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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만원 안쪽으로 벌죠"..국내에 몇 명 없는 이색 직업

조회수 2020. 9. 24. 17: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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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는 걸 업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원윤경 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 고르고 상영순서 정하는 ‘영화제의 큐레이터’
언젠가는 직접 제작에 나서고 싶어

“미술관에 큐레이터가 있다면 영화제엔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있어요. 영화를 작품 삼아 영화제라는 전시회를 기획하는 영화제만의 큐레이터인 셈입니다.”


거장 감독이 제작한 영화, 세계적인 배우가 출연한 복귀작 등 온갖 영화를 그 누구보다 빨리 접하고 감상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영화제 프로그래머다. 이들은 영화를 즐겨보거나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일종의 ‘축제’와도 마찬가지인 영화제를 설계한다. 영화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내는 창작자라면 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영화제를 꾸리는 기획자다. 2005년부터 약 15년 동안 프로그래머 일을 하고 있는 원윤경(44)씨를 만나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제만의 성격과 정체성 만드는 사람


-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가요?


“쉽게 말하면 영화제의 ‘두뇌’ 역할을 맡는 사람이에요. 영화제를 전반적으로 관리하고 행사의 전체적인 틀을 설계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영화제에서 상영할 작품들을 선정해요. 상영시간표도 짜야 합니다. 또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러 이벤트들도 기획해요. 대표적인 예가 ‘관객과의 대화’입니다. 프로그래머들은 관객들이 배우, 감독, 문화 평론가 등 전문가들과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행사를 꾸리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영화제만의 성격과 정체성을 만들어 나갑니다.”

출처: 원윤경씨 제공
원윤경 영화제 프로그래머(오른쪽).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어떤 작업들을 맡으셨나요?

“지금까지 총 4개 영화제에 프로그래머로 참여했어요. 2005년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습니다.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서울국제건축영화제 작업도 맡았어요. 2015년에 서울국제음식영화제를 만들고 나선 이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제는 9월6일에 개막해서 약 일주일간 행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영화제 전후 작업과정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얼마 동안 준비하세요?

“길게는 개막 1년 전, 짧게는 6개월 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해요. 사실 프로그래머들은 작업 시기와 관계없이 항상 영화계 동향을 살펴야 해요. 신작은 매일 같이 나오고 국제 영화제도 분기마다 열리기 때문입니다. 세계 3대 영화제인 독일 베를린, 프랑스 칸, 이탈리아 베니스 영화제는 각각 2월, 5월, 8월에 개막해요. 베를린과 칸 영화제는 ‘영화 마켓’도 열어요. 영화 마켓은 세계 각국 영화 관계자들이 모여서 영화를 상품처럼 사고 파는 시장이죠. 프로그래머들은 이 기간 동안 영화제나 마켓에 나온 영화들을 살피면서 어떤 영화가 우리 영화제 성격에 잘 맞을지 따져봅니다.

개막 한 달 전까지는 상영작 라인업을 확정 지어요. 영화 배급사나 프로덕션 관계자들과 상영 조건에 대해서 상의한 다음에 영화제에서 틀 작품들을 정합니다. 이때 상영작을 소개하는 책자도 만들죠. 제목이 외국어라면 한국어로도 새로 만들어야 해요. 영화제 기간 동안 개최할 행사도 준비하면서 영화제 시간표를 확정 짓습니다. 이런 정보를 취합해서 언론들에 홍보 자료를 뿌리는 등 본격적으로 홍보 활동을 시작해요.”
출처: '연합뉴스TV', 'TRT WORLD' 유튜브 캡처
독일 베를린, 프랑스 칸 영화제 같은 경우 영화를 사고 팔 수 있는 '영화마켓'도 연다.
-영화 선정 기준이 따로 있나요?

“영화제 성격과 주제에 맞는 영화들을 골라요. 영화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지 살피는 거죠. 서울국제음식영화제 같은 경우엔 다양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어요. 맛있는 먹거리들을 보여주면서 일상 속 고민을 잊게 하는 영화뿐 아니라 사람들이 먹고 소비하는 방식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영화도 틀어요. 2019년 개막작인 ‘푸드파이터: 먹거리를 구해라’가 이런 경우예요. 이 영화는 호주의 '오즈 하베스트'라는 먹거리 구조 단체에 대한 내용이에요. 설립자인 로니 칸은 정치인들과 대기업들이 음식물 쓰레기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도록 촉구하죠. 즉, 영화를 통해서 ‘지속 가능한 밥상’에 대해서 고민하자는 영화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죠.”
출처: 서울국제음식영화제 유튜브 캡처
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영화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상영작으로 정한다.

-영화 상영표는 어떻게 짜나요?


“줄거리를 파악한 다음에 이 영화에 흥미를 가질 만한 관객이 많이 올 시간대는 언제인지 생각해 봅니다. 예를 들어서 청소년이 볼 수 있는 영화 같은 경우엔 학교 단위로 단체관람을 하러 와요. 그러면 저희는 학생이 등교하고 이동하는 시간까지 모두 감안해서 오전 10시쯤에 영화를 상영하죠. 또 흔히 말하는 ‘프라임 시간대’가 있어요. 평일 아침보다 저녁이나 주말에 관객이 더 많습니다.


보통 영화제 기간 동안 한 작품을 2~3번 상영하는데 형평성에 맞게 프라임 시간대에 한번, 아침시간대에 한번 틀려고 노력하죠. 이런 부분들을 고려하면서 영화 시간표를 직접 손으로 만듭니다. 시간표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아서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서 쉽게 떼었다 붙일 수 있는 포스트잇으로 작업해요. 이때 방 벽 한 면을 비어 둔 다음에 이 면을 도화지 삼아서 영화 제목을 쓴 포스트잇으로 시간표를 만듭니다. 부산국제영화제 같이 규모가 큰 영화제에선 방 하나를 포스트잇으로 가득 채우기도 해요.”


◇영화를 업으로 삼게 된 경우


-이 일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평소 영화를 자주 봤어요. 졸업 논문도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각색한 두 영화를 비교하는 내용으로 썼을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죠. 2000년대 초반 미국의 뉴욕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으로 석사생활을 하는 중이었어요. 당시 지인의 요청을 받아서 현지 영화 관련 단체인 ‘서브웨이 시네마(Subway Cinema)’가 주최하는 한국영화 특별전에 봉사자로 참여했습니다. 지금은 거장이라고 불리는 감독들의 초기 작품을 상영회에서 소개했어요. 봉준호 감독이 2000년에 제작했던 영화 ‘플란다스의 개’ 같은 작품이요.


이때 영화 관련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영화를 업으로 삼을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동시에 영화에 대해서 더 전문적으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마침 뉴욕대학교가 영화로 유명한 학교였어요. 그래서 ‘영화이론(Cinema Studies)’으로 전공을 바꿨어요.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는 영화 수입이나 수출 관련 일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도중 미장셴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영화제 현장에 나가보니까 이론 공부보단 실무 일이 확실히 더 재밌더라고요. 이후 부산국제영화제 등 영화제에서 스텝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출처: 원윤경씨 제공
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각종 행사들도 기획한다.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되는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자격증을 따거나 관련 전공을 공부해야 하나요?

“아뇨. 그런 진입장벽은 없어요. 현재 프로그래머로 활동하시는 분들을 보면 영화학과 전공자들이 많지 않아요. 영화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제작, 연출 등 실기보단 평론이나 역사 등 이론을 세부전공으로 공부했더라고요. 대신, 영화를 자주 보고 이에 대해서 글을 써본 경험이 있으면 좋아요. 글을 써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에요. 영화제 소개 책자에 들어가는 영화 줄거리 등을 직접 써야 합니다. 그래서 중견 프로그래머들 중에선 영화 전문지의 기자나 편집장 출신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국제영화제에서 일을 하기 위해선 영어는 필수적으로 해야 해요. 영어 외에 다른 외국어도 할 수 있다면 좋습니다. 왜냐하면 영어권 국가에서 제작한 영화는 엉어로 진행되고 한국어 자막이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유럽, 남미, 아시아 등 비영어권 국가에서 제작한 영화는 영어 자막만 갖추고 있어요. 즉,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업계 관계자들과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해선 영어를 할 줄 알아야겠죠. 저 같은 경우엔 책자를 만들 때 영어를 한국어로,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영화의 한국어 자막 번역에도 관여해요.”

◇영화 만들면서 제작 현장에 직접 나서고 싶어

-듣다 보니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꿈의 직장’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힘든 점은 없나요?

“영화를 자주 보고 신작을 누구보다 빨리 접하는 직업인 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한텐 프로그래머가 ‘꿈의 직업’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힘든 점도 있죠. 영화제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엔 흔히 말하는 ‘워라벨’을 챙기기가 힘들어요. 한창 바쁠 때는 제 개인적인 생활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죠.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 영화제 준비에 매진해야 해요. 

그리고 사건, 사고들이 갑작스럽게 터질 때면 문제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재작년엔 영화 목록을 선정하고 영화제 티켓, 소개 책자까지 다 만들었는데 갑자기 영화 수입사가 상영을 원하지 않는다고 통보해온 적이 있어요. 원래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는 해요. 하지만 이 때는 개막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어요. 다른 작품을 급하게 구하느라 유독 더 힘들었던 기억이 있네요.”
출처: 원윤경씨 제공
원윤경(맨 오른쪽)씨는 영화를 직접 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이 일이 매력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직접 프로그래밍을 한 영화제가 관객 사이에서 반응이 좋을 때 성취감을 느껴요. 개막 준비기간 동안엔 힘들었지만 행사가 다 끝난 뒤에 영화제 관객 분들한테서 ‘영화 잘 봤다’, ‘덕분에 좋은 영화를 알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지금까지도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급여수준은 얼마인가요?

“어떤 영화제를 맡는지에 따라서 연봉이 달라져요. 중소기업과 대기업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의 월급 차이를 생각하면 됩니다. 규모가 큰 국제영화제에서 일하면 한 달에 400만원 정도 벌어요. 하지만 이는 특수한 경우예요. 대규모 국내 영화제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 정도 버는 프로그래머는 많지 않다고 보시면 돼요. 중소 영화제에서 일하는 프로그래머들은 평균 약 200만에서 400만원 안쪽으로 법니다.”

-최종 목표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기회가 된다면 영화를 직접 제작해 보고 싶어요. 제작을 하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영화를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껏 영화 산업에 항상 가까이 있었어요.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고 선배가 차린 회사에서 영화 배급, 수입 일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직접 영화를 만들어 본 적은 없잖아요. 미래엔 영화를 제작하면서 영화와 한걸음 더 가까워지고 싶습니다.”

글 jobsN 신재현 인턴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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