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졸업→에디터→수능→동국대 한의학과..현재는?

조회수 2020. 9. 24. 13:3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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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가 된 패션지 에디터
최혜미 달과궁한의원 원장

서울대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W》 에디터로 활동하다 돌연 그만뒀다. 7개월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늦깎이 수능 공부를 시작했다. 한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지만 돌아갈 곳도 없었다. 스물아홉,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동국대 한의학과에 입학했다. 여성들의 건강한 삶을 응원하는 책 《서른다섯, 내 몸부터 챙깁시다》를 발간한 최혜미 달과궁한의원장의 이야기다.

타인의 성취는 단편적이다. 벽돌 하나하나를 쌓는 과정보다 완성된 탑을 보기 쉽다. 그러나 벽돌을 쌓은 당사자에겐 수백, 수천 개의 단편이다. 도전하고 좌절하는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하지만 타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탑을 쌓는 당사자는 긴 시간을 견딘다. 그러다 하나의 장편이 되는 시점에 깨닫는다. 탑을 쌓은 만큼 나 또한 단단해졌음을.


최혜미 원장도, 이야기도 장편에 가까워져간다. 그의 단편들 하나하나 치열하지 않은 게 없었다. 그는 대학에서 의류학을 전공하고 《W》 피처 에디터로 입사했다. 에디터는 충분히 멋지고 즐거운 일이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전문가들이 북적이는 세계였다. 시즌별로 유행하는 아이템을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특권도 주어졌다. 지독한 마감 기간과 밤샘 작업도 얼마든지 견디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글을 쓰는 일이 즐거웠다. 패션화보 촬영 등을 주로 담당하는 비주얼 에디터와 달리, 피처 에디터는 사람을 만나고 글을 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즐거움보다 걱정이 커져갔다. 계속 잘할 수 있을지, 내 가치가 퇴색되진 않을지. 패션계에는 쟁쟁한 선배들도 많지만 젊고 감각적인 사람이 넘쳐났다. 종종 박탈감도 들었다. 분명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아직 기회가 있다”, 서른 살을 2년 앞두고 마음먹었다. 한의대에 가기로. 어찌 보면 에디터와는 상반된 일이었다. 2008년 4월 동료들의 만류를 뒤로하고 퇴사를 선언했다.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한 동료들은 “한의사가 되면 마르지엘라 가운을 구해줄게”라며 격려를 보내왔다.


마르지엘라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디자이너다. 벨기에 출신으로 1980~90년대 왕성하게 활동했으며 은퇴한 지금까지도 얼굴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마르지엘라는 브랜드를 드러내는 것조차 선호하지 않아 의상에는 로고도 없다. 브랜드를 상징하는 건 스태프가 입는 하얀 가운이다. 디자인이 통념적인 아름다움보다 전위적·해체적 철학을 반영하는 연구·실험에 가깝다는 의미였다.


스물아홉, 한의대 새내기 되다

한의대에 입학하려면 수능부터 봐야 했다. 공부는 자신 있었다. 그런데 어찌 입시학원에서 꼴찌를 면치 못했다. 이쯤이면 성적이 나올 때가 됐는데 말이다. 결국 학원 선생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년을 기약하자고. 굴욕적이지만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게 원동력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7개월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결국 그해 합격증을 손에 쥐었다.


스물아홉, 동국대 한의학과 새내기가 됐다. 아홉 살 차이 나는 동기들 틈에서 학교 가는 매일이 설레었다. 한의학은 사람을 하나의 우주로 여겼다. 병의 원인과 처방도 전일적 관점에서 접근했다. 과학적으로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조차 매력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최 원장을 매료시킨 건 부인과 수업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성장 환경이 만든 결과였다.

“언니가 세 명이에요. 의류학과를 다닐 때나 에디터를 할 때도 여자들 틈에서 북적이며 살았어요. 월경통, 자궁질환 등 여성에게 일어나는 이벤트가 일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진 것 같아요. 한의학을 공부하면서 여성들이 왜 아프고 불편한지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당사자들은 정작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답답했어요.”


부인과 수업에서는 서른다섯을 강조했다. 서른다섯이 여성에게 큰 변곡점이기 때문인데 한방·양방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35세가 넘으면 30세 이전보다 유산·조산 위험이 두 배가량 증가하고 기형아 출산율은 아홉 배나 높아진다. 35세 이상 여성에게 자궁근종이 발견되는 경우도 40~50%에 달한다. 서른다섯이 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듯이.


마르지엘라를 입은 한의사

서른다섯, 한의대를 졸업하니 마음속에 무언가가 꿈틀댔다. 에디터와 한의사의 DNA가 모두 반응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그래, 한방 관련 글을 써보자”. 그는 더 많은 여성이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건강하길 원했다. 그렇게 ‘요즘 여자 건강백서, 달과궁 프로젝트’가 ‘브런치’를 통해 시작됐다. 독자들이 조금이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소한 그림도 덧붙였다. 지나고 보면 모든 과정이 자양분이 되듯, 과거 에디터 생활을 하며 글쓰기 근육을 단련한 게 활자 하나하나를 연결하는 힘이 됐다.


여성의 건강은 어떠한 것이라도 다뤘다. 가령 월경전증후군이나 월경통으로 힘들어하는 여성을 위해 증상과 대처법을 공유했다. 정상적인 월경혈은 선혈이다. 월경혈이 갈색에 가깝거나 뭉쳐 배출되면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그런데도 ‘원래부터 이랬는 걸’ 하고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여성이 허다하다.


자궁은 여성의 제2심장이다. 심장처럼 순환이 원활하고 혈액 공급이 잘 이뤄져야 건강한 장기라 할 수 있다. 하복부를 따뜻하게만 유지해도 순환이 잘된다. 한방에서 아랫배는 인체의 양기가 모이는 곳이다. 또 진부한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최 원장은 많이 걷길 권한다. 하체를 많이 움직일수록 골반의 순환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돼서다. 특히 여성이 임신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유지, 출산하는 과정에 모두 좋다.


“여성들이 스스로의 몸을 알고, 사랑하고, 행복하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건강해야죠. 특히 서른다섯을 기점으로 더 관심을 가지면 좋겠어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니 그 전에 임신하란 뜻이 아니에요. 적어도 내 몸이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하니까, 좀 더 돌보길 바라는 거죠. 내 몸이니까.”


이 밖에도 최 원장은 월경, 임신, 난임, 건강법 등을 동네 언니처럼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렇게 쌓인 연재물을 엮어 최근 《서른다섯, 내 몸부터 챙깁시다》로 발간했다. 패션지 에디터, 한의사에 이어 작가 타이틀까지 얻은 그는 이 책에 일과 육아를 하면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이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최혜미 원장은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과거 동료들이 약속한 마르지엘라 가운은 아직 구하지 못했지만, 그의 평범한 가운이 어느 명품 못지않게 값져 보인다. 만성에 젖지 않고 치열한 삶 속에서 쌓은 탑이 보이기에.


글 jobsN 선수현
사진 jobsN 서경리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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