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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바겐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한 차, K70

조회수 2020. 6. 16. 02:4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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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바겐이 공랭식 뒷바퀴굴림 방식에서 수랭식 앞바퀴굴림 방식으로 전환하는 분수령이 된 차
출처: Wikimedia Commons
2019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공개된 폭스바겐 ID.3

폭스바겐 첫 순수 전기차 ID. 3이 201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IAA)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 모델은 디젤 게이트의 어두운 이미지를 벗어나겠다는 폭스바겐의 의지를 보여준다는 큰 의미가 있었다. 또한 리어 휠 드라이브(뒷바퀴굴림) 방식을 채택한 이 차는 폭스바겐이 오랜만에 뒷바퀴굴림 자동차 메이커로 복귀한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비틀, 카만 기아, T1 등을 통해 알 수 있듯, 과거 폭스바겐이 생산한 차들은 대부분 뒤 엔진 뒷바퀴굴림(RR) 방식과 공랭식 엔진을 썼다. 하지만 비틀의 후속작을 연구 개발하면서 기존 구조를 탈피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앞바퀴굴림 방식과 수랭식 직렬 4기통 엔진을 쓴 EA245 등 몇 가지 콘셉트카가 탄생했지만 양산되지는 못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1967 폭스바겐 EA235

그렇게 된 이유는 오랜 시간 동안 익숙해진 RR 설계와 생산 방식을 단기간에 바꿀 시간과 비용이 부족했던 데 있었다. 또한 1960년대까지 뒷바퀴굴림 방식과 공랭식 엔진 등은 폭스바겐의 트레이드마크라 여기는 시장에서 다른 굴림방식을 받아들일 포용력이 부족했다는 것도 하나의 요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폭스바겐은 과거와 달리 앞바퀴굴림 방식에 수랭식 직렬 엔진 차를 양산하는 메이커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렇게 이미지가 다른 과거와 미래의 다리 역할을 한 모델이 골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뒷바퀴굴림 시대에 앞바퀴굴림 시대로 넘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자동차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K70이었다. 

출처: Gpedia, Your Encyclopedia
1970 폭스바겐 K70

1970년에 등장한 K70은 프론트 그릴 중앙에 설치된 VW 모양의 배지가 아니라면 폭스바겐 차라는 것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외관과 구조가 독특했다. 이는 차체부터 파워트레인까지 연구개발한 주체가 폭스바겐이 아닌 NSU(NSU Motorenwerke)였기 때문이다. 

NSU는 1967년 세계 최초로 로터리 엔진을 쓴 자동차인 Ro80을 양산한 업체로 유명하다. Ro80이 세상에 나왔을 때 0.335란 놀라운 항력계수로 바람의 흐름을 부드럽게 잡을 수 있게 디자인한 보디와 양쪽 측면에 3개의 유리를 단 날렵하고 세련된 고급 세단의 이미지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출처: Wikimedia Commons
NSU Ro80

하지만 Ro80의 보닛 아래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로터리 엔진은 이론적으로 우수했지만 엔진 연소실 내벽이 불규칙하게 마모되는 채터 마크(chatter mark)현상 때문에 연료 소비율과 내구성이 좋지 않았다. 이런 로터리 엔진의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었던 NSU는 Ro80의 후속으로 개발하던 K70에 전통적 내연기관 방식인 피스톤 엔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NSU Ro80의 로터리 엔진

여담이지만 Ro80은 로터리(Rotory)을 뜻하는 Ro를, K70은 피스톤을 뜻하는 콜벤(Kolben)의 앞글자인 K를 가져다 이름에 붙인 것이었다.

로터리 엔진을 쓰지 않은 K70은 여러 면에서 기술적으로 진보적이었다. 그 당시 메이커들이 주로 뒷바퀴굴림 방식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K70은 폭스바겐 최초로 수랭식 엔진과 앞바퀴굴림 방식을 썼고 완전 독립형 서스펜션과 디스크 방식 앞 브레이크 등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전작보다 향상된 제원과 여러 가지 요소 덕분에 쇼룸에 나오기 전부터 대중과 언론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폭스바겐 타입 4

1969년 봄, NSU는 3년간 밤낮으로 개발한 K70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여러 잡지에 홍보했지만 그 해 5월에 열린 제네바 모터쇼의 쇼룸에서는 아무도 그 차를 볼 수가 없었다. 폭스바겐이 NSU를 모터쇼 개막 전에 인수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1960년대 전후에 생산된 타입 4 등 여러 모델과 달리 K70은 폭스바겐의 정체성이 없다는 의견에 가로막혔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공랭식 엔진과 뒷바퀴굴림 방식에 적합한 동력계는 폭스바겐의 아이덴티티로 여겨진 시대여서, K70을 메이커의 결정권자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달랐다. 기존 모델에 싫증을 느낀 젊은 구매자들은 K70을 반가워했다. 폭스바겐은 이런 시장의 변화를 깨달았는지 K70의 생산 공장을 기존 NSU의 네카줄름에서 신흥 도시로 떠오르고 있었던 잘츠기터로 이전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폭스바겐 잘츠기터 공장

이 시기에 젊은 신흥 구매자의 요구였던 '어떤 도로에서도 빠른 주행이 가능한 높은 접지력과 편안한 주행 특성'에 70년대에 등장한 신기술이었던 수랭식 엔진과 앞바퀴굴림 방식의 조합을 갖춘 K70은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독일의 여러 매체도 K70의 장점으로 큰 차체와 전반적으로 높은 성능 등을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무거운 조향, 높은 가격 그리고 정체성 부재 등을 단점으로 소개하며 기존 폭스바겐 팬들처럼 좋지 않게 평가한 기사도 있었다.

1970년에 드디어 폭스바겐 배지를 달고 세상에 나온 K70은 생산된 5년 동안 21만 1,100여 대라는 나쁘지 않은 판매량을 보였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폭스바겐 처음으로 풀 모노코크 보디를 적용하고 데뷔한 타입 4가 보여준 35만 5,000대 이상의 판매량에 비하면 시장 반응은 아쉽기만 했다. 결국 폭스바겐 최초의 수랭식 엔진 차를 기존 팬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출처: Wheelsage
폭스바겐 타입 4

설상가상으로 1973년을 기점으로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한 앞바퀴굴림 방식의 역사적 세 모델이 잇따라 데뷔했다. 첫 번째는 전년도에 등장한 아우디 80의 패스트백 버전인 파사트(B1)였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폭스바겐 파사트(B1)

파사트는 자체 개발한 수랭식 엔진을 얹은 앞바퀴굴림 차로 새로운 시대를 연 신세대 폭스바겐의 탄생을 알린 선두주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두 번째는 시로코(Typ 53)로 카만 기아(Karmann Ghia)의 뒤를 잇는 스포츠 쿠페로 명성을 날렸다.

출처: Wikimedia Commons
1974 폭스바겐 시로코

마지막은 골프(1세대)였다. 이 모델은 글로벌 베스트셀러로 C세그먼트의 왕좌에 당당히 올라간 모델이기도 했다. 이런 훌륭한 모델들이 잇따라 세상에 나오면서, K70의 존재는 점점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출처: Wikimedia Commons
1974 폭스바겐 골프 (1세대)

이후에 여러 매체를 통해 K70의 낮은 판매량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K70의 전작인 Ro80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외부적 요인과 폭스바겐 정비사들의 수랭식 엔진에 대한 낮은 이해, 타입 4 담당자들과의 갈등과 같은 내부적 요인 등이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K70은 폭스바겐 역사상 최초의 수랭식 엔진을 얹은 앞바퀴굴림 차라는 영예만 트렁크에 싣고 단종의 길을 달려간 것은 아니었다. 뒷바퀴굴림 폭스바겐 시대와 앞바퀴굴림 차가 베스트 셀링 카가 되는 새 시대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도 충분히 해낸 것이었다. 

출처: pxhere

K70의 험난한 역사는 한 기업이 추구하는 브랜드 정체성과 소비자가 생각하는 브랜드 이미지가 각자도생하지 않고 소통을 통해 조화롭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을 선병하게 보여주는 발자취였다고 생각한다.

글 윤영준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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