면 이내 새로운 공간에 도착한다. 어두운 공간 속, 싸늘한 온도와 차가운 질감의 가구들로 나는 냉정을 되찾았다. 이번 전시품 중 금속의 물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두드러지는 이 작품은, 이학민 작가의 〈호기심의 집 House of Curiosities〉이다. 얼핏 친숙하면서도 기괴한 형상을 지닌 조형은 우리가 익히 접해온 가구와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것들에 손발이 달린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낯선 것에서 익숙함을, 익숙한 것의 생소한 모습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새로운 가치의 창출, 변화된 가치의 재해석은 아니었을까. 나를 좀먹던 고민들로 인해 다분히 편향된 해석만이 머리를 맴돌았다. 미래엔 토지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리라, 사는 것에 서 사는 곳으로 바뀌리라는 허황된 희망을 가지며 전시장을 나오는 와중에 구석에 놓은 아담한 조형이 눈에 띄었다.


한줌 흙 위에 피어난 공존

김동해 〈공생(共生) symbiosis〉 혼합재료, 모빌과 조명, 오브제 설치, 2020


금속의 크고 묵직한 동세가 두드러지는 작품들 가운데 여리게 흐드러진 이 작품은 김동해 작가의 〈공생(共生) symbiosis〉이다. 식물의 모방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심 속 공존을 꾀하는 식물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무성하게 자라 버린 콘크리트 빌딩 숲,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도심의 구석 지대. 가까스로 인간의 침략을 피한 한 줌 흙 위에서도 식물은 그 생을 영위한다.


 그의 작품은 식물의 생태를 모방하듯 전시회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작가는 도심 속 동거인을 그곳에 재현할 뿐 화두를 던지지 않는다. 도심의 한복판에서 녹음을 띈 작은 잎새를 발견하듯 모방된 공생체를 수집하는 것도 전시를 즐기는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Iron Times, Ironic Places.
을지로에서 쌓인 철의 경로, 루트 메탈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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