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스의 손'으로 불리던 신불자 가수 남편의 인생역전

조회수 2020. 9. 24. 15:5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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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계의 마이너스 손'으로 불렸던 이 사람, 자라섬을 살렸다
자라섬재즈페스티벌 인재진 총감독
비주류 공연을 아시아 대표 축제 만들어
"천재 음악가는 있어도 천재 기획자는 없다"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북한강이 흐르는 곳에 외딴 섬이 있다. 비만 오면 물에 잠기고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다. 동네 주민마다 부르는 이름도 다른 곳이었다. 이랬던 곳이 2003년부터 '재즈 축제 중심지'로 거듭났다. 올해로 16회를 맞이한 이 축제는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이다. 누적 관객 200만명 기록, 전 세계 재즈 뮤지션 1105개 팀이 참여했다.


매년 10월 자라섬을 재즈로 가득 채운 사람은 인재진(54) 총감독이다. 그는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은 물론 다양한 공연으로 한국 재즈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대중적이지 않아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라면 관객이 10명이어도 무대를 만든다는 일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jobsN
인재진 감독

◇공연계 '마이너스 손', 7년 동안 신용불량자 생활도


인재진 감독은 “무대를 통해 관객과 아티스트의 만남을 성사시키는 매개자”를 공연기획자라고 소개했다. 자신은 그중에서도 음악, 음악 중에서도 재즈, 국악, 월드 뮤직 등을 주로 맡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가 처음부터 공연기획자를 꿈꾼 건 아니었다. 막연하게 다른 사람이 많이 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만 있었다. 그러던 중 대학생 때 자신의 적성을 찾을 수 있었다.


-적성을 찾은 계기는 무엇인가요.


"밴드부에서 색소폰을 연주했어요. 그러나 악기 연주보다는 학교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협찬받고 연주자를 섭외하는 게 더 재미있었어요. 제 모습을 보면서 이게 내 길이라고 느꼈죠. 졸업 후에는 남들처럼 직장에 취업도 해봤어요. 6개월 10일 동안 일했는데 직장 생활은 체질에 맞지 않았죠. 그래서 1993년 회사를 차렸습니다."


-어떤 회사였나요. 


"음악 관련 일이면 뭐든지 다 하는 회사였어요. 지금의 공연기획 에이전시 같은 거였죠. 결혼식, 프로축구 개막전 등 다 맡았습니다. 그러다 1995년 재즈 열풍이 불어 관련 일을 많이 했어요. 그때 이쪽에서 일하는 사람이 얼마 없다는 것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이 왜 안 하는지 알게 됐어요. 돈이 안 됐으니까요. 저도 그랬고 4년 만에 회사를 접었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공연 문화, 그중에서도 재즈가 주목 받을 날이 올 거라고 믿었고 1999년에 대학로에서 재즈 전용 공연장 '딸기 극장'을 운영했습니다."


-어땠나요.


"1000여번의 공연, 20여장의 음반을 제작했지만 항상 적자였습니다. '마이너스 손', '희귀음반 전문'이라는 별명도 얻었어요. 중국 인형극 공연이 망해서 7년 동안 신용불량자 생활도 했습니다. 주변에서 전업하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이렇게 부딪히다 보면 생각했던 것을 언젠가는 구현할 수 있겠다고 믿었어요."

출처: 자라섬재즈페스티벌 홈페이지
역대 자라섬재즈페스티벌 홍보 포스터

◇핀란드 포리 재즈 페스티벌 보고 자라섬 기획


포기할 법도 했지만 재즈와 공연을 향한 임 감독의 열정을 알아주는 곳이 생겼다. 재즈 관련 축제나 행사가 있으면 외국 대사관, 주최 측 등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그렇게 프랑스, 호주, 핀란드 등을 다니면서 다양한 문화를 접했다.


그러다 핀란드 포리 재즈 페스티벌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2000년 호주 재즈 인더스트리 포럼에서 핀란드 포리 재즈 페스티벌 창시자이자 기획자 유리키 캉가스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축제에 초대받고 구석구석을 관람할 수 있었다. 20만명이 재즈로 하나 되는 페스티벌은 인 감독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국내에서도 이런 '재즈 페스티벌'을 만들어 보자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왜 자라섬이었나요.


"2003년에 특강을 했습니다. 가평군청 문화관광과 직원이 듣고 가평에서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여 가평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그때 제 눈에 들어온 곳이 자라섬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였지만 잔디를 깔고 무대를 세우면 근사한 페스티벌이 될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포리 재즈 페스티벌 장소와도 굉장히 비슷했죠. 그렇게 자라섬재즈페스티벌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1회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의 모습은 어땠는지.


“2명의 스텝, 가평군과 함께 시작했어요. 재즈에 ‘자연·가족·휴식’을 녹여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이었기 때문에 재즈만 고집하지 않았어요. 팝이라는 대중적인 장르도 포함했죠. 아티스트는 거의 친분으로 섭외했습니다. 보도자료는 직접 오토바이를 타고 신문사에 찾아가서 보여주고 페스티벌을 설명하고 다녔어요.


그렇게 2004년 10월 1회를 열었고 당시 2만여명의 관객이 방문했어요. 순조롭게 진행하던 중 두 번째 날 폭우가 내렸습니다. 지붕이 없던 무대는 비로 흥건했고 바닥은 진흙탕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연주자들은 악기를 연주했고 객석에 있던 관객들은 기차놀이를 하면서 공연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비가 점점 심해져 결국 모든 공연을 취소하고 섬을 빠져나갔죠. 열심히 준비했는데 공연을 취소해야만 했던 상황에 눈물을 꾹 참으면서 마무리했던 기억이 납니다.”

출처: 자라섬재즈페스티벌 홈페이지
자라섬재즈페스티벌 현장

◇20회를 끝으로 은퇴할 것


인 감독은 3회가 열린 2006년 거처를 가평으로 옮겼다. 지역 행사라 주민들과 어울리는 것도 중요했고 경제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집을 팔아 직원 월급을 충당하고 가평 어머니 집으로 내려온 것이다. 4회부터는 100% 재즈로만 무대를 꾸몄다. 5회부터 롯데 등 대기업 후원도 받고 경춘선이 개통하면서 자리를 잡아갔다. 또 아시아의 대표적인 재즈 페스티벌로 알려지면서 해외 교류도 활발해졌다. 한 나라를 집중 조명하는 국가 포커스 프로그램으로 실시해 그 나라의 재즈를 소개하고 아티스트를 초청한다. 올해는 덴마크를 조명한다.


-재즈 가수이자 아내 나윤선씨도 큰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재즈 영역에서 저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아내가 공연하러 다니면서 페스티벌에 도움 줄 것들을 공유해줍니다. 같은 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제가 하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어서 큰 힘이 되고 영감을 많이 받습니다. 또 아티스트로서도 존경할 만한 사람이죠.”


-공연기획자를 꿈꾸는 후배에게 조언 한마디 해주자면요. 

“아티스트는 재능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입니다. 반면 기획자는 만들어지는 사람이에요. 천재 기획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기획자가 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시행착오도 겪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선 남의 말을 제대로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얘기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타인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은 드물어요. 기획자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는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를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페스티벌을 기획할 때 환경에 조금 더 신경 쓰고 싶어요. 녹색 생활 홍보대사로 지정돼 축제 안에 환경 보호를 녹여내려고 하는데 아직은 부족합니다. 페스티벌 현수막은 물론 축제 중 일회용품 사용도 줄여나갈 예정입니다. 또 자라섬재즈페스티벌은 20회까지 하고 은퇴할 생각입니다.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어요. 흥미진진하고 재밌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글 jobsN 이승아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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