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교수하던 제가 이걸 만들 줄은 상상 못했죠

조회수 2020. 9. 24. 14:14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미국서 대학교수 하던 제가 이걸 만들어야 했습니다"
여성을 위한 제품 만드는 세이브앤코 박지원 대표
동서양 성 인식 차이 느끼고 관심 갖게 돼
여성의 성에 대한 편견 뒤집고싶어

한국 사회에서 성, 특히 여성의 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여성이 성생활에 대해 드러내놓고 말하면 ‘밝힌다’, ‘헤프다’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이런 한국 사회 풍조에서 여성의 성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뒤집겠다는 섹슈얼 웰니스(Sexual Wellness·성적 건강) 브랜드가 나왔다. 박지원(34) 미국 텍사스대학교 오스틴캠퍼스 디자인 대학 조교수가 창업한 세이브앤코다. 여성의 성에 대한 편견을 뒤집겠다는 목표로 이름을 편견(BIAS)을 거꾸로 한 세이브(SAIB)로 지었다. 세이브앤코는 현재 여성을 위한 콘돔을 만들고 있다.

출처: 세이브앤코 제공
세이브앤코 박지원 대표.

박 대표는 교수가 되기 전에도 창업했던 경험이 있다. 이화여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후 삼성디자인멤버십에서 만난 동료들과 디자인 전문 회사인 ‘데어즈(DAREZ)’를 공동 창업했다. 공산품을 절반으로 나눈 제품을 생산해 구매자가 나머지 절반 가격은 기부하는 비영리 사회적 프로젝트 ‘1/2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생산 공정을 다 바꿔야해서 국내 기업에서 퇴짜를 맞았다.


그는 이후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더 공부해보고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에서 석사 학위를 따면서 디자인이 사회에 기여할 방법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졸업 후 텍사스대학에 조교수로 부임했고, 첫 수업에서 현재 사업 아이템인 콘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첫 수업 계기로 콘돔에 관심 두게 돼


박 대표는 부임 후 첫 수업으로 ‘사회적 디자인’ 수업을 맡았다. 해당 수업은 디자인으로 사회의 인식을 개선하는 등 문제 해결 방안을 가르치는 수업이다. 박 교수는 사회적 문제를 찾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디자인 제품을 설치한 뒤 사람들의 반응을 영상으로 찍어오라는 과제를 냈다. 한 여학생이 학교 보건소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콘돔을 모아 금요일 밤 축제 현장에서 ‘Safe Sex Zone’을 만들어 나눠줬고, 사람들이 가져가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왔다. “학생이 발표하는 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했는데, 저 혼자만 당황한 모습이더라고요. 다른 학생들이 진지하게 피드백을 주는 모습을 보고 ‘한국과 미국의 성 문화, 성 인식이 이렇게 다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그는 콘돔에 관심을 갖고,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특히 콘돔 성분을 검색해봤다. “콘돔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더라고요. 화장품도 화학 성분을 검색해보고 구매하고, 유기농 음식을 찾아 먹는 등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잖아요. 하지만 콘돔에 대해서는 알아볼 생각조차 안 했던 거에요. 이후 기성 콘돔에 건강에 유해한 성분이 포함됐다는 걸 알게 됐고, 정보조차 공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유해한 성분을 배제한 콘돔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사업을 시작한 직접적인 계기도 있다. 안식년이었던 2017년 한국에서 가진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국내 화장품 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레드오션이 된 K뷰티의 타개책으로 누군가 일본의 ‘수치 화장품’을 제안했다. “‘여성에게 수치심을 안겨, 기존에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던 필요성을 인지시켜 새로운 시장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일본에서 이를테면 여성 생식기 염색제나 미백제처럼 여성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화장품이 유행이라고 예를 들면서요. 여성 화장품을 판다는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게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박 교수는 그 자리에서 4년 전 찾아본 콘돔 성분 결과를 떠올렸다. “여성에게 진짜 필요한 건 ‘유해 성분 제로 콘돔’처럼 진짜 여성의 몸에 유익한 제품이다”라고 한 마디 건넨 후 자리를 떠났다.


몇 달 뒤 함께 자리에 있었던 데어즈의 공동창업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콘돔 회사를 차릴 테니 디자인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박 대표는 제품 디자인 시안을 보내준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몇 달 뒤, 공동창업자는 다시 “이 브랜드는 네가 아니면 못 할 것 같으니 아예 회사를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2018년 세이브앤코를 창업했다.


◇남성 위주 콘돔 시장에서 여성을 위한 콘돔 선보여


세이브앤코가 여성을 위한 콘돔을 만든 이유는 기존 콘돔 시장이 남성 위주로 형성돼 여성의 건강을 배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콘돔 시장 자체가 남성 위주로 형성돼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성의 쾌락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정 지연을 위해 일부 콘돔에 마취제 성분, 살정제 성분이 포함돼 있었어요. 건강에 유해하지만 공론화되지 않았던 부분이죠. 저희는 그런 성분을 배제하고, 생물학적 안정성 테스트를 거쳐 유해하지 않은 콘돔을 만들었습니다.”

출처: 세이브앤코 제공
세이브앤코 제품의 특징,

세이브앤코는 동물성 원료를 배제하고, 천연 라텍스를 사용해 콘돔을 만들었다. 유해 성분도 배제했다. 고무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2급 발암물질인 니트로사민이나 사정을 지연시키기 위한 마취성분인 벤조카인 등이다. 이 외에도 발암물질인 파라벤, 살정제인 노녹시놀-9 등 유해물질과 인공 색소 등 불필요한 화학 첨가물을 뺐다. 생산 과정에서는 불량률을 낮추기 위해 전기 검사, 풍량·풍압 검사, 정량 검사, 5종 균 검사를 한다.


◇3대 디자인 어워드에서 디자인 우수성 인정받아


박 대표는 디자인을 통해 콘돔에 대한 인식을 바꿔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콘돔 시장에 관심을 두고 찾아보니까, 한국이 콘돔 사용률이 굉장히 낮더라고요. OECD 국가 중에서 콘돔 사용률이 최저 수준이고, 성관계 경험이 있는 여성 중 절반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어요. 저도 30살 이전까지 내가 사서 써야지 하는 생각을 못 했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제품 만들어서 판매와 동시에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보자고 결심했죠. 그런 측면에서 디자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 세이브앤코는 제품만큼이나 디자인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2018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iF 디자인 어워드 2019’, ‘IDEA 디자인 어워드’ 등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하며 디자인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박 대표는 디자인할 때 단순히 ‘제품 포장’으로 한정짓지 않고, 사용자들이 제품으로 어떤 경험을 하는지까지 확장해서 생각한다고 했다. 매장에서 제품을 어떻게 진열하고, 고객이 사용할 땐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고려한다는 의미다.


“디자인하면서 콘돔이라는 제품이 가지고 있는 껄끄러운 인식을 없애고 싶었습니다. 제가 콘돔에 관심을 갖고 나서 보니까 콘돔을 사는 과정이 쉽지 않더라고요. 여자 혼자 편의점에 가서 제품을 집어 들고, 계산하고, 제품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모든 과정이 어색하고 불편했습니다. 제품 특성상 그런 것도 있었지만, 기존 제품이 남성 고객을 대상으로 디자인돼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브랜드 이름이나 패키지 등 모든 것들이 남성을 자극하는 문구들이었거든요. 그런 부분을 없애고, 여성이 구매하고 소지하는 데 이질감이 없도록 만들고자 했습니다.”


◇제품 특성 고려해 틴케이스에 제작


세이브앤코는 디자인과 함께 콘돔의 특성을 고려해 상자가 아닌 틴케이스를 외부 포장재로 택했다. “‘지갑에 콘돔을 넣고 다니는 사람이 매너남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콘돔을 지갑에 소지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사실 콘돔이 얇고 민감한 소재여서 올바르게 보관하는 게 중요해요. 작은 마찰, 압력에도 손상을 입어 피임 기능을 상실할 수 있거든요. 저희는 미적인 부분도 고려하면서, 콘돔을 더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틴케이스 소재를 사용했습니다.”


세이브앤코 콘돔은 현재 세븐일레븐, 랄라블라, 롭스, 삐에로쇼핑 등에 입점해있고, 곧 자주(JAJU)에도 입점 예정이다. 공식 홈페이지와 서울스토어, 텐바이텐 등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세이브앤코 콘돔을 구매할 수 있지만, 미리 사서 쟁여놓지 않고 필요할 때 구매하는 제품이라는 특성상 편의점, 헬스&뷰티(H&B) 스토어를 통해 구매하는 이들이 많다.


세이브앤코는 이 외에도 오프라인 행사에 참여해 소비자들을 만나고 있다. 콘돔이 의료기기법의 제재를 받는 의료기기이며, 온라인 포털사에서는 ‘성인용품’으로 분류돼 광고 등 제품 프로모션을 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대신 오프라인 공간에서 캠페인을 통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2019년에는 5월 월경박람회, 6월 페스티벌 킥 등에 참여했다. 콘돔이라는 제품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파우치, 팔찌 같은 굿즈를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캠페인 상품의 판매 수익은 전액 여성 관련 단체에 기부한다.

출처: 세이브앤코 제공
세이브앤코 콘돔과 캠페인 제품들.

◇사회적 편견이 사업의 가장 큰 걸림돌


박지원 대표는 사업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으로 사회적 편견을 꼽았다. 콘돔을 만든다는 이유로 박 대표와 세이브앤코를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기존 콘돔 시장도 그렇고 성인용품 시장이 남성 위주로 형성돼 있어요. 남성 위주 시장에 여자가, 여성주의 브랜드를 런칭해서 운영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부정적으로 보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아요. 꿋꿋하게 버티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버티면서 여성의 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편견을 바꿔 나가는 게 세이브앤코의 역할이자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세이브앤코는 브랜드 이름에서부터 목표를 분명히 했다. 사회에 만연한 여성의 성에 대한 편견을 뒤집겠다는 것이다. “전반적인 여성 문제가 그렇지만, 특히 여성의 성에 대해 너무 터부시해 왔다고 생각해요. 성을 얘기하는 것에 대해 편견으로 바라보는 인식을 개선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직관적으로 편견을 의미하는 영단어인 bias를 뒤집어서 짓기도 했어요. 앞으로 사회가 여성의 성에 대해 더 관심 가질 수 있도록 건강한 성 문화를 만들어나갔으면 합니다.”


이어 그는 세이브앤코를 통해 섹슈얼 웰니스(성적 건강) 브랜드로 자리 잡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를 위해 콘돔 외에도 건강하고 여성 친화적인 신제품 개발을 진행 중이고, 브랜드 취지에 공감하는 여성 전문 인력을 채용하고 있다. “건강하고 좋은 성분의 제품을 만들어서 여성의 성적 건강에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내고 싶습니다.”


글 jobsN 박아름 인턴
jobarajob@naver.com
잡스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