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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개발자, 퇴사후 6개 레스토랑의 오너가 되다 < 1편>

조회수 2018. 5. 8. 12: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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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떠난 사람들 인터뷰 30번째

자기 소개를 부탁

4개의 브랜드로 6개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외식업에 종사하는 81년생 이남곤 입니다.




▶간략히 커리어를 소개해 달라

서울의 한 대학교를 00학번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를 전공했다. 운 좋게 4학년 1학기에 삼성전자에 합격했다. 그래서 삼성전자에서 핸드폰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했다. 삼성전자에서 3년을 일하고 겁없이 회사를 퇴사하고 길거리부터 시작해서 건대 근방에 작은 외식업 가게를 창업했었다. 그러다가 일 년 만에 다시 면접을 보고 IBM에서 일했다. 그 후에 다시 운 좋게 스카웃 되어 하고 싶던 일이던 브랜드 컨설팅업무를 1년 동안 빡세게 배우며 구르며 일했다. 다시 ‘배달의 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 형제들’에서 마케팅 팀에서 약 1년 반을 일했다.


결혼 후 아이가 태어나고 먹고 살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아내가 아내 이름을 걸고 ‘윤경양식당’ 을 성수동에 오픈 했다. 운 좋게 식당운영이 잘 되던 차에 괜찮은 자리가 생겨서 내 이름 걸고 ‘Gony's’ 라는 수제 버거집을 열었다. 둘째를 아내가 임신하면서 나도 회사를 나와서 전업으로 외식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정말 운 좋게 2016년 9월에 ‘생활의 달인’에 ‘수제버거의 달인’으로 소개 되었다. 이에 탄력 받아서 ‘33haus 삼삼하우스’ 이라는 즉석 떡볶이 가게를 또 오픈했다. 운을 계속 이어나가서 성수동이 아닌 ‘윤경양식당’ 잠실점과 제주 신화 월드점을 열었고, ‘SOMY Pizza&beer’까지 오픈 했다. 정리하자면 지난 3년여간 브랜드 4개, 매장 6개를 잔뜩 벌려 놓았다.




▶ 삼성전자 출신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막연히 컴퓨터로 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컴퓨터공학과를 갔다. 대학교에서 코딩을 못하거나 성적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치도록 컴퓨터가 좋아서 전공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3학년 2학기부터 삼성전자의 인턴을 시작해서 같은 과에서 2명이 최종적으로 남았다. 그 후 4학년 1학기에 면접을 보고 삼성전자 입사를 확정을 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등한시 한 건 아니었다. 입사 확정 이후 4학년 1학기에 학교 학점에 올 A+이었다.



▶ 삼성전자에서 했던 일은 무엇이었나?

스마트폰의 소프트웨어 개발을 했다. 내가 회사에 들어갔을 때는 피처폰에서 스마트 폰으로 막 넘어가던 시기였다. 윈도우 모바일 폰이었던 ‘옴니아’ 개발에도 참여했었다. 코딩을 하는 것은 좋았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재미도 있었다. 당시 나는 보통의 개발자들보다 좀 더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개발자들은 주로 컴퓨터와 대화를 많이 한다. 나는 사람과 얘기하는 것도 좋았다.


컴퓨터 이외에 패션, 트렌드, 마케팅 등에 관심이 무척 많았다. 회사에 들어가서 한 달씩 미국, 멕시코, 폴란드 이런 곳에서 머물면서 모바일 폰 테스트를 했다. 외국에 머물 때 보고 느끼고 경험한 바깥세상이 너무 좋았다. 개발은 혼자 하기도 하지만 2명이 팀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 당시 함께 일했던 선배가 너무 잘해서 나는 다소간의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삼성에 다니는 사람 치고는 시간이 비교적 많았다. 개발자의 일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천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 그럼 자신과 어떤 일이 맞다고 생각했나?

삼성전자에 다니면서도 평소에 관심분야였던 패션에 관한 블로그를 운영했다. 브랜드와 클래식 패션에 대해서 글과 사진을 올렸고 당시 하루에 3,000~4,000명씩 들어왔다. 회사 일에서 큰 재미는 없었고 패션 블로그를 제법 열심히 했다. 그 블로그가 인연이 되어 패션 디자이너, 잡지 에디터, 홍보 일하는 사람들을 제법 알게 되었다. 그래서 ‘브랜드 론칭 행사’, ‘잡지 촬영’ 이런 곳을 가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환경에 노출되다 보니 회사를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뭘까 생각해 보니 ‘상품기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성전자에 모바일폰이라는 생활 밀착형 상품이 있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인 상품 기획 일과의 접점을 찾고 싶었다. 기획 일을 하는 팀으로 옮기고 싶어서 시도를 했지만 안되었다. 개인의 의지보다는 회사의 필요가 인사에는 더 중요한 것 같다.



▶ 그다음은 어땠나?


블로그도 꾸준히 하고 당시에 Hot했던 트위터도 팔로워가 팍팍 늘어나니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뭐를 해도 좀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준비를 해서 길거리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삼성본관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트위터를 사용해서 알리고 판매를 했다. 그 후 푸드 트럭, 길거리 좌판은 합법은 아니었기 때문에 건대 앞에 작은 자리를 얻어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SNS를 사용한 작은 이벤트들을 지속적으로 하다 보니 미디어의 관심도 많이 받았다. 너무 많이 써서 유치한 워딩이긴 하지만 ‘삼성 때려치우고 샌드위치 장사하는 청년’ 뭐 이런 제목으로 미디어에 실리기도 했다.



▶ 좀 천천히 얘기를 해보자. 삼성전자를 나온 이유가 그게 다였나?


계기는 있었다. 당시 나는 모바일폰 테스트를 위해 해외에 한 달 이상 머무르는 출장을 자주 갔었다. 가장 친한 친구는 건축 쪽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둘이 채팅으로 회사 욕을 막 하다가 둘이 힘을 합쳐서 ‘뭔가 다른 일을 하자’라고 의기투합을 했다.


하지만 나는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 정도 스펙으로 삼성전자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들어와서 이 정도의 연봉과 혜택을 받는 것은 감사한 이이었다. 전체 직장인 중에서 상위 5% 안에 들것이다. 삼성전자를 나가서 이보다 좋은 회사를 가기도 힘들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대화를 나누었던 그 친구가 덜컥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다. 그리고 나를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가 나도 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질러 버린 거였다. 결국 삼성전자를 2007년에 입사해서 3년 다니고 2010년에 그만두었다. 당시 나이가 서른이었다.




▶ 친구가 나오자고 해서 그냥 나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그렇게 쉽게 회사를 그만둔 이유 중 하나는 회사를 쉽게 들어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입사지원서를 딱 한번 써서 모든 과정을 한 번만 겪으며 삼성전자에 들어가니까 취업 준비의 고단함을 잘 몰랐던 것이다. 취준생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그런 오기와 열정이 남들보다는 적은 상태로 회사에 들어가니 로열티가 적었던 것도 이유일 것이다. 어린 마음이었고 세상을 잘 몰랐던 것 같다.




▶ 그럼 아무 계획도 없이 일단 회사를 그만둔 건가?

친구의 회사가 삼성동이었고 아침에 김밥을 파는 사람들을 보았다. 청년 둘이 말끔하게 차려 입고 좀 색다르게 샌드위치나 김밥을 팔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나는 집안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조금은 무모했다.




▶ 처음으로 오픈한 가게는 무엇이었나?

회사를 그만두기 전 친구와 뉴욕 여행을 갔다. 거기에서 ‘할랄 가이즈’를 먹어봤다. 너무 맛있었고 한국에서 하면 잘 될 것 같았다. 그걸 한국에서 만들어 보고 길거리에서부터 팔았다. 트위터를 이용해서 내가 가는 장소를 알렸다. 그러다가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여러 곳을 알아보다가 건대 근방에 싼 곳을 찾았다. 친구와 같이 인테리어를 하고 준비하는 과정도 블로그에 올렸고 그걸 보는 사람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외국에서 먹어보고 한국에 없으니 막연히 잘 되겠다고 생각하는 건 사실 실패하는 정해진 루트였다.




▶ 결국 일 년 만에 그만두었다. 어떤 이유였나?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시작한 것이 이유였다. 그냥 막연한 마음에 시작했기에 원가 개념도 운영도 모른 채로 시작했다. 무모한 깡이었다. ‘둘이 젊은데 뭘 못하겠어’라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마케팅에 자신도 있었고 잘 먹혀서, 사람들이 와서 줄 서서 먹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두어 달 후 돈 계산을 해 보니 마이너스였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냥 몸만 힘들었다.




▶ 재 취업을 마음먹은 계기는?

결국은 생계 때문이었다. 가져갈 수 있는 수입은 별로 없고 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그래서 친구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내가 투자한 것은 모두 그대로 두고 다시 회사에 지원을 했다.


그 후에 SK 플래닛 (당시 SK 컴즈)에 기획파트에서 두 달 근무를 했다. 당시 그 회사는 WAP기술을 이용해서 피처폰에서 전자 상거래 서비스를 했다. 2010년이면 스마트폰으로 거의 모든 시장이 넘어간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피처폰 서비스를 붙잡고 있는 것이 마치 죽은 자식 뭐만 붙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곧 없어질 기술을 위해 롱텀 플랜을 세우는 것도 답답했다. 그 회사는 SK Telecom의 자회사였기에 함께 시너지를 낼 것이 정말 많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것 역시 답답했다. 또 당시 네이트온이 메신저 일등이었는데 그걸 모바일 버전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 것도 정말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다. SK Telecom에서는 문자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카카오톡이 지배하는 세상이 올 거라고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답답함이 너무 심해서 두 달 만에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 IBM 옮겼다. 능력이 좋다.

잡 서칭을 하는 중에 운이 좋게 IBM에서 모바일 신사업을 하는 팀이 있다는 걸 알았다. 당시 주말에 함께 운영했었던 가게 일을 도와줬다. 그때 면접 본 팀장이 슬쩍 와서 내가 일하는 것을 보고 갔다고 들었다. 이런 일을 하는 친구라면 IT 영업도 잘 할 거라고 생각을 해서 나를 채용했다고 했다. IBM에서 IT 서비스를 판매하는 팀이었는데 모바일 용으로 개발한 서비스를 처음으로 이마트에 판매를 했다. 사무실 컴퓨터로 하던 일을 모바일 폰으로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당시 팀에서 내가 유일한 주니어였는데 많은 선배들이 도와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서비스에 대해 설명하고 프레젠테이션 하는 것은 좋았는데 협상하고 관계를 맺고 하는 영업은 조금 힘이 들었다. 영업을 잘하시는 분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약 1년 후 팀이 해체가 되고 보안 서비스를 판매를 하게 되었다. 보안은 잘 몰랐고 또 모르다 보니 퍼포먼스도 별로 좋지는 않았다. 그냥저냥 일을 했다.



▶ 그럼 IBM은 왜 떠나게 되었나?

IBM에 들어오면서도 브랜딩, 브랜드 마케팅에 대한 열망은 늘 있었다. IBM에서도 마케팅 부서로 옮기기 위한 노력도 했지만 잘 안됐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블로그 활동은 꾸준히 했다. 그러던 중에 중국에 계신 전 샤넬 홍보부장을 했던 분께 메일을 한 통 받았다. 패션 관련 책을 쓰기 위해서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다. 영광스러운 일이라 인터뷰를 했고 그분이 한국에 올 때마다 만나게 되었고 친해지게 되었다.


그분의 소개로 대기업의 마케팅 디렉터로 일하셨고 지금은 브랜드 컨설팅 일을 하는 분을 알게 되었다. 당시 동경하던 일을 하는 분이었고 그분도 저를 잘 봐주셔서 함께 일을 해 보자는 제안까지 받게 되었다.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라 과감히 IBM을 떠날 수 있었다. IBM에서 일한 기간은 1년 7개월 정도였다.




▶보통은 회사가 싫어서 벗어나려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당신은 무언가를 향해가기 위해 회사를 떠난 것 같다.


맞다. 회사밖에는 엄청나게 다른 새롭고 다양한 것이 많다. 그런데 퇴근 이후에도 회사의 삶을 연장해서 사는 것이 싫었다. 회사는 회사고 퇴근 후는 나였다. 퇴근 후에는 내가 재미있어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주말에도 관심 있는 행사, 힙한 곳도 일부러 찾아다녔고, 돈을 내고 배울 수 있는 것도 적극적으로 배웠다.


당시 사회적 기업에 관심이 많아 당시 박원순 대표가 운영했던 희망제작소에도 가서 ‘소셜 디자인 스쿨’이런 것도 배우기도 했다. 브랜딩에 관련된 공부도 했다. 물론 모두 회사를 다니면서 퇴근 후나 주말에 찾아다니며 배운 것들이다.



▶ 그때부터 이미 워 라벨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삼성에 다닐 때 회사에서의 팀원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었다. 퇴근하고 혹은 주말에 회사 사람들과 술도 마시고 같이 놀러 가고 하는 것도 좋았지만 더 좋아하는 게 있었다. 퇴근 후에는 그냥 술 먹고 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블로그를 하면서 알게 된 잡지사 친구들, 브랜딩 일 하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회사일과 완전 다른 내가 관심 있어 하는 경험을 했다. 회사 안에 앉아서 돈 버는 것 말고 다른 원하는 일을 하면서 돈 버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쪽으로 더 많이 관심이 갔다. 공부도 꾸준히 했다




▶ 새로 이직한 회사는 어떤 곳이었나?

Ranee&Company라는 곳이었다. 브랜딩, 디자인을 하는 창의적인 회사였다. 많이 배웠고 챌린지도 많이 받았다. 그동안 내가 관심을 가지고 공부만 했었지 그것을 일로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챌린지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나의 장점은 Broad 한 관심이었다. 패션, 브랜딩, 음악, 음식 모두 어느 대화에서나 주도하면서 얘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양날의 검 같았다. 장점일 수도 또 단점이 될 수도 있었다.



▶ 어떤 일을 했나? 기억에 남는 일은?

당시 현대 자동차의 Young라인이었던 PYL 관련 일을 했을 때가 기억난다. 가로수길에 팝업 스토어를 만드는데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경쟁 PT를 했고 일을 따냈다. 젊은 고객들을 대상으로 론칭 행사를 하는 일의 PM으로 일했다. 전체적인 콘셉트 설정, 행사 기획, 섭외, 진행 등의 일을 했었다. 처음 하는 일이었는데 상당히 큰 일이었고 보통은 시니어가 하는 일이었다. 일을 하면서 많이 힘들었지만 엄청나게 많이 배웠다. 나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모든 일이 배울 것 투성이었다.




▶ 결국 그곳도 떠나게 되었다. 계기는 뭔가?

윗 분의 기대와 실무자로서의 괴리, 그리고 대행사 일을 하면서 을로 당하는 그런 답답함 들이 모두 얽혔던 것 같다. 현대차 프로젝트를 마치고 수고했다고 휴가를 얻어 남해로 여행을 갔다. 내 전화가 배터리가 없어서 꺼져 있었는데 여자 친구 (현재 부인)의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했다. 그리고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하는데 업무 얘기를 한 시간이 넘게 했다.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나에게 한 얘기도 모두 돌아가서 회사에서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기분이 많이 상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같이 일 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대표님도 같은 생각이었고 그래서 나오게 되었다.




▶ 경력이 뭐랄까 좀 짧고 일관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가서는 ‘사기 치는 거 아니냐?’라는 말도 들었다. 이렇게 “시작과 현재가 다른 경력으로 이런 성과를 낸 것이 말이 되느냐? 그냥 발끝만 담그고 네가 했다는 거 아니냐?” 뭐 그런 의구심이었다. 그래서 회사를 나오고서는 백수 생활을 좀 했다. 결혼을 했는데 백수가 되어 버렸다.




▶ 그다음은 ‘우아한 형제들’에 취업했다. ‘배달의 민족’ 아닌가?

맞다. 이제는 커리어가 브랜딩으로 이어가야겠다고 여러 회사에 지원을 했고 ‘우아한 형제들’에 면접을 보고 취업을 했다. 지인 찬스도 없이 지원하고 면접을 모두 보고 들어갔다. 하지만 경력은 단 일 년만 인정받았다. 사회경험으로는 8년 차였는데 브랜딩을 일로 한 것은 일 년밖에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어서 오케이를 하고 입사를 했다. 당시가 2014년이었다.




▶ 배달의 민족에서 어떤 일을 했나?

마케팅 실에서 일을 했다. 어느 하나 정해진 일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두루두루 모든 일을 했던 것 같다. 좋게 말하는 모두 했던 거고 나쁘게 말하면 체계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당시는 회사가 막 커나가는 단계여서 업무가 프로세스화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이것 재미있겠는데 하면 해 보고 그랬던 것 같다.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내가 삼성과 IBM에서 특히 많이 배웠던 것은 일의 프로세스와 시스템에 대한 힘이었다. 회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프로세스와 시스템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IBM에서는 서비스 판매 계약을 하나 하려 해도 거의 직능의 부서가 Engage 되어 있기에 그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했다. 심지어 잘 모르는 Account 쪽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했다. 설득을 해서 오케이를 받지 못하면 계약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프로세스가 전 세계 IBM이 동일했다. 당시 IBM에 있을 때는 너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떠나고 나서 보니 서비스 판매 전에 모든 RISK를 없애는 작업을 하는 것이었고 그 프로세스는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수없이 많이 다듬어진 것이었다.


IBM에 들어가면서 좋았던 것 중 하나가 삼성이 부러워하는 회사가 IBM이라고 들어서 ‘도대체 무얼 닮고 싶어 하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과 상관없이 경계를 넓히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이 일을 왜 이렇게 하는 겁니까?’라는 질문을 정말 많이 했던 것 같다. 제안서를 하나 써도 나는 세일즈 부서였기 때문에 기술자 그룹에 있는 사람의 시간을 사서 일하는 구조였다. 같은 회사에서 그냥 ‘야, 이런 거 하는데 좀 도와줘’ 이런 수준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런 구조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IBM은 일을 하는데 소요되는 시간, 인력, 그리고 벌어들이는 Benefit을 정량화하면서 측정할 수 있는 단위로 만들었던 것 같다.



동시에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Risk Management 였던 것 같다. 그렇게 세계에서 제일가는 프로세스, 효율 중심의 회사에 근무를 했었다 보니 배달의 민족의 당시 모습이 너무 미숙하고 답답해 보였다. 물론 스타트업이고 아직 기업 생장주기로 보면 초창기 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많이 답답했다. 분명 좋은 회사이고 잘 나가는 회사이기는 한데 나의 나이와 커리어를 볼 때 오래 있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 회사의 업태와 역사에 따라 많이 다른 점을 느낀 것 같다.


배달의 민족은 사회초년생들이 많이 있었고, 직원들의 대표님에 대한 애정과 신뢰도가 엄청났다. 대표님을 거의 스타로 생각하고 (스타가 맞긴 맞다) 팬처럼 좋아하는 친구들도 많았던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너무 열광을 하면 조금 “아니, 왜?”라며 의구심을 갖는 스타일이다. 직원들이 모든 것을 회사에 올인하고 직원들과 너무 친하고 여행도 다니고 했다. 나는 결혼도 했고 나이도 있고, 경험한 것이 다르기에 생각도 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하는 방식,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회사고 좋은 회사이지만 나와는 조금 안 맞는 부분도 있었다. 직원들과의 나이 차이도 그중 하나였다.




▶ 당신은 하고 싶은 걸 학창 시절에 이미 알았다. 어떻게 그걸 찾았나?


지금 30대 정도의 성인이라면 학창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가 뭘 할 때 가장 좋았지?’, ‘주말에 시간이 나면 나는 뭘 했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 좋을 것 같다. 나는 학생 때 주말에 동대문, 이대, 강남, 이태원 등의 옷 가게를 돌아다니면서 뭘 파는지를 보고 사람들이 뭘 입는지를 봤다. 시간이 나면 도서관의 정기 간행물실에 가서 여러 종류의 잡지를 다 봤었다. ‘이런 걸 다루는 잡지가 있어?’ 하는 특이한 것도 읽어 보았다. 사실 그 과정은 많은 인풋을 받는 과정이었다. 많이 들어와야 그중에 나와 맞는 것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개발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일을 하다 보니 상충이 생겼기 때문인 것 같다. 자신의 과거의 사소한 행동을 살펴보면서 하나하나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 거 같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을 잘 모른다. 조언을 해 준다면?

가장 큰 문제는 ‘학원 좀비’로 키워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기에 정답이 있는 문제 풀이에만 익숙하다. 사고 자체가 정답만을 찾는 것에만 익숙해져서 정답이 없는 사회에 들어왔을 때 답답해하는 것 같다. 스펙을 쌓는 것도 마찬가지다. 회사가 무엇 무엇을 원한다더라, 어떤 타이틀이 있어야만 인정받는다고 이미 알고 있고 그것만을 위해 행동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삶은 학원에서 해결해 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작은 관심이라도 있으면 해 보길 바란다. 페이스북에서 좋은 교육이 있어도 좋은 명언이 있어도 그게 그냥 끝이다. 실제로 내가 뛰어들어해보고 경험해 보는 사람은 적다. 가장 큰 문제는 실제 행동으로 ‘한발 더’ 나아가지 않는 거다. 딱 한 발만 더 나가서 실제로 모임에 참석해 보면 된다. 설령 가서 적극적으로 임하지 못하더라도 잠깐이라도 가보는 것만으로도 ‘와, 이런 곳에 관심 있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구나. 이렇게 관심 있는 사람이 많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거다. 쭈뼛쭈뼛 거리더라도 남을 의식하지 말고 ‘나만 그런 거겠어? 다른 사람도 어색하겠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걸로 좌절할 필요도 없다. 작은 관심이 있으면 딱 한 발만 더 나가면 좋겠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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