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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르기니 쿤타치 - 떠돌던 전설과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조회수 2021. 5. 18. 16:2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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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의 어려움 속에서 빛난 강한 생명력

지금부터 50년 전, 제네바 모터쇼에 강렬한 노란색의 자동차가 등장했다. 색뿐만 아니라 람보르기니 쇼룸이 아닌 카로체리아 베르토네 전시장에서 공개된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이슈거리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대담한 캡 포워드 설계의 세련되고 깔끔한 라인의 보디 또한 언론과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출처: Lamborghini
람보르기니 쿤타치 LP 500

미드십 V12 엔진에서 터져 나올 듯한 야수의 포효를 닮은 배기음은 노란색이 가진 순수와 욕망이라는 양면성을 표현하는 듯했다. 대중은 그런 강렬함에 매료되어 버렸다. 선사시대에 흙으로부터 추출되어 쓰기 시작한 노랑의 역사가 이 모델로 인해 생명력 넘치는 현재의 전설로 재탄생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대중의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며 1971년에 람보르기니의 새 프로토타입 쿤타치 LP 500이 등장했다.

쿤타치 LP 500의 역할은 방향성 제시

모터쇼 당시 람보르기니 부스에는 최첨단 기술로 완성된 미우라 SV가 전시되고 있었다. 람보르기니가 수익을 내는 모델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프로토타입 쿤타치(이하 LP 500)는 미래의 기대주였을 뿐이었다. 람보르기니의 창업자 페루치오의 LP 500에 대한 관심은 특별했다. 기획 단계에서 프로젝트명을 직접 지을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쿤타치의 시판형 모델이 개발되던 기간에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그로 인해 제1차 석유파동이 발생해 슈퍼카 브랜드는 경영이 악화하였다. 

출처: Lamborghini
람보르기니 쿤타치 LP 500

람보르기니는 쿤타치의 생산 자체가 도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배짱 가득한 페루치오는 LP 500의 양산형 모델 LP 400의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미래지향적이며 혁신적인 람보르기니의 스타일과 기술을 쿤타치로 이어나가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위기감이 감돌던 람보르기니의 헤리티지를 써 내려 갈 막중한 의미를 LP 500은 내포하고 있었다.  

이 70년대 모델은 지금도 미래적이고 인상적이며 아름다운 바디 라인을 뽐내고 있다. 카로체리아 베르토네의 디렉터 마르첼로 간디니의 시대를 앞선 스타일링 덕분이었다. 또한 이후 람보르기니의 상징이 된 시저 도어를 채용한 것도 간디니의 '신의 한 수'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 프로토타입은 1974년부터 시판용으로 생산된 쿤타치 LP 400과 크게 다른 모델이었다. 

출처: Lamborghini
람보르기니 쿤타치 LP 500

뼈대는 파이프가 아닌 스페이스 프레임을 사용했고 440마력 4,971cc 12기통 엔진 그리고 상어 아가미 같은 에어 인테이크 등이 달랐다. 또한, 쿤타치 LP 400에 적용된 루프의 독특한 잠망경(Periscopio)도 적용되지 않았다. 

오일쇼크 등으로 어두웠던 시대에, 람보르기니 팬들에게 쿤타치 LP 500은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에 그려진 '노란 화살표'였을 것이다. 그들은 기하학적 아키텍처와 강력한 엔진의 LP 500이 끝없이 회자할 슈퍼카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을 방증하듯 쿤타치는 프로토타입부터 월터 울프 모델까지 약 15년간 내외적인 성장과 진화를 거치며 전설이 되었다. 쿤타치라는 예사롭지 않은 차명까지 말이다. 

차명의 독특한 의미와 유래

출처: flickr
황소 별자리에서 비롯된 람보르기니 로고

전작 우라코나 하라마 등 람보르기니의 작명법은 창업자의 별자리에서 비롯된 황소와 관련되어 지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공식이었다. 쿤타치라는 이름은 그 공식에서 벗어났다. 시저 도어처럼 기존 방식을 탈피해 독특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호사가들 사이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만한 행보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쿤타치라는 모델명의 탄생 이야기는 다양하게 존재했다. 그중에 여러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설이 하나 있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쓰는 감탄사에 파생되어 '쿤타치'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통설을 전해 들은 피에몬테 지역 사람들은 생경한 이야기라며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쿤타치라는 차명의 탄생은 세상에 알려진 것과 좀 다른 구석이 있었다. 

2018년 8월에 나온 자동차 전문지 ‘로드 앤 트랙’의 마르첼로 간디니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이렇다. 


“테스트 드라이버였던 밥 월리스 그리고 저와 함께 일하던 키가 유달리 크고 피에몬테 방언을 즐겨 쓰던 한 프로파일러가 있었어요. 그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표현할 때마다 쓰던 '염병', '전염병'이라는 말을 하는 버릇이 있었어요. 그의 말투가 재미있었는지 동료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됐죠. 어느 날 모터쇼에 나갈 프로젝트 카의 차명을 고심하던 책임자가 직원들에게 어떤 이름이 좋겠냐며 의견을 물었어요. 마침 한 직원이 '쿤타치로 하면 어떻겠냐'고 제의하더군요. 그래서 쿤타치로 결정되었어요. 그게 다예요. 단순하지만요.”

출처: wikimedia commons
람보르기니 쿤타치 5000S의 레터링

외부에 이 유래가 미화되어 '쿨', '와우' 등으로 변화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다. 당시 람보르기니의 운영난은 심각해지고 있었고 개발실 직원들과 공장의 분위기는 어수선했을 것이다. 그러니 직원들은 불안한 현실 속에 '염병'이란 단어를 쓰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을 듯하다. 쿤타치 시판 모델이 나오는 해에 창업주인 페루치오가 회사를 떠날 정도였으니 운영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초부터 람보르기니도 다른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오일쇼크라는 커다란 파도를 피할 수 없었다. 소비자들은 대배기량 차보다 연비가 좋은 소형차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슈퍼카 브랜드 람보르기니의 판매량은 급속도로 하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설상가상 노조의 파업까지 터져 재정난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람보르기니는 BMW의 의뢰를 받아 M1 프로토타입 섀시를 제작하기로 했다. 하지만 인력난과 재정난으로 주문 물량을 전부 소화를 못 하고 7대만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쌓여만 가는 적자로 경영난은 심각해지고 제작 의뢰도 못 받을 상황까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람보르기니는 첫 번째 매각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쿤타치 처음으로 리어 윙을 단 LP 400S

1974년 스위스의 부유한 실업가 조르주-앙리 로세티와 르네 라이머는 람보르기니 지분을 각각 51%, 49%씩 매수해 운영했다. 이는 람보르기니 창업자의 좌절이 시작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는지, 이후 페루치오는 볼로냐를 떠나 움브리아주에서 포도농장을 운영하며 다시는 자동차 시장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시판용 쿤타치(LP 400)가 세상에 등장했다. 1978년에는 리어윙을 단 쿤타치 LP 400S가 발매되었지만, 람보르기니는 또다시 파산했다. 1980년부터 사업가 밈란 형제가 두 번째 주군이 됐다. 

그들은 쿤타치 LP 500S 개발과 미국에 판매에 물꼬를 튼 LP 5000QV 모델을 내놓으며 성실히 사업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람보르기니는 1987년 크라이슬러에 매각되며 세 번째 모회사를 받아들였다. 이후 람보르기니는 1998년 아우디 품에 들어가기 전까지 인도네시아 독재자의 손에 들어가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우리에게 쿤타치가 주는 메시지

이런 발자취를 ‘람보르기니를 인수한 기업은 꼭 망한다’는 패망사로 보는 이도 있다. 그건 어려운 이야기를 너무 쉽게 표현한 거로 생각한다. 람보르기니가 파란만장한 시절에도 쿤타치라는 전설을 잘 키워낸 것은 사실이다. 람보르기니와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한 쿤타치의 성장 과정을 뒤돌아보며, 우리나라 최초로 오스카상을 받은 윤여정 배우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느꼈다. 쿤타치와 윤여정 배우는 은막에 데뷔한 해가 1971년으로 같다. 또한 세상에 등장하자마자 대중뿐만 아니라 언론 매체에게도 주목을 받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출처: wallpaperup
람보르기니 쿤타치 LP 500 프로토타입

윤여정 배우는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배고파서 연기했는데 남들은 극찬하더라. 그래서 예술은 잔인하다. 배우는 돈이 필요할 때 연기를 가장 잘한다." 


람보르기니도 어려운 시기에 운영 및 개발 비용이 필요해 여러 주인을 거쳤다. 그때 가장 빛나던 람보르기니의 작품이 바로 쿤타치였다. 힘든 시기였지만 역사 뒤에 숨지 않고 단종되기 전까지 끝없는 진보의 발자취를 보여줬다. 


코로나 19와 생활고 등으로 고통받는 우리에게 쿤타치라는 유산은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 같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남아 한다’라는 강한 생명력의 메시지를 말이다. 

글 윤영준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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