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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확 줄인 '분홍선 남자'가 받은 포상금은..

조회수 2020. 11. 14. 06: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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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법으로 사람 목숨 구한 도로공사 직원
규정외 노면 색깔 유도선으로 사고 연간 25건에서 3건으로
도로기술사도 “하지 말라”...편법 취급 받았지만 결국 시공

“분기점 22%, 나들목 40% 사고감소 효과. 이거 엄청난 거잖아요.”


2020년 10월13일 국토교통위원회 국정감사장, 더불어민주당 장경태 의원은 김진숙 한국도로공사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노면 색깔 유도선 입안자를 제대로 치하하라는 지적이었다.


노면 색깔 유도선은 교차로·나들목·분기점 등에서 차로를 안내하기 위해 노면에 시공하는 유도표시다. 운전자는 녹색(연한 녹색 포함)이나 분홍색 표시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는 홍길동의 마음이었죠. 내가 한 일인데 아무도 모르니까요.”


지금까지 볼 수 없던 녹색·분홍색 선을 도로에 수놓은 사람. 한국도로공사에서 24년째 근무하고 있는 윤석덕 안성용인건설사업단 공사관리팀 설계차장(51)이다. 최근 윤 차장은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자신의 성과를 알렸다. 

출처: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캡처
차들이 노면 색깔 유도선을 따라 주행하고 있다. 노면 색깔 유도선은 현재 전국 494곳에서 볼 수 있다.

◇사람이 죽지 않는 도로


윤 차장은 2019년부터 세종 포천고속도로 안성에서 용인구간의 건설공사 관리를 맡고 있다. 윤 차장은 현장과 설계도면이 일치하는지, 적절한 설계공정·공법을 적용하고 있는지를 감독한다. 시공사가 공사할 수 있도록 예산을 확보하는 일도 한다.


-노면 색깔 유도선을 기획한 계기는요.


“2011년 3월, 군포지사에서 과장으로 근무할 때 안산분기점에 큰 사고가 있었어요. 4중 추돌이었는데 두 명이 죽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여러 방법으로 도로의 위험요소를 알렸어요. 경찰 경광등·점멸등·솔라 표지판 등을 모두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망사고 후, 운전자 주의를 끌거나 위험구간을 경고하는 데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모두 제 잘못 같았습니다. ‘개 눈엔 똥만 보인다’고 하죠. 도로관리자 시선에서는 별다른 대책이 안 보였습니다.


사망사고로 마음이 안 좋던 그 날, 군포지사장님이 ‘초등학생도 알아볼 수 있도록 대책을 세우라’고 하시더군요. 그 말을 되새기면서 집에 갔는데, 딸과 아들이 물감과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 도로에도 색칠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당시 딸은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은 유치원생이었어요. 정말 초등학생 눈높이에서 해결책을 찾은 겁니다.”


하지만 법적인 이유로 더 이상의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던 2014년, 경북 청송에서 근무하던 윤 차장(당시 과장)에게 한국도로공사에서 전화가 왔다. 색깔 유도선 아이디어를 활용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마침내, 2017년 국토교통부가 관리 매뉴얼을 발표하며 색깔 유도선 활용을 공식화했다. 

출처: 국토교통부
국토교통부가 2017년 공식으로 발표한 노면색깔유도선 설치 및 관리 매뉴얼 내용 중 일부. 2011년 처음 시공했지만 6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노면 색깔 유도선이 기존 표지판보다 나은 점은 뭔가요.


“운전자 눈에 잘 들어온다는 점이죠. 승용차 기준으로 운전자 눈높이는 보통 90cm~1m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존표지판은 운전자 눈높이보다 너무 위에 있어요. 그래서 잘 안 보이고요. 도로관리자가 주는 신호를 운전자가 놓치기도 쉽습니다. 사실, 운전자는 자기 정면이나 정면 아래를 많이 보거든요. 그런데 색깔 유도선은 운전자 눈높이 아래에 있어요. 따로 의식하지 않더라도 정보를 계속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2011년 처음 색깔 유도선을 시공한 안산 분기점은 연간 25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하던 곳이었다. 시공 후에는 연간 3건으로 줄었다. 2018년에는 서울시도 차로변경건수가 50% 줄고 사고위험이 45% 줄었다며, 색깔 유도선 확대 설치 계획을 발표했다. 현재는 색깔 유도선을 전국 494곳에서 볼 수 있다. 앞으로도 늘어날 예정이다.


-색깔을 녹색과 분홍색으로 정한 이유는요.


“원래 규정상 도로엔 네 가지 색깔만 칠할 수 있습니다. 흰색, 황색, 파란색 그리고 빨간색입니다. 그 색깔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눈에 너무 튀지 않게요. 혹은 약간 벗어나더라도 회사가 인정할만한 색깔이어야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한국도로공사가 2008년부터 추구하던 건설 목표가 ‘친환경 녹색고속도로’예요. 그래서 그 당시에 나무도 많이 심었고요. 녹색은 쉽게 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홍색은 고르기가 어려웠어요. 처음엔 기존에 사용하던 황색을 생각했죠. 그런데 황색 실선은 넘어가면 안 된다는 강렬한 의미가 있거든요. 결국 운전자들에게 혼란만 더할 것 같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다시 색을 바꾸려고 고민하는데, 사망사고로 돌아가신 분과 분기점에서 실랑이하던 여성운전자분이 떠올랐어요. 여성을 잘 유도할 수 있는 색깔을 택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번에도 힌트는 자녀들에게서 얻었다. 분홍색은 한창 공주 놀이에 빠져 있던 어린 딸이 좋아하던 색이었다.

출처: 본인 제공
윤 차장의 딸(가운데)과 아들(오른쪽)이 불량식품 가게 앞에서 오래전 교복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노면 색깔 유도선 아이디어는 이 두 사람의 그림에서 시작됐다.

-색깔 유도선을 칠하려고 편법을 썼다고 하시던데


“규정 때문이죠. 도로에 칠할 수 없는 색이라는. 하지만 색깔 유도선을 칠하기만 하면 교통사고가 줄어들 것이 너무 빤했어요. 도로기술사 등 전문가들에게도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다들 규정 위반이라며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사고가 생기면 경찰에 입건될 수 있다고 겁도 주고요.


돌파구를 찾고 싶어 인천경찰청에 문의했습니다. 경찰은 고속도로 순찰을 하니까 사망사고가 잦으면 징계나 문책을 받기도 하거든요. 방송에서는 편법이라고 다소 자극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사실은 인천지방경찰청 11지구대의 업무협조가 있었습니다. 차를 막고 색을 칠할 수 있도록 ‘교통제한 신고서’ 승인을 받은 거죠. 도로관리자인 저와 경찰 지구대의 목적이 같아서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망사고를 줄이고 싶다는 목적이요.”


윤 차장의 이야기를 듣고 힘을 보탠 건, 인천경찰청 11지구대에서 안산분기점을 담당하던 임용훈 경사(현 인천경찰청 경감)였다. 임 경사는 색깔 유도선 아이디어를 직속 상관인 인천지방경찰청 고속도로 순찰대장에게 보고해 결재를 받아냈다. 공무원이 공익을 위한 업무를 하다가 발생한 손실에는 책임을 묻지 않는 ‘적극행정면책제’를 활용, 3000만원을 들인 색깔 유도선 시공도 도왔다. 덕분에 2011년 5월, 안산분기점에는 대한민국 1호 노면 색깔 유도선이 탄생했다.


사람들은 공무원 혹은 공기업 직원이라고 하면 융통성 없다는 편견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이들은 생명이라는 가장 중요한 가치 앞에서 관습이나 규정에 얽매이지 않았고, 의미 있는 일을 해냈다.


“고속도로에서 근무하면 각종 사고 소식을 자주 접해요. 그럴 때면 사고가 나더라도, 사람이 죽는 일만은 없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합니다.”


◇세상이 환영하는 바보


-회사로부터 포상이나 성과금은 안 받으셨어요?


“2011년 도로공사 본부에서 진행하는 학습조직 경진대회에 출품해 장려상을 받긴 했어요. 색깔 유도선을 시공하고서 더 나은 방법을 찾으려고 계속 공부했거든요. 사고율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꾸준히 관찰했습니다. 장려상을 받으니까 저희 부처로 10만원 상금이 내려왔어요. 그 돈은 직원들 회식에 보태 썼죠. 그 외에 성과보수나 포상은 없었습니다.”


윤 차장은 색깔 유도선 아이디어를 본사에도 출품했다. ‘법률위반’을 이유로 결격됐다.

출처: 본인 제공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윤석덕 차장(오른쪽부터 두번째) 가족. 윤 차장 뿐 아니라 아내(왼쪽부터 세번째)와 아들(왼쪽부터 두번째) 두 MC 유재석(왼쪽부터 첫번째), 조세호(오른쪽부터 첫번째)와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눴다.

-유퀴즈 방송 이후, 댓글 반응을 보셨나요?


“네 봤습니다.”


-‘내가 다 억울하다’라거나, ‘포상해줘야 한다’ 같은 댓글이 아주 많던데요.


“포상에 대해선 생각 안 해봤어요. 단지 색깔 유도선이 공식적으로 자리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사망사고가 줄어들 수 있도록요. 그 복은 결국 제가 받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실제로 그 일 이후로 제 인생이 잘 풀렸고요. 직접적 보상은 아니지만, 다른 방법으로 보상받았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방송 출연도 했잖아요.”


-특허 신청해서 돈까지 벌면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색깔 유도선이 전국에 퍼진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기 쉽죠. 아마 꽤 돈을 벌지도 몰라요. 하지만 만약 제가 특허를 신청했다면, 기관들이 특허료 때문에 색깔 유도선 설치를 꺼리지 않았을까요. 정해진 색깔이 아닌 다른 색을 칠해서 특허를 피해갈 수도 있고요. 그런데 효과가 줄어요. 결국, 특허가 걸림돌인 거죠. 그런데 저는 특허를 안 냈으니까 전국에 색깔 유도선이 퍼진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돈이 많아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킨, 또 앞으로 지킬 생명과 사고비용을 생각해보세요. 특허료 받는 것에 비할 수 없습니다.”


-최근 인터뷰도 많이 하셨는데, 왜 이렇게 요청이 많이 들어온다고 생각하세요?


"바보 같아서 그렇죠.”


-바보요?


“남 좋은 일 하느라 자기 이익도 못 챙기니까요. 하지만 다들 그런 바보들이 있다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언론도 온 국민에게 알리려고 하더라고요. 의인, 법 없이 사는 사람, 대인배 같은 사람들을 찾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세상이 워낙 각박하잖아요. 그래도 이런 바보들이 몇 명 더 있으면 세상이 조금은 더 살기 좋아질 거예요. 

출처: 본인 제공
윤 차장이 보호장구를 착용한 채 고속도로 갓길에 서 있다. 윤 차장은 한국도로공사에 입사한 후 24년간 고속도로와 함께했다.

-이익을 뒤로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어떤 마음으로 근무하시나요.


“한국도로공사는 국민에게 받는 통행료로 건설비용과 유지관리비용을 충당하는 기업이에요. 그 이상의 수익은 내도 안 되고요. 이런 곳에서 20년 넘게 일해서 그런가 봐요. 적은 돈에 목매거나 얄팍한 수로 자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시간이 지나도 지금 같은 마음가짐으로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국도로공사 직원으로서 운전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나요.


“고속도로는 도로 위계 상 최상위도로입니다. 그만큼 선형 기하 구조가 좋아 빨리 달릴 수 있어요. 고속도로를 계속 고속으로 유지하려면, 규제 속도를 지켜주셔야 해요. 사고가 나버리면 고속을 낼 수 없는 고속도로가 돼버리니까요.”


 -목표가 있다면요


“업무 목표는 세종에서 포천 간 고속도로를 성공적으로 준공하는 겁니다. 2022년까지 완공을 목표하고 있는데요. 조금 미뤄질 수도 있지만,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요. 경부선·중부선 물동량(이동량)이 분산되도록요. 그러면 모두가 고속도로를 더 쾌적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삶의 목표는 명예롭게 퇴직하는 거예요. 수년 뒤에는 퇴직을 할 텐데, 그때도 지금처럼 보람있는 마음으로 은퇴하고 싶습니다.”


글 jobsN 이안기 인턴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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