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땅을 밟지 못한 우리의 조랑말, 현대 포니

조회수 2021. 3. 24. 11: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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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장의 벽은 넘지 못했지만 큰 의미가 있는 차

최근 현대자동차(이하 현대차)가 새로운 전기자동차(EV) 아이오닉 5를 세상에 내놓았다. 기존 모델의 설계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EV 전용 플랫폼으로 생산한 첫 번째 모델이다. 자사가 가진 기술을 세계에 알려 EV 시장에 당당해 진격해 나갈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차는 지난 201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선보인 EV 콘셉트 45가 가진 느낌을 충실히 이어받은 모델이다. 그러나 이 콘셉트카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모델 포니의 헤리티지와 미래 지향성의 디자인을 모티브로 제작된 것이었다. 포니가 탄생했을 무렵보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기술과 모던하고 심플한 라인을 가지고서 말이다.

출처: 현대자동차
포니의 영감을 받은 EV 콘셉트 45

화석연료가 아닌 전기 에너지로 주행하는 신형 EV 아이오닉 5는 전 세계 EV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현대차가 가진 불굴의 의지에서 발현되는 도전 의식은 포니의 시대와 매일반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200여 나라에 약 5천만 대의 현대차가 달리고 있는 것은 포니의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도시 재건으로 모든 것이 바쁘게 움직였던 서울의 1970년대 모습

1970년대의 사정은 달랐다. 당시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산업 기반시설을 한창 재건 중이었다. 게다가 1인당 국민소득이 600달러 수준밖에 안 되는 후진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출용 자동차를 독자 개발하겠다는 현대차의 발언을 쉽게 믿을 수 없는 시대였다. 

굶지 않는 하루가 소중했던 시절에 포니는 1974년 10월 토리노 모터쇼의 무대에 올랐다.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 모델일 뿐 아니라 일본에 이은 아시어 두 번째 고유 모델이라는 수식어에 전 세계 언론들과 자동차 애호가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1975년 12월 연 120여만 대의 생산 규모를 갖춘 울산공장이 불을 밝힌 데 이어, 포니는 1976년부터 본격 생산에 들어갔다. 포니의 역사가 조랑말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포니는 시판 첫해에 10,726대가 팔려 단숨에 국내 시장 점유율 43% 정도를 차지하며 판매 1위에 올랐다. 

출처: 현대자동차
1974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데뷔한 현대 포니

이렇게 빠르게 성공 가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안 되면 되게 해야지, 해봤어?"라는 말로 유명한 정주영 회장의 뚝심과 ‘수출만이 살길’이라며 전 세계 시장에 노크를 한 '포니 정' 정세영 회장 그리고 그들을 믿고 따르던 현대차 임직원의 열정과 의지 덕분이었다.

출처: 포니정 재단
포니의 아버지 정세영 회장과 포니를 디자인한 조르제토 주지아로

당시 타사 차량 대비 뛰어난 성능과 디자인을 자랑했던 포니는 국내 시장에서 약 60%의 점유율의 차지했다. 이로써 우수한 성능 등을 검증한 포니는 전 세계 방방곡곡에 명성을 알릴 준비를 했다. 마침내 1976년 6월 에콰도르 과야킬 항구 하역장에 5대의 포니가 내리는 자랑스러운 풍경이 만들어졌다.

출처: 현대자동차
1976년 6월 첫 수출된 현대 포니가 에콰도르 과야킬 항구에 내리고 있다

이것은 현대차 수출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포니는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중동, 남미, 아프리카, 유럽 등지에 1,042대가 수출되어 약 257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미국 포드와 연이 있던 현대차가 생산한 포니는 미국 시장에는 진입하지 못했다. 이번 칼럼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과 이유를 알아보려고 한다.

포니의 아버지 정세영 회장이 이 차를 기획하기 시작한 1970년대 전후, 미국 시장에서는 인기를 얻고 있었던 수입차들이 있었다. 현대차의 포니 기획팀들은 그 차들이 북미 시장에서 어떠한 장점으로 판매실적을 높이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자사의 새 모델에 접목하려 노력했다. 어느 시대라도 자동차 파워트레인과 디자인 등은 중요하지만, 당시 주요 고객층은 1970년대에 두 번의 오일쇼크를 경험했던 베이비붐 세대였다. 조금 더 벌고 조금 더 가족들과 여가를 보내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버지 세대가 선호하던 쉐보레 임팔라보다 몸집이 작고 연비가 좋은 올즈모빌 커틀라스(Oldsmobile Cutlass)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담이지만 커틀라스의 인기는 현재까지 이어져 약 50만 대의 동일 모델이 북미의 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기록도 존재할 정도다. 포니 기획팀들은 고출력의 대형 머슬카보다 연비가 좋고 경제적인 소형차로 소비 패턴이 바뀌고 있었던 시대라는 것에 주목했다. 

출처: Flickr
1970 올즈모빌 커틀라스

이런 미국 시장의 분위기를 파악한 포니 정과 현대차 관계자들은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몰이 중이던 포니에 자신감이 있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한 글로벌한 외형조차 자랑할 만했다. 그들은 포니의 질주를 미국 시장에서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포니가 탄생하기 전부터 미국은 소위 '빅 스리(3)'라고 불리던 GM, 포드, 크라이슬러가 시장점유율 85%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시장을 폭스바겐 비틀, 르노 도핀, 토요타 코롤라 등을 앞세운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이 경쟁을 하고 있었다. 이런 타국 모델들은 미 대륙의 험난한 도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망가지거나 버려지는 일들이 빈번했다. 그런 이유로 미국 소비자들은 자동차 판매장 윈도에 서있던 외국 자동차를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의 프리미엄 세단이나 스포츠카는 예외였다.

출처: politicususa
'빅 스리' - GM, 크라이슬러, 포드의 로고

이렇게 해외 브랜드의 차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미국 시장의 분위기 속에서 포니가 그 시장에 진입한다는 것은 래퍼가 트로트 대전에서 우승을 기대하는 정도로 어려웠다. 그런데도 현대차는 미국 시장 진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여러 걸림돌이 있었지만 크게 두 가지가 장벽이 되었다. 하나는 1970년대에 일본이 소형차 시장을 잠식하자 자국 제조업에 위협적이라 판단한 미국 정부의 행동이었다. 자국의 산업을 보호를 목적으로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공모해 '자발적 수출 규제(Voluntary Export Restraint)'를 만들어 일본 차의 수입량을 제한했다. 그로 인해 포니의 수출길이 더욱더 좁아졌다.

또 다른 장벽은 포니의 모델명에 대해 미국 정부가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미국은 1970년대 기준으로 포드의 소형차인 핀토(Pinto)를 필두로 쉐보레 카마로(Chevrolet Camaro), 폰티액 트랜스 앰(Pontiac Trans Am) 등을 가리키는 '포니카' 클래스란 단어가 존재했다. 머슬카보다 작고 날렵하며 연비까지 좋은 스포츠카를 포니카라 불렀다. 이에 미국 진출을 꿈꾸던 우리의 조랑말과 머스탱의 별칭이 똑같은 것도 문제였다.

출처: Hippopx
포드 머스탱의 상징적인 로고 '머스탱 호스'

이런 이유로 국민 공모로 지어진 자동차 이름인 포니를 미국 내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미국 정부가 특허 보호 강화 조처를 할 수 밖에 없는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미국 정부의 허울 좋은 핑계라고 보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포니의 미국 진출을 직접적으로 가로막은 것은 과거 동료였던 포드와 현대차의 좋지 않은 관계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포드는 알려진 바와 같이 현대차와 시작과 함께 손을 잡았던 자동차 메이커였다. 1967년 현대차가 설립 후 포드 영국 법인과 기술제휴를 하지 않았다면 현대의 첫차인 코티나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갈 줄 알았던 두 회사의 사이는 1970년에 코티나의 품질 문제로 인해 좋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 정부의 자동차 수요 억제 정책으로 인해 1971년 9월 코티나를 단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현대차 내부에서는 독자 모델 개발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포드는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다가 1972년 현대차와 포드의 사업 관계는 끊어져 버렸다. 당시 미국 정부도 현대차의 독자적인 자동차 개발, 생산 자체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역사적 에피소드가 있다.

출처: 포니정 재단
1978년 11월에 생산된 10만 1번 째 포니

1977년 5월 주한 미국 대사 리처드 스나이더가 정주영 회장을 만나 독자 모델 개발을 중지하라고 권유했다. 그의 권유는 꽤 노골적이었다. 

독자개발을 포기하신다면 현대가 원하는 유리한 조건대로 조립생산을 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가 뒤에서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현대는 미국뿐 아니라 여러 해외사업에서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협박 같은 의견 전달에 정주영 회장은 자동차 산업의 중요성을 피력하며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미국 대사가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은 당시 미국 정부가 취하고 있던 입장을 알 수 있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현대차의 포니 수출은 미국 시장 진입에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1년이 지난 1978년 11월 포니는 누적 생산량 10만 대 기록을 세웠다. 

자국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은 수입차를 막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현대차는 고유 모델을 개발하고 양산하려는 의지가 분명했다. 자동차 산업은 기계, 전자, 철강, 화학 등 전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 기술 발전 그리고 고용 창출 효과가 크기에, 당시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이 될 수 있다는 판단하에 포기할 수 없던 사업이었다.

출처: 동아일보
1974년 7월 국내 최초의 고유 모델 이름 국민 공모전 광고

혹자는 '포니라는 차명을 변경하면 큰 문제 중 하나가 해소되는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현대차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국민 공모로 결정된 차명을 바꾼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이름을 바꾼다고 해도 특허와 리패키지 그리고 광고 등 그에 따르는 비용이 눈덩이처럼 커져 포기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현대차는 국민의 뜻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린 현대차는 좌절하지 않았다. 북미 수출 의지는 더욱 불타올랐고 포니를 시대와 시장의 요구에 맞게 변경하기로 한다. 이후 포니는 1979년부터 스타일링을 다시 시작하고 1984년 1월부터 캐나다의 혹한 테스트와 미국의 종합 성능 테스트를 거쳐 1985년 또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포니 엑셀이었다. 현대차의 미국 수출의 꿈은 1986년 2월 20일 이뤄졌다. 당시 현대차 미국법인 박성학 사장이 1,050대의 포니 엑셀 중 첫 번째 차를 끌고 플로리다주 잭슨빌 항에 내렸다. 

출처: 현대자동차
미국 등 여러 나라를 향해 선적되고 있는 포니 엑셀

현대차는 1976년 6대의 포니가 에콰도르에 수출된 것을 시작으로 10년이 지난 1986년에는 66개국에 302,134대가 수출되며 비약적으로 글로벌 판매량이 늘어났다.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포니의 인기는 1987년에만 북미 시장에서 263,000여 대가 팔리며 수입 소형 세단 중 1위라는 영광스러운 기록으로 이어졌다.

포니의 자랑스러운 점은 빠른 판매량 증가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포니는 대한민국 최초, 아시아에서 두 번째, 전 세계에서는 16번째 고유 모델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지킨 자동차라는 의미도 크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역사에 포니처럼 한 나라의 경제 발전과 국민의 자긍심까지 올려주는 자동차가 더 많이 탄생하길 바란다.

글 윤영준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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