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 때문에 연예계 떠난 싸이 백댄서, 최초의 한국인 됐다

조회수 2020. 9. 18. 09:0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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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노력으로 최초 타이틀 얻은 한국인
BTS, 한국 가수 최초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1위
암 투병 중 3500km 완주한 이윤혁씨
한국인 최초 WHO 수장 '백신의 항제' 이종욱 박사

2020년 9월1일 방탄소년단이 신곡 '다이너마이트'로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 정상에 올랐다. 한국인 최초였다. 핫 100은 스트리밍 실적, 음원 판매량 등을 종합해 매주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노래 순위를 집계하는 차트다. 2012년 가수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7주 연속 2위에 오른 후 한국 가수로는 최고의 기록이다.


일주일 후 방탄소년단은 새로운 역사를 썼다. 2주 연속 빌보드 핫 100 1위를 달성했다. 핫 100 1위로 데뷔해 2주 연속 정상을 유지한 팀은 역대 20팀 밖에 없는 놀라운 기록이다. 이들은 2013년 '2 COOL 4 SKOOL'로 데뷔해 7년 만에 세계 정상에 올랐다. 그동안 노력의 피, 땀,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방탄소년단처럼 노력 끝에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얻은 한국인을 알아봤다.

출처: BTS 공식 인스타그램

◇정상에 오른 뮤지션들


일본은 K팝 뮤지션들이 한국 다음으로 활동을 많이 하는 무대다. 일본에서 한국 가수 최초로 일본 오리콘 차트 1위를 한 가수가 있다. 바로 '원조 한류 가수' 보아(BoA)다. 보아는 2000년 만 13살의 나이로 데뷔해 어리지만 한국 음악 시장에서 성공을 거뒀다. 200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앨범 'Listen To My Heart'를 발매했다. 앨범 판매량 120만장을 넘겨 한국인 최초로 오리콘 주간 차트 1위에 올랐다.


'아시아의 별'이라고 불리며 2000년대 최고의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2009년 미국 시장에도 도전했다. 미국 데뷔 앨범 '보아(BoA)'로 빌보드 메인 앨범차트 '빌보드200'에 127위로 진입했다. 순위는 높지 않았지만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 메인 차트에 진입한 것이었다.


대중가요뿐 아니라 클래식 부문에서도 많은 뮤지션이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세계 무대에서 활약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2015년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제17회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했다. 당시 그의 나이 21살이었다. 같은 해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에서 한국인 최초로 1위에 올랐다.

출처: Helene Namesis 유튜브 캡처, 조선DB
2002년 일본 음악방송 무대에 선 보아(좌), 피아니스트 조성진(우)

◇말기 암 판정받고 '뚜르 드 프랑스' 완주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 박찬호, 한국인 최초이자 동양인 최초 메이저리그 월드 시리즈 우승 김병현, 한국인 최초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메달리스트 김연아 등 스포츠에서는 최초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선수가 많다. 그 시절 세계 무대에 오르며 국민에게 큰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유명한 스포츠 스타 사이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 최초 수식어를 얻은 사람이 있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도 한국인 최초 '뚜르 드 프랑스'를 완주한 고 이윤혁 씨다. 뚜르 드 프랑스는 세계 최고 자전거 대회로 3500km를 달려야 해 '악마의 코스'라고도 불린다.


이윤혁 씨는 아마추어 보디빌더이자 체육 교사를 꿈꾸던 26살 청년이었다. 어느 날 희귀암 선고를 받고 2년 넘게 대수술과 항암치료를 받는다. 그러다 돌연 항암 치료를 그만두고 뚜르 드 프랑스를 완주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의사, 가족, 친구 모두가 반대했지만 전 세계 사이클리스트들의 꿈의 무대에 서기 위해 출전했다. 라이딩 파트너, 팀 닥터, 현지 코디네이터 등으로 팀을 꾸려 출전했다. 경주 중 고통이 찾아와 쉴 때마다 링거를 맞으면서 버텼고 결국 그는 완주에 성공했다. 이윤혁씨는 귀국 후 1년 동안 항암치료를 받다 2010년 세상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출처: 네이버 영화 캡처, SBS entertainment 유튜브 캡처
뚜르 드 프랑스 완주한 이윤혁씨(좌), 디올 최초의 한국인 디자이너 임세아씨(우)

◇백댄서에서 디올 최초 한국인 디자이너로


제77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샤를리즈 테론, 제니퍼 애니스톤, 다코타 패닝의 드레스를 디자인한 한국인이 있다. 디올의 첫 한국인 디자이너 임세아씨다. 임씨는 디올 소속 모델리스트 즉 패턴 디자이너다. 디자이너가 스케치한 디자인을 실제 옷으로 구현하는 일을 한다.


임세아씨가 패션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 건 2005년이었다. 전공으로 배운 불어 하나 믿고 떠나 패턴 디자이너 양성 학교 AICP에 지원했다. 합격 후 디자이너로서 실력과 소양을 쌓았다. 졸업 후 2008년 디올 어시스턴트 모델리스트로 디자인 세계에 정식으로 발을 디뎠다. 이후 오트쿠튀르, 셀린느, QELA 등을 거쳐 다시 디올 패턴 디자이너로 자리 잡았다. 


디자이너를 꿈꾸기 전 그의 독특한 이력도 눈에 띈다. 임씨는 신화, 싸이, DJ DOC와 함께 무대에 올랐던 백댄서였다. 왕성히 활동 중 발목 부상을 당해 더 이상 댄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춤 말고 다른 길을 찾은 것이 디자인이었다. 이브 생로랑 같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꿈을 다시 키웠다고 한다.

출처: 조선DB, KBS역사저널 그날 유튜브 캡처
WHO 전 사무총장 이종욱 박사

◇"의사라는 직업은 높은 급여, 명예를 당연시해선 안 돼"


예체능뿐 아니라 국제 사회 리더로서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역량을 펼친 한국인도 많다. 유엔 전 사무총장 반기문, 국제형사재판소(ICC) 전 소장 송상현, WHO 전 사무총장 이종욱 등이 있다.


그중 '아시아의 슈바이처', '백신의 황제'로 불렸던 이종욱 WHO 전 사무총장은 한국인 최초로 국제기구 수장을 맡았다. 그는 원래 건축공학도였지만 전공에 흥미를 찾지 못해 27살 서울대 의대에 재입학했다. 경기도 안양 '성 라자로 마을'에서 모두가 꺼리는 한센병 환자를 돌봤다. 졸업 후에는 하와이로 건너가 한센병을 더 공부하기도 했다.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지도교수는 이종욱에게 강의를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의사라는 직업은 높은 급여, 명예를 당연시해선 안 돼. 환자를 위해 자기 몸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의사"라는 말을 남기고 남태평양 사모아로 떠났다. 1981년부터 오지에서 봉사하며 살던 그는 1983년 WHO에서 한센병 자문관으로 일했다. 1995년에는 백신 국장으로 소아마비 발생률을 1만명당 1명 이하로 떨어뜨리기도 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헌신한 그는 2003년 7월 WHO 사무총장으로 선정됐다. 취임 후 전염병 발생 시 30분 만에 관계자들과 WHO 지부가 모여 전염병에 대응할 수 있는 '전염병 대응 전략센터'를 만들었다. 2009년 신종플루, 2015년 메르스가 퍼졌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국제기구 사무총장은 국가원수급 예우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쓰는 돈은 가난한 나라 분담금도 있다. 그 돈으로 호강할 수 없다"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 1500cc 하이브리드 승용차를 몰고 1년 중 150일 출장을 가고 30만km를 비행했지만 항상 이등석을 고집했다.


항상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올바른 장소에서 해야 하며, 올바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라고 외치던 그는 2006년 5월 집무 도중 뇌출혈로 쓰러졌다. 뇌 혈전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글 jobsN 이승아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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