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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종영한 KBS2 ‘단 하나의 사랑’은 아시아 최초로 발레를 소재로 한 드라마다. 사랑 한 톨 없는 독한 발레리나 이연서(신혜선)와 낙천적인 사고뭉치 천사 김단(김명수)의 환타지 로맨스를 그린 이 드라마는 대중들에게 발레의 매력을 잘 전달했다는 평을 받았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발레, 발레리나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졌다.

 
‘단 하나의 사랑’에서 극중 대미를 장식한 공연은 로맨틱 발레의 대명사인 ‘지젤(Giselle)’이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작가인 고티에(Gautier)의 대본으로 완성된 지젤은 낭만 발레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남녀 간의 사랑과 배신, 헌신’이라는 소재를 담고있는 지젤은 1841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된 이래 현재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지젤은 총 2막으로 구성된다. 1막에서 심장병이 있는 시골 아가씨 지젤은 평민으로 가장한 귀족 알브레히트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지젤을 짝사랑한 힐라리온이 알브레히트의 정체를 폭로하고, 지젤은 알브레히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된다. 충격에 빠진 지젤은 실성한 채 계속 춤을 추고, 심장병이 도지면서 죽는다. 2막의 무대는 지젤의 무덤이 있는 깊은 숲 속이다. 지젤은 죽어서 윌리(처녀 귀신)의 일원이 된다. 윌리들은 밤이면 무덤에서 나와 숲에 찾아온 남성을 유혹해 숨이 끊길 때까지 춤을 추도록 한다. 알브레히트는 지젤을 못 잊어 그녀의 무덤을 찾아 숲에 왔다가 윌리들의 포로가 된다. 윌리들은 알브레히트를 죽이려고 하지만, 지젤은 이를 막기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가까스로 새벽 종이 울리며 윌리들은 물러가고 알브레히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알브레히트는 자신을 구해준 것이 지젤임을 알고 참회하며 공연이 끝난다.

 
지젤은 모든 발레리나들이 선망하는 배역이지만, 이를 제대로 소화해 낼 수 있는 국내 무용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어려운 동작이 쉴 새 없이 이어질 뿐더러 기쁨과 슬픔, 한 사람을 향한 지고지순한 순애보까지 한 무대에서 연기해야 할 감정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국내 최고 민간 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소속 한상이 솔리스트도 그중 한 명이다. 한씨는 7월 20일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열린 ‘지젤’ 공연에서 지젤 역을 맡아 열연했다. 공연이 끝난 후 발레 관련 커뮤니티에는 ‘상이리나(한상이 발레리나)가 미친 연기력과 우아함, 안정감을 보여줬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한씨는 주니어 시절부터 국제 대회에서 입상하며 일찌감치 ‘한국 발레의 기대주’로 주목을 받았다. 서울예고 재학 중인 2002년 미국 잭슨 콩쿨에서 동메달을 수상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이던 2004년에는 미국 뉴욕 그랑프리 콩쿨에서 3위를 차지했다. 2005년엔 한국인 최초로 모나코 왕립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정단원으로 발탁됐으며, 네덜란드 국립발레단(2008~2010년)을 거쳐 2010년부터 유니버설발레단에서 활동 중이다. 2017년에는 한국발레협회에 한 해 동안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무용수에게 주는 ‘프리마발레리나’상을 수상했다. 7월 23일 서울 광화문에서 한씨를 만나 발레리나로서의 삶과 목표 등을 들어봤다.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맡았던 배역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솔리스트로 활동 중인 발레리나 한상이입니다. 솔리스트는 발레 공연에서 단독 배역을 맡는 무용수들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이번 ‘지젤’ 공연에서는 각각 다른 시간대 공연에서 주인공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귀족 약혼녀 역할을 맡았어요. 지금까지 주인공으로 나섰던 작품으로는 ‘백조의 호수’ ,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 클래식 발레와 유니버설발레단 단독 작품인 ‘심청’ 등이 있습니다. 많은 팬들이 발레를 사랑해주시고 공연장을 찾아주셔서 저희 단원 모두가 기쁘게, 열심히 공연에 임하고 있어요.” 

 
-지젤은 로맨틱 발레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데요. 주인공 지젤 역할은 발레리나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지젤은 발레리나라면 누구나 한 번쯤 연기하길 꿈꾸는 배역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처음 지젤 역할을 맡게 됐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지젤은 여러가지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역할이에요. 1막에서는 지고지순한 사랑, 배신 당한 후의 처절한 심정을 연기해야하고 2막에서는 사랑을 지켜내기 위한 간절함을 표현해야해요.  

특히 1막 후반부 지젤이 실성해 계속 춤을 추는 매드신(mad scene)의 임팩트가 강한 편이죠. 2막에서는 지젤이 귀신이 됐기 때문에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발끝으로만 움직이는 동작이 반복되요. 다른 발레 공연에서는 ‘점프를 어느 정도 높이로 뛰고 공중 회전은 몇 번 해야 한다’는 식의 테크닉이 강조되는 반면, 지젤에서는 기교도 중요하지만 섬세한 감정 표현이 좀 더 중시되는 것 같아요.”

-알브레히트를 향한 지젤의 일편단심 사랑에 공감하는지요. 냉정하게 보면 알브레히트는 약혼녀가 있음에도 신분을 속이고 지젤에게 접근한 것인데.

“개인적으로 지젤은 순수하게 사랑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발레 작품 중에는 남녀가 사랑을 하다 남자가 배신을 하고, 이로인해 여자가 죽자 남자가 뒤늦게 후회하는 내용이 은근히 많아요. 남녀간의 사랑과 갈등, 배신 이런 이야기 소재는 아주 옛날부터 유행했던 것 같네요.” 

-무대 위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받으며 춤출 때의 느낌은 어떤지.

“솔직히 몇 년 전까지는 관객들의 시선을 받으면 스스로 불안해지는 게 있었어요. 제가 김연아 선수처럼 강심장이 아니라서 무대 올라가기 전 긴장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었거든요. 그래서 관객들을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려고, 혼자 춤 춘다는 생각으로 무대에 올랐던 적도 많았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서 지금은 무대가 많이 편해졌어요. 그러다보니 연습 때처럼 동작이 정확하고 자연스럽게 나오고 역할에 몰입도 더 잘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전 발레리나의 전성기는 30대 이후에 찾아온다고 생각해요. 자신감이 생기니까 앞으로 더 잘하고 싶고, 더 열심히 연습하게 되는 동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원래 꿈이 발레리나였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워낙 춤 추고 활동적인 것을 좋아해서 엄마한테 발레 학원을 보내달라고 졸랐던 게 시작이죠. 학원 원장선생님이 ‘발레에 소질이 있으니 계속하라’고 붙잡으셨고, 그때부터 발레리나가 되길 꿈꾸며 이 길만 걸어왔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졸업 후 예원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 절 많이 응원해주셨던 무용부장 김나영 선생님이 이번 지젤 공연을 보러오셔서 너무 반갑고 감사하더라구요.” 

 
-발레리나의 세계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무용수들 간에 주인공을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시기 질투하는 장면이 나오던데, 실제로도 그런가요? 

“전혀 그런 게 없지는 않죠. 무용수가 많아도 주인공 역할은 극소수에게만 돌아가잖아요. 누구나 주인공을 하고 싶기 때문에 질투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면서 상대를 헐뜯고 나쁜 짓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경쟁이나 시기심을 굉장히 부각시켜 표현한 것 같아요.  

항상 같이 연습하다보니 무용수들끼리는 서로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알거든요. 그러다보니 저희들은 연습할 때 서로 격려해주고 영양 식품도 챙겨주고 그래요. 무대에 오르기 전 ‘쟤가 실수했음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단원은 아마 없을걸요. 오히려 시기, 질투는 중·고등학교에서 시험 볼 때 더 많이 나타났던 것 같아요. 그때는 다들 등수 하나에 굉장히 민감해하던 시기였어요. 외국 발레단도 우리나라보다는 경쟁 같은 게 눈에 띄게 드러났던 것 같네요.”

 
-공연을 앞두고 연습은 하루에 얼마나 하나요. 발레리나도 매일같이 출퇴근해야 하나요? 

“저희 발레단은 2월부터 12월까지 한 달에 한 프로그램씩 꾸준히 공연을 진행해요. 1년에 공연이 70~80회 있기 때문에 휴가 기간인 1월을 제외하고는 항상 연습을 해야하는 시스템이에요. 그리고 저희는 일요일 빼고 주 6일 출근해 연습하기 때문에 시즌 중에는 일반 회사보다 오히려 휴일이 적은 편이에요.

보통 오전 11시부터 한시간 15분 동안 모든 무용수가 함께 몸을 푸는 시간을 가져요. 무용수라면 몸이 굳지 않기 위해 매일 거쳐야하는 과정이죠. 이 시간이 끝나면 오후 6시까지 각자가 맡은 배역을 연습합니다. 저같이 주인공 말고도 다른 역할을 맡아야하는 솔리스트는 연습해야하는 동작도 많기 때문에 스케줄이 빡빡한 편이에요. 점심시간이 따로 있지 않기 때문에 먹을 것을 챙겨와 연습 도중 틈틈히 먹어야합니다.”

-발레리나는 항상 다이어트를 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사람들이 발레리나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큰 편견 중 하나가 ‘발레리나는 조금만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먹을걸요. 그렇지 않고서는 연습을 할 수가 없어요. 또 다이어트를 하다 근력이 약해지면 부상을 당하기도 쉽거든요. 저는 고기도 많이 먹고 에너지원인 단백질과 탄수화물 섭취도 많이 하는 편이에요.(실제로 카페에서 만난 한씨는 예상과 달리 아메리카노가 아닌 아이스라떼를 마셨고, 시럽까지 추가했다.)  

발레리나들이 말라보이긴 하지만 대부분 근육질이에요. 남들처럼 많이 먹지만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저절로 강제 다이어트가 되는 셈이죠. 영화 ‘블랙스완’에 나온 것처럼 다이어트를 하다가 거식증에 걸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요. “        

 
-한달 수입은 얼마나 되나요. 발레리나들도 월급 형태로 임금을 받는지. 

“발레리나들도 월급으로 받지요. 다만 참여한 공연이 일정 수를 넘겼을 때 추가 수당을 받기도 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발레리나들의 보수가 넉넉한 편은 아니에요. ‘수석 무용수-솔리스트-드미솔리스트-코르드발레(군무)’ 등 무용수 직급에 따라 수입은 차이가 나구요. 같은 직급이더라도 경력이나 실력 등을 따져 개인 별로 구체적인 임금 액수도 달라요. 동료들이 월급으로 얼마를 받는지 정확한 액수는 알 수가 없죠. 발레리나들이 부업으로 학원에 특강을 나가기도 하는데 발레단에서 크게 관여하지 않는 편이에요. 다만 본인 이름으로 학원을 낸다거나 공연에 지장을 주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어요.” 

 
-발레리나로서 가장 기쁜 순간과 슬펐던 순간을 꼽아 본다면. 

“아무래도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박수와 함께 환호를 보내주실 때가 가장 기쁜 순간이죠. 공연 하나를 하기 위해서는 정말 수많은 땀과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면 모든 것을 보상받은 듯한 느낌이 들어요. 저희도 잘할 테니까 관객들도 질타보다는 따뜻한 격려와 박수를 보내주셨으면 좋겠어요.  

가장 슬픈 순간은 부상 때문에 공연을 하지 못할 때죠. 부상은 정말 누구에게든 갑작스레 찾아오거든요. 발목이 한번 돌아가면 기본으로 4주에서 6주는 쉬면서 재활해야해요. 저도 2011년부터 2014년까지 3년간 오른발 발등에 생긴 피로골절 때문에 너무 괴로웠어요. 조급한 마음에 충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복귀를 하다보니 부상이 재발하는 악순환이 반복됐어요. 충분히 쉬었어야했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구요.”

-아직 한국에서 발레는 ‘상류 문화’라는 인식이 강한 것 같은데.

“아직 발레는 매니아층을 중심으로 사랑받고 있는 게 사실이죠. ‘발레는 어렵고, 지루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도 사실이구요. 저희도 관객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저희는 공연 전에 단장님이 무대에 먼저 올라 발레 동작을 보여주고, 그 동작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설명해 주는 시간을 따로 갖고 있어요. 아는 만큼 더 재밌게 볼 수 있잖아요. 그리고 ‘춘향’이나 ‘심청’같이 친숙한 이야기를 발레 작품으로 제작해 공연하기도 하구요. 좀 더 많은 분들이 공연장에 부담없이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티켓 값도 발레보다 일반 뮤지컬이 훨씬 더 비싼 편이에요.” 

 
-사람들이 공연장을 찾게 끔 만드는 발레만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발레는 연기와 춤,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 복합 예술이에요. 발레를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뷰티(beauty·아름다움)’라고 생각해요. 무용수들의 춤 동작뿐 아니라 무대 세트나 조명, 의상 등 공연 곳곳에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발레만의 아름다운 매력을 많은 분들이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발레리나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기본적으로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선 춤을 좋아해야해요. 연습에서 오는 고통과 인내를 극복하려면 춤을 좋아하는 마음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좋은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선 성실함과 한결같은 꾸준함이 필요한 것 같아요. 하루, 이틀만 연습을 안 해도 금방 티가 나는 게 발레거든요. 목표를 세우고 성실하게 꾸준히 연습하는 것만이 무용수로서 성공하는 길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를 말씀해주세요.

“일단 10월에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심청’ 공연을 잘 연습해서 성공적으로 무대에 서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심청은 한국에 돌아온 이후 가장 행복하게 공연했던 작품이에요. 2016년에 심청 역할을 처음 맡았는데 오랜 부상 끝에 발레리나로서 다시 자신감을 갖게 해 준 작품입니다. 2017년 이후 2년 만에 열리는 심청이기 때문에 좀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장기적인 목표는 클래식 작품과 현대 작품에서 모두 인정받는 ‘카멜레온 같은 무용수’가 되는 게 꿈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의 ‘줄리엣’, ‘라바야데르(인도 무희)’에서의 ‘니키아’등 아직 해보지 못한 다양한 역할에도 도전하고 싶습니다.”

글 jobsN 이준우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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