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가도 벌떡..일본도 놀란 30년째 칼에 '미친' 한국인

조회수 2020. 9. 25. 10:0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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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검에 미쳐 보낸 반평생.. 이은철 도검장
[한국의 장인] ⑤ 이은철 도검장

이은철(62) 고대제철 기능전승자(도검장)는 전통 칼 제작에 미친 사람이다. 돈도 되지 않는 전통기법으로 도검(刀劍)을 재현하는 일에 30여년을 투자했다. 현재 한국에서 철광석을 제련(製鍊)하고 정련(精練)해 얻은 쇠로 전통도검을 만드는 장인은 그가 유일하다. 철광석에서 쇠를 뽑는 것을 제련, 그 쇠에서 이물질을 없애는 작업을 정련이라고 한다.


지난 24일 찾은 경기도 여주 ‘한국전통철문화연구소’. 철을 뽑아내기 위한 다양한 크기의 화덕과 풀무가 있다. 큰 화덕은 높이가 4m에 달한다. 화덕에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도 가로 3m 세로 2m 정도로 거대했다.

자다가도 벌떡…일본도 놀란 30년째 칼에 ‘미친’ 한국인

철광석을 제련해 얻은 쇠를 두드려 도검 형태로 만든 뒤 날을 세우는 등의 후속작업은 전시실을 겸한 2층 건물에서 한다. 그는 작업장에 침실을 마련하고 먹고 잔다. 한시도 작업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자다가도 갑자기 일어나서 그동안 만든 도검을 살펴보곤 한다. 아침엔 전날 밤늦게까지 작업하던 작업을 반추한다. 힘을 쓰는 험한 작업이어서 시간적 여유가 생길 때면 기절하듯 쓰러져 자곤 한다. 부인이 항상 그런 그의 옆을 지킨다. “안사람은 내가 작업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숙소로 갑니다.” 이 명장은 자신보다 7살 연상인 부인이 최대의 후견인이자 후원자라고 했다. 

출처: 이은철 도검장 제공
세종문화제.

철광석에서 뽑아낸 쇠를 두드려 길쭉하게 편 뒤 접어 다시 두드려 펴서 접는 작업(접쇠)을 20번쯤 반복해 도검 형태를 만든다. 이 작업을 거치면 쇠 조직이 치밀해지면서 질기고 강해진다. 또 쇠에 남아 있던 이물질도 유리질 형태의 ‘슬레그’로 배출돼 순수한 강철만 남는다. 이후 칼을 담금질해 날을 단단하게 만들고, 12개에 달하는 단계별 숫돌을 이용해 칼날을 날카롭게 세운다. 연마 과정만 보름쯤 걸린다. 이 과정을 거치면 칼 몸통(도신)에 철 조직과 담금질 흔적이 드러나게 된다. 도검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이 흔적을 예술품으로 감상한다. 그가 만든 도검은 세계 최고라는 일본 도검장들도 인정할 정도로 우수하다. 그는 일본 도검장인들의 초청을 받아 매년 한두 차례 일본을 방문한다.

출처: 이은철 도검장 제공
이은철 도검장.

-한국에 전통 제철기술로 얻은 쇠를 이용해 도검을 만드는 장인이 있나.


“우리나라에도 도검을 만드는 이들은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철광석을 녹여 쇠를 얻고, 그 쇠에서 이물질을 제거한 백련강으로 도검을 만드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 나는 전통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도검을 만든다. 다른 사람들은 제철소에서 생산한 특수강으로 칼을 만든다.”


-다른 장인처럼 단단하고 질긴 쇠를 사서 도검을 만들지 않고 굳이 전통 기술을 고집하는 이유는.


“질 좋은 도검을 만든다는 목표만 가지고 있다면 특수강을 사서 만드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하지만 나는 삼한시대부터 이어진 한국 고대제철 기술이라는 전통문화를 계승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힘들지만 더 많은 돈을 들여 철광석에서 쇠를 추출하고, 그 쇠로 도검을 만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도검을 잘 만들려는 차원이 아니다.

. /이은철 도검장 제공

-전통 제철 문화를 계승하려는 이유는.


“전통 제철기술을 이용한 도검 제작법은 내가 관련 공부를 시작하기 한참 전에 이미 사라졌다. 정부가 1978년 진행한 전통 제철기술 실태조사를 했다. 철광석에서 쇠를 뽑고 그 쇠로 기물을 만드는 이가 그때 이미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우수한 철기문화를 가진 민족이지만 전통의 맥이 끊긴 것이다. 그쪽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정말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철기를 사용했다. 삼한시대의 변한이나 가야 등은 우수한 철기를 만들어 주변국에 이름을 떨쳤다. 이들 국가는 일본에 철 덩어리와 철로 만든 기구를 수출했다. 일본의 국보 칠지도(七支刀)도 사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철제품이다.” 

칠지도는 백제에서 만든 나뭇가지 모양의 철제 칼로 일본 나라현 덴리시의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있다.


-한국산 철강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도 우연이 아닌가 보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제철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조선시대 도검을 갈거나 부러진 도검의 단면을 살펴보고 자부심이 생겼다. 중국에서 만든 일반 도검보다 훨씬 강하고 질기다. 일본에도 절대 뒤지지 않았다.

출처: 이은철 도검장 제공
도검 전시.

조선시대 은장도는 숫돌에 갈아 놔둬도 오랫동안 녹이 슬지 않는다. 중국 황실에 바쳐진 도검은 좀 다르겠지만 내가 구한 중국 도검은 날을 세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녹이 슬었다. 쇠에 이물질도 많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선시대 도검은 칼날이 단단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질겼다. 날이 오랫동안 무뎌지지 않으면서도 잘 부러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눈으로는 이물질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정련도 잘했다. 한국 철강업계를 대표하는 포스코가 일본에 결코 뒤지지 않는 이유도 우리 조상들의 솜씨가 다시 발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통 제철 문화는 왜 사라졌나.


“일본은 일제시대에 한국의 전통 제철 문화의 뿌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의병 봉기가 두려워 도검 취급 제한법을 만들어 철광석에서 쇠를 뽑아 도검을 만드는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억압했다. 아무나 만들 수도, 사서 보관할 수도 없도록 했다. 수요가 없으니 도검을 사려는 사람들이 급감했을 것이다. 당연히 기술을 배우려는 이들도 줄었고, 결국 기술이 사라졌다. 일제시대 산업화를 거치면서 일본에서 대량 생산한 저렴한 철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도 이유다. 어렵게 철광석 채굴하고 용광로에서 녹여 쇠를 뽑아 정련하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어졌다.”

. /이은철 도검장 제공

-전통 제철기술 재현에 매달리게 된 배경은.


“화가를 꿈꾸던 20대 시절에 우연찮게 계간 미술이라는 잡지와 만났다. 잡지에서 이종석 문화재 전문위원이 ‘외국인이 은장도를 많이 찾아 은장도를 만드는 장인은 있는데, 그 쇠를 철광석에서 추출하는 기술은 모두 사라졌다’고 한탄하는 글을 봤다.


나는 당시 도검이나 철 분야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지만 글을 보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1986년부터 본격적으로 전통 제철 기술과 재현하고 도검 만드는 공부를 했다. 10년간 낮에는 철을 다루는 공장을 찾아다니고, 밤에는 관련 책을 봤다. 공대에 다니던 동생이 책을 많이 구해줬다. 아내는 일본어를 모르던 나를 위해 일본어를 공부했다. 공부를 10년쯤 하다 보니 자신감이 붙었고, 2001년 용광로를 만들어 철광석을 녹이고 얻은 쇠로 도검을 만들기 시작했다.“


-철의 용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굳이 도검을 선택한 이유는.


“예로부터 최상의 기술은 무기, 즉 도검에 활용했다. 철기 농기구는 강함이나 견고함에서 도검 등의 무기에 밀린다. 적과 칼싸움을 할 때 칼이 부러졌다고 생각해 보자. 전쟁에서 이기려면 강하면서 부러지지 않는 쇠로 무기를 만들어야 했다. 이런 이유로 가장 선진적인 철 관련 기술을 무기 제작에 사용했다. 전통 제철기술의 핵심은 도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전통 제철 문화를 재현하기 위해 도검을 연구하고 만든다.”

출처: 이은철 도검장 제공
(왼)단련단야 완료품. (오)철정완성.

-돈이 적잖게 들어갈 텐데. 만든 도검을 팔지는 않나.


“나는 전통 제철 문화 복원을 위해 이 일을 시작했다. 돈벌이를 위해 시작한 사업이 아니다. 도검을 팔라는 유혹도 있었지만 전통 제철기술을 완전히 복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도검을 만들어 팔면 이 일에 뛰어든 취지가 훼손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술 수준이 일본 장인들과 대등한 수준에 도달했을 때 도 한 자루에 1억원을 줄 테니 팔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도 만든 작품이 많지 않아 전시를 위해 팔 수 없었다. 한 작품도 개인에게 팔지 않았다. 현재 내 작품은 대전 국립중앙과학관과 충북 음성 철박물관, 충남 부여 백제역사관에 전시돼 있다.


생활이 넉넉지 않지만 아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동안 필요한 돈은 와이프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아 충당했다. 판 땅 중에 지금은 금싸라기 땅도 있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철광석에서 쇠를 뽑아내는 작업이 어렵지 않나.


“철광석에서 쇠를 뽑는 과정은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소나무 숯을 이용해 철광석에서 쇠를 추출한다. 돈이 많이 든다. 전통 제철 문화 복원에 한해 7000만원쯤 사재를 들이는데 그중 상당 금액이 철을 뽑는데 쓰인다. 


육체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다. 용광로 온도를 높여주면 1300도쯤에서 철광석에서 쇠가 녹는다. 이물질이 많은 깨끗하지 못한 ‘잡쇠’다. 이 쇠를 불에 달궈 두드려 이물질을 제거해 순수한 ‘철괴(쇠덩어리)’를 만든다. 무척 위험한 작업이다. 조금만 부주의해도 크게 다친다.”

. /이은철 도검장 제공

-손에 흉터가 많다. 많이 위험한가 보다.


“쇠를 두드리는 과정에서 불 똥이 튀어 손에 화상을 입은 것은 셀 수 없을 정도다. 엄지손가락으로 이어지는 힘줄은 작업 중 끊어져 다시 이었다. 앞니도 모두 가짜다. 연장을 잘못 다뤄 모두 부러졌다.


쇠를 단련하는 과정에서 쇠 파편이 눈에 튀어 눈 동자에 박히기도 했다. 의사 선생님이 실명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했다. 그때 다친 왼쪽 눈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시력이 오른쪽보다 많이 떨어진다. 오른손잡이여서 주로 그쪽으로 힘을 쓰는데 통증 때문에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더니 오른팔과 다리의 연골이 다 달았다고 하더라. 싫어질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그만둬야지’ 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이 명장의 기술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몇 년 전부터 이 정도면 전통 제철 문화를 복원한 사람이라고 소개해도 남부끄럽지 않은 수준에 올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내 기술이 일본 도검 장인의 기술보다 조금 뒤처진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일본 장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자부한다.

. /이은철 도검장 제공

실제 도검 분야에서 세계 최고라는 일본 도검 장인들도 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제철기술과 도검 기술을 배우기 위해 내 의지로 일본을 방문했지만 지금은 일본 정부가 운영하는 전통 제철소인 타타르 제철소, 오카야마현 니미시가 운영하는 중세(中世)타타라제철소와 기술교류를 한다. 또 수십 대에 걸쳐 도검 제작 기술을 전수받은 미야자키 현의 마쓰바 장인과는 각자 만든 도검에 대해 평가해주고 공부하는 기술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쉽지 않았지만 결국 한국 제철 문화 재현에 성공했다. 그래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끊긴 전통 제철 문화를 정말 어렵게 복원한 만큼 이제는 그 맥이 후대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전통 제철 문화 박물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철 박물관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은 자금이나 시설 공간 등의 이유 때문에 개인이 하기에는 벅차다. 제철소 공간도 확보해야 하고, 용광로를 세워야 한다. 사람도 필요하다.

출처: 이은철 도검장 제공
. /이은철 도검장 제공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른 철강 강국이다. 제철 관련 기업이나 정부가 우리의 훌륭한 전통 제철 문화의 맥이 지속될 수 있도록 박물관 건립에 적극적으로 나서줬으면 한다.”


글 CCBB 박지환
jobarajob@naver.com
CC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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