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4개월 때부터 듣지 못하지만..이렇게 춤 잘 춰요

조회수 2020. 9. 24. 10: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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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들리지 않아도 춤을 추는 저는 발레리나입니다
청각장애 발레리나 고아라
장애를 딛고 무용수로 활발히 활동
평창패럴림픽 폐막식 무대 서기도
최근 장애인문화예술대상 수상해

지난 11월 4일 문화체육관광부가 ‘제14회 대한민국 장애인문화예술대상’ 수상자 6명을 선정, 발표했다. 장애인문화예술대상은 장애라는 신체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활발한 문화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는 장애 예술인을 선정해 그들의 공로를 기리고 장애인의 사회참여 확대와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상이다. 올해의 대통령 표창(대상)은 청각장애 발레리나 고아라(31)씨에게 돌아갔다.

출처: 본인 제공
고아라 씨.

◇ 생후 4개월 때 고열로 ‘감각 신경성 난청’ 얻어


고아라씨는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심한 고열과 몸살을 앓았다. 그때의 후유증으로 청력을 거의 잃고 청각장애의 일종인 ‘감각 신경성 난청’ 진단을 받았다. 고씨의 어머니 김윤주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고씨를 위해서라도 다시 일어서야 했다. 김씨는 고씨가 비장애인들과도 같이 어울려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해 상대의 입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구화(口話)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고씨는 강원도 홍천에 살고 있었지만 서울에 있는 구화학교를 다니기 위해 평일에는 서울, 주말에는 홍천 생활을 반복했다.


“제가 청력을 잃고 나서 어머니께서 당시 우리나라에서 청각장애 아동들을 대상으로 구화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학교를 알아내셨어요. 제가 그때 3살이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서울에 가서 구화를 배우고 주말에는 다시 홍천으로 돌아오고 이 생활을 4년 동안 반복했죠.”


고씨는 그렇게 3살 때부터 7살 때까지 4년간 서울과 홍천을 왔다 갔다 하며 구화를 배웠다. 현재 고씨는 오른쪽 귀로는 아예 들을 수 없다. 왼쪽 귀는 보청기를 착용해야만 들을 수 있다. 보청기를 빼고 맨 귀로는 비행기 소리를 겨우 들을 수 있는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씨는 비장애인과 큰 문제 없이 대화를 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배워왔던 구화 덕분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고씨의 노력도 있었지만, 그 뒤에는 고씨의 어머니 김씨의 헌신이 있었다. 김씨는 4년간 고씨의 구화 수업에 매번 참관했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그날 배운 것을 집에서 다시 가르쳤다. “저희 어머니는 매번 수업에 참관하셨어요. 학교에서 가르쳐주면 어머니도 그대로 배워 집에서 절 다시 가르치신 거죠. 한번은 어머니가 긴 막대기를 제 입에 넣으신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반사적으로 캑캑거렸는데 거기서 저한테 ‘ㅋ’ 발음을 가르쳐주셨어요.”


◇ 무용으로 세상과 소통해


고씨는 7살 때 다시 홍천으로 돌아와 유치원에 들어갔다. 유치원을 다니면서 시작한 건 발레였다. 고씨는 발레에 흥미를 보였고 초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발레를 계속했다. “제가 다양한 걸 경험해보라고 어머니는 저를 여러 학원에 보내셨어요. 그중 제가 가장 흥미를 보였던 게 발레였죠. 사실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수어가 몸짓이듯이 무용도 하나의 몸짓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무용을 좋아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중학생이 되면서 고씨는 취미로 하던 발레를 전공으로 바꿨다. 그러나 고씨가 살던 홍천에서 발레를 계속 배우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15살 때부터 고씨는 서울로 레슨을 다니기 시작했다. 평일에는 홍천에서 학교를 다니고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에는 레슨을 받으러 혼자 서울로 떠났다. 그렇게 고씨는 서울 강서구에 있는 덕원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출처: 본인 제공
고아라 씨.

그러나 농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를 다닌 고씨의 학교생활은 쉽지만은 않았다. 구화를 배웠기에 말하는 법은 알지만 듣는 법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화로 선생님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처음에 몇 마디를 알아듣다가도 잠깐이라도 놓치게 되면 나머지 내용을 전부 놓치기 십상이었다.


소리 때문에 발레를 하는 데 어려움도 많았다. 음악에 맞춰 연기해야 하는 발레 특성상 음악을 듣지 않고 춤을 춘다는 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씨는 무대에 서기 위해 음악 프로그램을 이용해 음악의 주파수를 확인하며 박자를 익혔다. 또 곡 전체의 악센트와 악센트 간격 그리고 비트까지도 모두 외웠다. 발레리나로서 무대에 서기 위해 보통 사람보다 몇 배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것이다.


“소리 때문에 발레 하면서 힘든 점은 없냐고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사실은 지금도 어려워요. 박자가 정확한 음악 같은 경우엔 제가 연습해서 박자를 맞출 수 있어요. 그런데 느슨한 멜로디 같은 경우엔 박자를 맞추기가 쉽지 않죠. 그런 경우에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거나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의 주파수를 보면서 박자를 익혀요.”

출처: 본인 제공
무대에서의 고아라 씨.

◇ 장애를 딛고 평창 무대에 서기까지


고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경희대학교 무용학과에 입학했다. 동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그러나 대학원을 졸업한 뒤 공백기가 찾아왔다. 가끔 섭외 전화만 올뿐 무대에 서기 힘들었다. 그렇게 고씨는 2년의 공백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2016년, 우연한 기회에 전국장애인체전 무대에 설 기회가 생겼다. 간만에 서는 큰 무대였다. 당시 고씨는 가수 전인권 씨와 합동 무대를 펼쳤다. 전인권 씨의 ‘걱정 말아요 그대’, ‘행진’ 등의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전국장애인체전 후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고씨의 무대를 보고 여기저기서 섭외 연락이 온 것이다. 이를 계기로 고씨는 2년간의 공백기를 깨고 프리랜서 무용수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7살 때 무용을 시작해 무용 외길 인생을 걸어온 고씨는 지금까지 수많은 무대에 섰다. 그런 그에게도 잊을 수 없는 공연이 하나 있다. 바로 2018 평창동계패럴림픽 폐막식 공연이다. 고씨는 지난 2018년 평창에서 열렸던 동계패럴림픽 폐막식에서 ‘우리가 세상을 움직이게 한다’(We Move the World)라는 제목의 공연을 펼쳤다. 첼레스타, 바순 2중주에 맞춰 꽃이 움트는 과정을 독무로 표현해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아무래도 평창동계패럴림픽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평창 무대만큼은 오로지 저를 위한 무대였기 때문이에요. 저만을 위한 의상, 저만을 위한 음악, 저만을 위한 안무, 저만을 위한 무대 등 하나부터 열까지가 저를 위한 거였죠. 그때만큼은 제가 가진 감정에 충실해서 무대를 꾸몄던 것 같아요. ”

출처: 유튜브 'SBS 뉴스' 채널 캡처
평창 2018 패럴림픽 폐회식 때의 고아라 씨.

어렸을 때부터 발레를 한만큼 많은 무대에 서봤지만, 무대에 설 때마다 긴장되는 건 고씨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평창 무대만큼은 긴장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무대가 끝난 뒤 마지막 포즈를 하며 고씨는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청각장애 발레리나로서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고씨가 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무대에 선다는 건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무섭기도 해요. 그런데 평창 무대만큼은 너무 설렜어요. 제가 그 큰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고요. 마지막 포즈가 두 손을 꽉 잡는 동작이었는데 그 포즈를 취한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그래서 무대 끝나고 내려와서 펑펑 울었죠.”


◇ 춤을 통해 장애, 비장애인의 벽 허물고 싶어


지난달 고씨는 제14회 대한민국 장애인문화예술대상에서 대통령 표창(대상)을 받았다. 청각장애를 딛고 무용수와 안무가로 활발히 활동하며 장애 예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대상을 받게 돼서 기쁘고 영광이에요. 그런데 기쁜 것도 그때뿐이지 지나고 나니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앞으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어요. 더 열심히 해야죠.”

출처: 본인 제공
장애인문화예술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고아라 씨.

대상 소감에 맞게 고씨는 현재도 활발한 공연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얼마 전에는 특별한 공연을 끝마쳤다. ‘Mono, Stereo, Surround’라는 제목으로 고씨가 생애 처음으로 섭외부터 안무, 기획까지 모든 걸 맡은 공연이다. 이전까진 섭외를 받는 입장이었지만 이번에는 섭외를 하는 입장이 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연을 기획하는 만큼 이번 공연은 고씨에게 의미 있는 공연이라 했다.


“이번 공연에는 무용수가 아닌 연기를 하는 친구도 일부러 한 명 섭외했어요. 그 이유는 아무리 같은 무대에 섰다고 해도 각자 하나의 인격체기에 서로 다른 부분이 많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름을 인정하고 소통하는 무대를 만들고 싶었어요. 연기하는 친구라 춤을 잘 추지는 못하더라도 같은 동작을 하며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출처: 본인 제공
'Mono, Stereo, Surround' 공연.

고씨는 자신의 춤을 통해 예술에서의 장애인·비장애인 간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 싶다고 했다. “저는 예술이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 춤을 통해 장애인·비장애인을 구분짓지 않게 만들고 싶어요.” 이어 고씨에게 앞으로의 목표를 묻자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처럼만 꾸준히 잘하고 싶어요. 그리고 나중에 제가 좀 더 여유가 생기면 제가 가진 여유를 나눠주는 삶을 살고 싶어요.”


글 jobsN 장유하 인턴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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