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1억, 백지수표..차마 그건 못하겠더라고요"

조회수 2021. 2. 2. 06:0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1억 준다며 N번방 가해자가 신상 지워달랬는데 거절했습니다?

“연예인 지망생입니다. 어릴 때 온라인 커뮤니티에 아무 생각 없이 쓴 글 때문에 밤에 잠도 못 자고 미칠 것 같아요. 견적과 소요 시간을 알고 싶어요.”


“아나운서를 꿈꾸는 학생입니다. 오래전 화상채팅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보낸 영상 때문에 아무 일도 못 하고 우울증약만 먹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출처: 산타크루즈컴퍼니 제공
김호진 대표.

김호진(52) 산타크루즈컴퍼니 대표는 국내 1호 ‘디지털 장의사’다. 웹상에 떠도는 글, 사진이나 불법 촬영물 등 과거의 흔적을 지워주는 일을 한다. 김 대표는 원래 광고에 출연하는 연기자를 캐스팅하는 모델 회사를 운영했다. 2008년 소속 회사의 어린 모델을 겨냥한 악성 댓글을 지우다 사업성을 발견하고 2013년 본격적으로 새로운 비즈니스에 뛰어들었다. 산타크루즈컴퍼니는 개인뿐 아니라 기업, 단체와 공공기관 등을 상대로 온라인 데이터를 모니터링해 평판을 관리하는 일도 한다. 서울 강남 개포동 사무실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산타크루즈컴퍼니가 하는 일이 궁금하다.


“의뢰인이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남긴 글이나 사진을 삭제한다. 범죄자들이 사고파는 불법 촬영물 유통을 막는 일도 한다. 빅데이터 프로그램을 활용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류한다. 삭제 대상 게시물이 100개나 1000개 정도라면 수작업으로 삭제가 가능하지만, 100만개가 넘어가면 직접 찾아서 분류하기 힘들다. 삭제 작업은 가내수공업과 비슷하다. 데이터를 찾아서 눈으로 보고 삭제 대상인지 아닌지 판단해 실행에 옮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집약적 비즈니스다.”


-어떤 의뢰가 가장 자주 들어오나.


“웹상에 남긴 글을 지워달라는 분이 많다. 정치적인 성향을 가감 없이 드러낸 글을 지우고 싶어 한다. 또 특정 단체나 모임에서 활동하면서 쓴 게시물을 삭제해달라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다. 어릴 때 쓴 악성 댓글이나 비방 글을 수년 뒤 지워달라고 찾아오는 청년도 많다. 연예인에게 악성 댓글을 남기는 사람 10명 가운데 7명이 청소년이다. 10~11살 때쯤 악플을 쓰고, 스무살쯤 대입이나 취업을 앞두고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며 회사에 찾아오기도 한다.”


-익명으로 남긴 글도 모두 지울 수 있는 것인가.


“플랫폼이나 게시판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게시자를 유추할 수 있는 별명만 있어도 관련 자료를 삭제할 수 있다.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도 지울 수 있다. 개인정보취급방침 근거에 따라 삭제를 요청하면 대부분 들어준다. 우리나라 홈페이지에 올라온 게시물이라면 몇 시간 안에 삭제할 수 있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등 외국 플랫폼은 예전에는 요청부터 삭제까지 2~3개월 걸렸다. 요즘은 1주일 안에 지울 수 있다. ‘개인 게시물에 대한 삭제 요청권’이라는 비즈니스 특허도 보유하고 있다.”

출처: 산타크루즈컴퍼니 제공
데이터 삭제 작업 중인 직원들.

-게시글 삭제에 애를 먹는 플랫폼도 있다고.


“트위터와 텔레그램에 올라온 글은 삭제 작업이 쉽지 않다. 페이스북이 특정인의 얼굴이 나온 사진을 개인정보로 볼 수 없다며 삭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적도 있다. 그러면 개인정보 침해가 아닌 명예훼손 등 다른 근거를 들어 담당자를 설득한다. 한 플랫폼은 ‘우리는 운영자일 뿐, 홈페이지에 남은 흔적은 올린 사람이 책임질 문제’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그래도 최근에는 ‘잊혀질 권리’에 대한 인식이 퍼지면서 플랫폼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그런데도 삭제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게시글이 보이지 않게 차단하는 작업을 한다.”


-직원들의 일과가 궁금하다.


“18명이 주야간으로 나눠 작업한다. 주간 작업은 오전 9~10시부터 오후 6~7시까지 한다. 야간 근무자는 밤 9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일한다. 악의적인 게시물이나 불법 촬영물은 주로 밤에 올라온다. 또 국내외 플랫폼을 오가며 데이터를 찾고 삭제 요청을 해야 하므로 교대 근무를 한다. 출근하면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묵묵하게 일한다. 예전에 공장에서 근무하던 미싱사들과 작업 방식이 비슷하다. 일하다 사무실 근처 산책로에서 15~20분 정도 머리를 식히고 돌아온다.”


-텔레그램 N번방 가해자들의 의뢰를 거절했다고 들었다.


“N번방 가해자들의 신상이 SNS상에서 공개된 적이 있다. 이 명단에 있는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달라는 사람이 있었다. 직장도 있고, 결혼해 가정을 꾸린 가장이라 꼭 지워야 한다고 하더라. 하지만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 의뢰를 받으면 우리 회사까지 함께 비난받지 않겠나. N번방 가해자 중 ‘얼마를 요구하든 다 주겠다’라며 삭제 작업을 요청한 사람도 많았다. 3000만원부터 1억원까지 준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도와줄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불법 촬영물로 인한 10대 피해자들의 경우 돈을 안 받고 흔적을 지워준다고.


“청소년에게는 돈을 받기 힘들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피해 사실을 아는 게 무서워 다른 곳에 말도 못 하고 우리 회사에 찾아온다. 한 달 용돈 5만원으로 생활하는 친구들이 돈이 어디 있나. 무작정 전화를 걸어 울기만 하는 아이들도 많다. 학교도 못 가고, 집에도 못 들어가고 거리에서 방황하면서 제발 도와달라고 말한다. 이런 친구들에게 돈을 어떻게 받나. ‘2년 뒤면 성인이 되니까 아르바이트를 해서 갚는다’고 한다. 그러면 그냥 알겠다고 하고 지워준다. 나조차 이렇게 많은 청소년이 삭제 작업을 의뢰할지 상상도 못 했다. 여성가족부나 교육부에 지원을 요청한 적도 있는데, 이런 일로 지원해본 적이 없어서 불가능하다고 하더라. 내가 성인(成人)이라 무료로 해 주는 게 아니다. 누구라도 나처럼 할 거다.”

출처: 산타크루즈컴퍼니 제공

-매출은 얼마나 나오나.


“아직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청소년 고객이 대부분이라 돈을 많이 못 번다. 주간이나 월간 계약을 하는데, 작업 비용은 한 달에 200만원 정도 든다. 불법 촬영물의 경우 삭제를 해도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영상이 그 뒤로 올라오는 경우가 있어, 수개월 동안 모니터링 작업이 필요하다. 돈 없는 취업준비생은 비용을 들으면 깜짝 놀란다. 그래서 돈을 받지 않고 직접 삭제할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플랫폼의 개인정보 취급방침 3조 8항을 적용해 관리자에게 삭제를 요청하라는 식으로 귀띔해준다. 돈은 많이 못 벌지만, 직업적인 만족도 자체는 높은 편이다. 이 일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나.”


-기억에 남는 고객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한 정치인과 관련된 사건이 있었다. 유부남이었는데, 여러 여성과 교제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 정치인과 만난 여성들의 신상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퍼졌다. 그들은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들었다. 또 조건만남을 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피해 여성 중에서는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당사자 중 한 명이 회사를 찾아와 ‘유부남인 줄도 모르고 연애를 한 것뿐인데, 왜 욕을 먹고 일상생활이 파탄 나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호소했다. 온라인에 퍼진 개인정보를 싹 지워줬고, 그분은 지금도 잘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출처: 산타크루즈컴퍼니 제공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청년은 뭘 준비해야 하나.


“IT 직종이지만, 이과보다 문과 출신에 적합한 일이다. 나 역시 모델 에이전시를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데이터나 IT 쪽으로는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삭제 작업은 프로그램을 활용하므로 누구나 배울 수 있고, 코딩 관련 부서가 따로 있어서 꼭 IT 전문가가 아니라도 괜찮다. 도리어 책을 많이 읽어야 하고, 피해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성보다 감성적인 접근이 더 필요한 일이다.”


-앞으로 계획은.


“지금은 의뢰인 대부분 개인이거나 소비재기업·교회·기업 등 단체다. 하지만 공공기관이나 넓게는 국가를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국세청이나 여성가족부 등 특정 정부 부처 가운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허위사실이나 악플로 고통받는 곳들이 있다. 요즘은 김치가 중국 음식이라는 허위사실도 돌아다니지 않나. 이런 부정 게시물을 삭제해 국가나 기관의 평판을 관리하는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미혼모나 은퇴한 뒤에도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중장년층 등 취약계층을 채용할 생각이다. 그러면 고용 창출에도 기여할 수 있고, 나라에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국가 평판 관리로 시장 규모를 키워나가는 게 목표다.”


글 jobsN 송영조 

jobarajob@naver.com

잡스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