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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달라는 그릇가게 사장님, 3000만원 찍게 해드렸죠

조회수 2020. 9. 24. 11: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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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주이소" 그릇가게 사장님의 이 말이 내 인생을 바꿨습니다
브랜드 비주얼 컨설팅 ‘위박스브랜딩’ 이랑주 대표
2000여곳 골목상권 디자인 바꿔 매출 10배 늘려
80살까지 100년 넘는 ‘노포’ 브랜드 100곳 만들고파
교수님, 한 번만 살려주이소.

2005년 울산 혼수 전문시장. 시장 상인을 대상으로 제품 진열이 매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강의를 마치고 나서려는 그의 손을 잡고 한 그릇 가게 사장이 도움을 청했다. 장사가 잘 안 된다며 조언을 해달라 부탁했다. 백화점 비주얼 머천다이저(VMD·Visual Merchandiser)인 그는 상인의 간절한 부탁에 가게를 찾았다. 혼수가 진열돼 있어야 할 메인 진열장엔 컵이 있었다. 제법 규모가 큰 점포인데도 하루 매출이 3만~10만원에 불과했다.


주말에 짬을 내 서울에서 울산까지 내려가 8시간 동안 가게 진열 구조를 손봤다. 상담은 전화로도 이어졌다. 일주일 뒤에 사장한테 연락이 왔다. 25만원 짜리 혼수 세트 4개와 컵을 팔아 하루 매출 110만원을 냈다는 소식이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주고받으며 컨설팅을 이어갔고, 월 매출은 3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10배 뛰었다.

출처: jobsN
이랑주(47) 위박스브랜딩 대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랑주(47) 위박스브랜딩 대표다. 1993년 이랜드에서 일을 시작한 27년 차 베테랑 VMD다. 현대·롯데백화점에서 경력을 쌓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전통시장 점포 2000여곳을 손봤다. 이 대표에게 비주얼 머천다이저의 일에 관해 물었다.


-비주얼 머천다이저는 어떤 직업인가.


“좋은 물건을 더 좋아 보이게 만든다. 브랜드나 점포의 콘셉트에 맞게 매장을 꾸미고 제품을 진열하는 기획 전문가다. VMD가 짠 전략을 바탕으로 진열·연출·스타일링을 한다. 백화점 소속이 많지만, 의류회사에서 일하거나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이들도 많다.”


-이 일을 시작한 계기는.


“대학생 때 우연히 백화점 MD의 특강을 들었다. 비주얼 머천다이저가 있다는 이야기만 얼핏 들었다. 언니가 서울에서 직장을 다녀서 여름방학 때 놀러왔는데, 방학 끝나고 내려갈 때 보니 백화점 쇼윈도가 가을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굴까, 어떻게 뽑을까 그때부터 찾아봤다. 졸업하고 나서 이 분야 일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수요가 많지 않았고,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곳도 없었다. 1993년 이랜드에 계약직으로 취직해 코디네이터로 일했다. 기획안을 바탕으로 연출하는 직무였다. 언젠가는 기획도 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울산에 새로 여는 지점이 있어서 출장을 갔는데, 맞은편 현대백화점에서 VMD를 모집한다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백화점 휴무일이었는데, 무작정 총무팀을 찾아가 그 자리에서 30분 만에 원서를 썼다. 최종 합격해서 VMD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출처: 조선DB
전국 전통시장을 돌며 수년간 소상공인을 도운 이 대표.

-지금까지 어떤 활동을 했나.


“2006년까지 12년간 백화점에서 일했다. 199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VMD 불모지였다. 외국 백화점의 형태를 베껴서 문을 여는 시절이었다. 1995년 현대백화점 부산점 오픈팀으로 들어갔다. 보통 백화점 하나를 여는 데 6000억~7000억원이 들어간다. 1년 안에 그만큼의 매출을 올려야 한다. 그런데 매출이 안 나와서 비상이 걸렸다. 독일 전문가를 섭외했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통을 들고 다니며 매장을 체크하더라. 뭘 하냐 물었더니 ‘빛을 채집한다’고 했다. 신세계였다.


조명만 바꿨더니 꽃등심의 마블링과 은갈치의 때깔이 살아났다. 매출이 눈에 띄게 오르면서 백화점 차원에서 비주얼 전략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같은 제품을 비싸게 팔아도 백화점을 찾은 고객들은 지갑을 열었다. 2000년대 초반은 백화점 호황기였다. 나 또한 현장에서 부딪혀가며 빛·동선·색 대비 등에 관해 배우고 실무 경험을 쌓았다.


울산에서 강의하다 그릇 가게 사장님을 만난 날 인생이 바뀌었다. VMD가 백화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가게를 운영하는 소상공인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06년 사표를 쓰고 전통시장을 돌아다니며 소상공인을 만났다. 상인들이 무료로 상담을 받을 수 있게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달라고 중소기업청에 지원했고, 제안이 성사되면서 컨설팅을 이어갔다. 일반 기업에 강연도 다녔다.”


-마트나 백화점에 숨어 있는 VMD 전략이 궁금하다.


“고객의 행동에는 패턴이 있다. 백화점 입구에 들어온 고객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제품 배치 전략이 달라진다. 보통 마트에서는 왼손으로 카트를 끌면서 오른손으로 물건을 집어 담는다. 자연스럽게 역 시계 방향으로 돈다. 이런 행동 방식에 맞춰 상품을 진열한다. 일부 시장은 시계방향으로 움직이게 동선이 짜여 있는데, 이런 부분을 바꾼다.


백화점에서 고객이 옷을 입어보는 공간은 조명 값이 3500K(켈빈)로 일정하다. 여자의 피부가 가장 좋아 보이는 빛이다. 일상에서 접하는 흰색 광(4000~5000K)을 쓰면 잡티, 모공이나 주근깨가 잘 보인다. 그러니 은은한 조명을 쓰는 거다. 또 조명을 위에서 똑바로 비추면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 각도를 조정해 비스듬하게 비춰 얼굴 전체가 고루 잘 보이게 한다.”

jobsN

-한 매장을 컨설팅하는 데 얼마나 걸리나.


“브랜딩부터 시작해 제품 진열까지 하려면 3~6개월 정도 걸린다. 브랜드 색이나 슬로건 등이 나오면 인테리어와 진열 등 공간 기획을 시작한다.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에서 매장 오픈만 한다면 일주일에서 보름이면 된다.”


-컨설팅에 실패한 적도 있나.


“전통시장 컨설팅 초창기엔 많이 실패했다. 백화점과 전통시장의 판매 형태가 다르다는 점을 간과해 시행착오를 겪었다. 직접 물건을 골라서 내주는 소상공인의 습관을 바꾸는 것도 힘들었다. 나 역시 백화점에서 오래 일한 탓에 물건을 깔끔하고 예쁘게만 놓으려 했다. 여러 점포를 거치면서 전통시장 특성에 맞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러면서 실패 확률이 점점 줄었다.”


-일의 장단점을 알려달라.


“하루하루가 늘 새롭다. 남보다 한 계절 먼저 시즌을 준비하는 것도 흥미롭다. 트렌드를 파악해 어떤 제품이 잘 팔릴지 고민하고 배치하는데, 그 물건이 완판됐을 때는 희열을 느낀다. 또 내 지식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다.


몸과 머리를 동시에 써야 한다는 점은 힘들다. 머릿속에 그린 그림이 나올 때까지 현장에서 직원들과 부딪혀가며 일해야 한다. 체력 관리를 위해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스트레칭하고, 밥 먹고 운동한다. 자동차에 등산화를 싣고 다니면서 지방 출장 때 그 지역에 있는 산을 오른다. VMD의 실력은 체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jobsN

-이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이나 조건이 있다면.


“기획·브랜딩·마케팅·디자인·광고를 두루 알아야 한다. 디자인 전공자가 상대적으로 유리하겠지만, 필수 조건은 아니다. 평소 어떤 상점에 갈 때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도전하면 좋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불편을 해결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 기술은 둘째다.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되 본질을 꿰뚫어 볼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오래 갈 수 있다. VMD는 화려한 직업으로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불편과 아픔에 공감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절대 쉽지만은 않다. 나 또한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많다.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계적인 한국인 디자이너는 있지만, 비주얼 머천다이저는 없다. 앞으로 후배들 가운데 세계에서 활약하는 VMD가 나왔으면 좋겠다.”


-벌이는 얼마나 되나.


“기업체 소속으로 일하면 일반 회사원 수준의 연봉을 받는다. 경력을 쌓아 프리랜서로 일하면 연차에 따라 국가 지정 컨설팅료가 달라진다. 10년 이상 일하면 한 회당 30만원 정도 받는다. 사기업 상대로 컨설팅을 하면 기업 규모와 협의에 따라 보수가 달라지는데, 대기업은 한 시간에 100만원을 받는 경우도 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2022년에는 트럭을 개조해서 전 세계를 다니며 소상공인을 돕고 싶다. 노포에 관심이 많은데, 우리나라엔 100년 넘은 오래된 가게가 많지 않다. 주변에 노포가 늘면 이제 막 창업한 청년들도 상권에 뿌리를 내리기 상대적으로 쉽다. 신생 점포와 노포가 공존하는 골목을 만들고 싶다. 죽기 전까지 ‘100년 가는 브랜드’ 100개를 만드는 게 목표다. 적어도 80살까지는 이 일을 하고 싶다.”


글 jobsN 송영조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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