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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먼저 돈 모으자고 할 줄은 상상도 못했죠"

조회수 2020. 9. 24. 14: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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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 외면해야할 과거가 아니라 마주해야할 진실입니다"
위안부 피해자의 삶 그려온 김금숙 만화가
이옥선 할머니 일생 담은 만화 ‘풀’ 일본 출간 예정
개인과 사회 담은 만화 계속 그려나가고 싶어

“만화 ‘풀’은 일본군 성 노예 피해자이신 이옥선 할머님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위안부’가 일본에서는 민감하게 다뤄지는 사안이다 보니 ‘풀’을 현지에서 출간할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죠. 그런데 몇몇 일본 시민들은 책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나서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며 삼삼오오 돈을 모았어요. 일본에서 두 차례에 걸쳐 펀딩이 진행된 결과 ‘풀’ 일본어판을 출간하게 됐습니다.”

출처: jobsN
김금숙 작가.

김금숙(48)씨는 희미해져 가는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을 그림으로 선명하게 남기는 만화가다. 2019년 10월 기준, 정부에 등록된 240명의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해 있는 사람은 단 20명. 김씨는 2017년 만화 ‘풀’을 통해 20명의 생존자 가운데 한 분이신 이옥선 할머니의 증언을 화폭에 담았다. 16세에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55년이 지나서야 고국 땅을 밟은 일생을 그려냈다.


한 사람의 입을 빌려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 말하는 ‘풀’은 내년 일본에서도 출간될 예정이다. 몇몇 일본인들은 위안부 소재에 대해 외면하고 싶은 과거라고 여겼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꼭 마주해야만 하는 진실이라고 말했다.

출처: jobsN, 인터파크 캡처
(왼)만화 '풀'의 한 장면, (오) 풀의 표지.

“30년 이상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연구한 한 일본인 시민 운동가는 책을 읽어보더니 혹시 이 책을 일본어로 번역해도 괜찮겠냐고 저한테 물어봤어요. 내용이 좋다면서 일본에서 출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고 하더라고요. 출판하려면 돈이 필요하니 펀딩을 진행했는데 1차 펀딩이 일주일 안에 마감됐어요. 많은 분들이 출간에 관심을 가져 주셨던 거죠. 어둡게 드리워진 한일 관계 속에서도 이런 노력을 보이는 시민들이 있더라고요. 그 수가 많지는 않더라도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미래가 암울하지마는 않구나 깨달았습니다.”


◇역사를 넘어 사회에 대해 말하는 만화가

출처: 여성가족부 유튜브 캡처
만화 '풀'은 이옥선 할머니의 증언을 담고 있다.

김씨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소재로 만화를 그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4년 단편 만화 ‘비밀’에서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록을 10쪽가량 되는 이야기로 풀어냈다. 당시 김씨는 약 4개월간의 ‘비밀’ 작업을 마친 뒤 위안부 피해자들의 일생을 더 깊이 있고 폭넓게 다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만화 ‘풀’을 집필하기 시작해 약 3년 동안 작업에 매진했다.


“’비밀’을 그리면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이 생각들을 책에 다 담아내지 못했다는 게 참 아쉬웠죠. 그래서 작업을 다 마치고 나서 위안부를 소재로 한 다른 작품들을 찾아봤는데 제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다룬 작품은 없었어요. 이후 ‘풀’을 그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출처: jobsN
만화 '풀'의 장면들. 김금숙 작가는 만화를 그릴 때 흑백만을 사용해 독자들이 머릿속에서 자신들만의 색으로 만화를 채워나가게끔 만든다.

김씨는 ‘풀’을 통해서 사람들을 구분 짓는 사회 계급과 계층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일생을 파헤치다 보니 김씨는 이들이 단순 비극적인 역사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사회 계급의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제국주의 역사와 함께 하층민들이 위험에 내몰릴 수밖에 없던 사회 구조도 성 노예 피해자를 낳은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군에 의해서 강제 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갔던 많은 사람들이 하층 계급 집안의 아들과 딸들이었어요. 가진 것 하나 없던 서민들이었죠. 이들 모두가 사회 구조와 계급이 낳은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의 문제와 권리의 문제를 책에 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출처: ytn 유튜브 캡처
만화 '풀'은 프랑스 휴머니티 만화상 특별상을 받았다.

해외 국가들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계급’이란 소재에 공감했다. 그 결과 지난 9월 프랑스 일간지 ‘휴머니티’가 주최한 시상식에서 “이옥선 할머니의 놀라운 삶의 의지와 1940년대 한국사회의 상황이 잘 표현돼 있다”는 평과 함께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영어와 프랑스어·이탈리아어로 번역돼 해외에서 출간됐고 일본어·아랍어·포르투갈어 등 외국어로도 출간될 예정이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외국 사람들이 읽었을 때 공감할 수 있는 만화를 그리고 싶었어요. 단순히 한국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이자 우리 사회가 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싶었던 거죠.“


◇예술가 꿈 꾸며 프랑스행 택해


그가 처음부터 만화가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김씨는 중학생이었을 당시 미술 선생님이 보여준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보며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세종대 회화과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돈이 많이 들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이상 예술가로 성공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주변 지인들은 부모님께 여자인 김씨를 공부시켜서 뭐하냐며 시집을 보내라고 말했다.


자신을 옥죄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1994년 4월, 교육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돈이 충분하지도 않았고 프랑스어를 공부해본 적도 없었다. 꿈을 이루겠다는 의지 하나만을 가지고 프랑스로 향했다.

출처: 인터파크 캡처
김금숙 작가의 작품들.

“유학 초기엔 몸도 마음도 많이 고생했죠. 아는 사람도 없었고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식으로 떠났어요. 하지만 애초에 이런 것들을 다 감수할 생각으로 떠난 유학이었어요. 의지가 부족하면 꿈이 꺾이니까 의지로 살아남을 거라고 굳게 마음먹었죠. 일단 한번 부딪혀보자는 생각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고등장식미술학교 졸업 후 조각가로 활동하면서 이따금씩 만화 번역 작업을 맡았던 김씨는 ‘현실물’ 장르의 작품을 출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만화계에 등단했다. 히어로물, 로맨스물 등 다양한 만화 장르들 중에서도 우리 주변의 인물과 상황을 사실대로 그려내는 현실적인 만화를 그렸다. 2012년 첫 작품인 ‘아버지의 노래’에서는 부친 인생을 소재로 삼았다. 만화 ‘준이 오빠’와 ‘지슬’에서는 발달 장애인의 일상과 제주 4.3 사태 이후 제주도민의 삶을 각각 그려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포착하기도 했다.


“한평생 순수미술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 소재들 중에서도 어둡고 아픈 이야기에 대해서 그려보고 싶더라고요. 빛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그림자 속에 숨겨져 있고 어둠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는 더 많은 사람들을 독자로 끌어들이려면 재밌고 가벼운 소재로 만화를 그려야되지 않냐고 말해요. 하지만 작품의 첫번째 독자는 나 자신이에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써야겠죠. 그래서 읽고 싶고 그리고 싶은 소재로 만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다음번엔 어머니 일생 그린 만화 그리고 싶어

출처: jobsN
김금숙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자료 조사'다. '풀'을 그릴 때도 이옥선 할머니를 직접 만나뵈어 이야기를 들었다.

현실과 빼닮은 만화를 그리는 만큼 김씨가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자료조사다. 특히 작품의 주인공이 되는 당사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굴을 직접 마주한 채 대화를 나누면서 책에서는 찾지 못했던 부분을 이야기로 메워나간다. 만화 ‘풀’을 그릴 때도 이옥선 할머님을 직접 찾아뵈었다.


“할머님을 찾아뵙기 전에는 마음이 많이 무거웠어요. 아픈 기억을 갖고 계신 분인데 관련 질문을 드리면 실례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뵙게 되니까 편하게 대해주시면서 그때 기억을 차근차근 말씀해주셨어요. 할머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삶에 대한 의지와 긍정적인 힘을 느꼈어요. 이런 식으로 만화를 그릴 때는 당사자를 만나 받았던 느낌을 떠올리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출처: jobsN
김금숙 작가는 다음 작품을 기약하고 있다.

김씨는 최종 목표를 묻는 질문에 또다른 작품을 기약했다. “‘풀’을 작업할 때만 해도 이것만 다 그리고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에너지와 정성을 작품에 쏟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막상 끝내고 나니까 그리고 싶은 소재가 계속 떠오르더라고요. 이번엔 어머니의 일생을 그림으로 담고 싶어요. 예전부터 어머니와 한 약속이 있어요. 어머니께서 이산가족이신데 이북에 있는 언니를 꼭 찾아드리겠다고 말씀드렸거든요. 그런데 아직까지 찾지 못했어요. 이 소재에 대한 작품을 어머니께 드린다고 생각하면서 진솔하고 또 찬찬히 그림을 그려나가고 싶습니다.”


글 jobsN 신재현 인턴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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