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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 대학에서 강의하는 '최종학력 초졸' 어느 장인의 손

조회수 2019. 7. 21. 06: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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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나전칠기 1호 명장, 수곡(守谷) 손대현
[한국의 장인] ① 나전칠기 손대현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 무학을 겨우 면한 그가 서울대에서 강의를 한다. 그가 내뱉는 한마디에 학생들은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에게도 느끼지 못했던 권위를 느낀다. 그의 손을 거친 작품은 우리 대통령이 외국을 나갈 때 가장 많이 들고 나가는 물건 중 하나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이 유럽 6개국을 순방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때도 그의 공방에서 만든 물건들 들고 나갔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 후 떠날 때 챙긴 짐가방에도 선물로 받은 그의 작품이 들어 있었다.

출처: 손대현 장인 제공
기물위에 나전을 붙이고 나전의 두께가 올라간 만큼 토회로 고르게 발라준 후 숯으로 나전이 나오게 갈아내는 모습.

그는 바로 대한민국 나전칠기 1호 명장으로 수곡(守谷) 손대현(71)이다. 경기도 곤지암에 있는 수곡(守谷) 공방을 찾아 손대현 선생을 만났다. 공방은 크지 않은 2층 건물이었다. 1층은 공방, 2층은 손 선생이 그동안 만든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실이다. 그는 “보석함처럼 작은 작품은 수백만원에서 장농처럼 큰 작품은 수천만원까지 작품의 크기와 디자인에 따라 가격이 큰 차이가 난다”고 했다.


손 선생의 손은 거뭇거뭇했다. 옻 수액이 묻은 탓이다. 15살부터 70이 넘는 나이까지 나전칠기장으로 살면서 옻이 덧칠해진 세월의 흔적이라고 했다. 공방엔 작업이 한창이었다. 어떤 이는 옻칠을 하고, 다른 이는 옻칠한 작품을 건조실에 옮긴다. 가구에 칠한 옻을 미세한 입자의 사포로 갈아내는 이도 있다. 어수선해 보였지만 누구 하나 한가로운 이가 없었다.

출처: 손대현 장인 제공
줄음질한 나전을 유산지 위에 시문한 문양대로 나전을 붙이는 모습.

-나전칠기는 자주 듣는 단어다. 하지만 제대로 설명할 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나전(螺鈿)은 진주와 소라 조개 등의 껍데기로 문양을 만드는 전통공예 기법과 작품을 말한다. 중국이 유명하다. 섬나라 일본은 옛부터 습기에 강한 옻을 이용한 칠기(漆器)가 발전했다. 칠기는 어떤 형태의 기물에 옻액 등을 반복해 칠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한국은 영롱한 나전에 보존성이 우수한 옻칠을 결합한 ‘나전칠기(螺鈿漆器)’로 독보적인 아성을 구축했다.


한국의 나전칠기는 지금의 개념으로 보자면 컨버전스다. 독창적이다. 나전칠기 가구 예로 들자면 아무런 장식도 없는 나무 장 ‘백골‘에 나전으로 문양을 만든 뒤 옻을 칠하고 갈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작품이 탄생한다. 나전의 영롱한 빛과 칠기의 은은한 광택이 어우러져 아름답다. 나전칠기의 예술성과 실용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유명세를 탔다. 고려시대 예성강 하류의 무역도시 벽란도를 찾은 동아시아와 아라비아 상인들이 원한 주요 교역품이다.”

출처: 손대현 장인 제공
나비당초문의걸이장.

-나전칠기를 어떻게 배우게 됐나.


"이북이 고향이다. 1949년 황해도 장연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1·4 후퇴 때 홀어머니와 월남해 어린시절을 제주도와 부산, 경기도 포천과 문산, 서울 등을 떠돌았다. 먹고 사느라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친구 소개로 서울역 근처 사무실에 일하러 다녔는데, 그 건물 2층에 나전칠기 작업장이 있었다. 호기심에 시간날 때마다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도 하고 어른들 담배 심부름도 했다. 한번은 완성품을 포장하는 날 무지개처럼 반짝이는 자개가 박힌 보석함과 쟁반을 봤다. 푹 빠졌다. 그 때 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작업장에서 하던 칠은 천연 옻이 아니라 합성 도료인 캐슈였다. 그곳에서 3년간 일을 하면서 귀동냥으로 옻칠의 세계를 접했다. 한국 옻칠의 대가인 김봉룡, 민종태, 김태희 세 분을 알았다. 그 중 수곡 민종태 선생님이 일을 많이 하고 인품도 넉넉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직접 뵙지 못했지만 혼자서 존경하고 흠모했다.

출처: 손대현 장인 제공
흑칠한 기물을 광을 내기 위해 갈아내고 각분으로 광을 내는 모습.

본격적으로 옻칠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고 1968년 연락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경기도 성남에 있는 민 선생님의 작업장을 찾았다. 그날 선생님을 뵙지 못했다. 하지만 꼭 배우겠다는 오기가 생기더라.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찾아갔다. 마침내 한 자리가 비었을 때 선생님으로부터 출근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스승님의 공방은 일본 고객과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주문을 도맡았다. 소목부와 조각부, 옻칠부, 나전부 등 직원이 서른 명이나 되는 큰 규모였다. 선생님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일을 제대로 배우려면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공방 바로 옆에서 친구와 자취하면서 퇴근 후에도 공방에 들러 아무도 없는 작업장을 청소했다. 습기가 부족하면 물을 뿌려 놓곤 했다. 옻칠은 습기가 부족하면 작품이 안나온다. 정말 열심히 했더니 동료들이 열정을 알아주기 시작했고, 마침내 스승님 눈에도 들었다. 내 나이 스물여섯쯤 됐을 때 옻칠부 책임자였던 선배가 독립해 나갔고 그 자리를 대신했다.”

출처: 손대현 장인 제공
흑칠한 기물을 광을 내기 위해 갈아내고 각분으로 광을 내는 모습.

-칠 재료로 옻 수액을 사용하는 이유는.


"옻 수액은 마르면 다른 화학 도료로 구현할 수 없는 깊고 그윽한 빛을 낸다. 습기와 벌레, 열에 강하다. 나무에 발랐을 때 나무가 뒤틀리지 않게 잡아주는 힘도 있다. 옻나무는 백숙을 할 때도 이용하지만 도료로 이만한 재료가 없다.”


-옻은 사람에 따르지만 심하게 타는 사람도 있다. 배우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하고 싶은 일을 배우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래도 처음에는 온몸과 얼굴에 옻이 올라 고생했다. 얼굴은 퉁퉁 붓고, 가려워서 긁으면 진물이 났다. 보기에도 흉했다. 선배들이 ‘계속 옻칠할 수 있겠느냐’고 걱정해 줄 정도였다. ‘왜 나만 이렇게 옻이 심하게 오를까’ 고민도 했다. 하루는 기분 전환 겸 기차를 타고 춘천에 다녀왔다. 그런데 그 다음 날 피부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서서히 좋아진 게 아니라 순식간에 좋아진 거다. 너무 신기하고 기쁜 마음으로 공방에 출근했다. 그날 이후 옻을 타지 않는다."

출처: 손대현 장인 제공
옻칠을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인 귀얄 사진.

-일을 하면서 우여곡절은 없었나. 


"이겨낼 수 없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스승님의 공방에서 일하던 시절 큰 어려움 없이 즐겁게 열심히 배웠다. 다른 유명 공방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조건이 좋았지만 스승님의 사랑이 각별해 제안을 거절했다. 스승님은 댁 근처 스승님 댁과 불과 5분 거리에 방을 얻어주고 작업을 하게 하셨다. 삼시세끼 따뜻한 밥도 보내주셨다. 당시에는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78년 말 결혼한 뒤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독립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도 스승님은 선뜻 허락했다. 당신에게 들어 온 주문의 7할을 나에게 맡겼다. 경기가 안좋았지만 선생님 덕분에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후 7~8년 동안 일이 정말 많았다.


나는 지금도 주문받은 작품만 만든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경기가 좋은지 나쁜지 잘 모른다. 1980년대 자개농 붐이 일었을 때도, 또 자개농에 대한 인기가 사그라질 때도 주문이 크게 줄지 않았다. 진짜 옻칠한, 제대로 만든 작품을 원하는 고객은 항상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 주문이 조금 줄긴 했지만 늘 현금을 주고 재료를 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출처: 손대현 장인 제공
나비당초문구절판.

-스승과 같은 호를 쓰는 경우는 처음 본다.


"수곡은 스승님이 쓰시던 호다. 내가 처음부터 쓰던 호가 아니다. 스승님도 당신의 스승이셨던 전성규 사조(師祖)님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했다. 스승님이 작고하기 여섯 달 전쯤 부르시더니 유언처럼 호의 내력을 일러주시고 사용하라고 하셨다. 불가에서 고승이 수제자에게 의발(衣鉢)을 전수하듯 나전칠기의 종손임을 공인하는 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척 소중하다. 곤지암 골짜기에 차린 공방 이름도 수곡으로 지은 이유다. 수곡공방을 짓고 처음에는 이 곳에서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새 소리가 들리더라. 작업하다 주변을 한 바퀴 돌면 행복하고 마음이 편해진다." 의발은 승려가 사용하는 가사(袈裟)와 바릿대(식기)를 말한다. 스승으로부터 전해진 ‘불교의 깊은 뜻’이라는 의미다.”

출처: 손대현 장인 제공
모란문 건칠화병.

-수많은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꼽자면.


"1994년 서울 신라호텔에서 초대전을 열었을 때 일본에서 온 70대 노신사가 따로 만나자고 기별이 왔다. 전시회를 보고 가보인 도의 칼집과 칼자루를 나전칠기로 장식하고 싶다고 했다.


그 분은 작업을 하는 8개월간 네 번이나 찾아와 나를 대접했다. 작품을 잘 만들어달라고 매번 200만원씩 주고 갔다. 당시 200만원이면 큰 돈이었다. 마음 속으로 이미 받을 만큼 받은 것 같은데, 도대체 얼마를 주려고 이러나 싶었다. 검은 옻칠 바탕에 소라 껍데기 야광패로 꽃을 만들고 국산 전복으로 줄기와 잎을 은은하게 표현한 모란당초문 자개가 박힌 작품을 만들어 전달했다. 이전 근엄했던 노 신사의 얼굴이 작품을 보더니 변하더라. 소년같이 기뻐했다. 표정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는 수고비로 1000만원을 추가로 주고 작품을 챙겨갔다.


삼층장을 사간 아주머니도 기억에 남는다. 그분이 외출했다가 몹시 불쾌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혼자서 삼층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어느 순간 언짢은 기분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곰곰 생각해봤더니 바로 삼층장 때문이었다더라. 아름다운 자개와 검지만 우아한 옻칠이 어우러진 작품이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힘을 가진 모양이다. 그 아주머니는 나중에 세 딸에게 삼층장을 결혼선물로 주고 싶다며 선금을 주고 장롱을 세 개나 맞춰 갔다.


최근 작품을 주문한 한 할아버지도 기억에 남는다. 손자가 용돈을 종이 상자에 모으는 모습을 보고 손자에게 줄 작은 나전칠기 함을 주문했다. 작품을 배달하러 가서 보니 그다지 부유한 분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사랑하는 손자에게 작품을 물려 주려 적지 않은 돈을 선뜻 쓰기로 하신 뜻이 너무나 고마웠다."

출처: 손대현 장인 제공
유산지에 줄음질한 나전을 붙이고 시문한 문양대로 끊음질 하는 모습.

-주로 어떤 사람들이 작품을 의뢰하나.


"나전칠기에 관심을 가진 개인 고객도 있지만, 기업고객도 많다. BMW와는 협업을 했다. 자동차 내부의 데시보드를 나전칠기로 꾸몄다. 내가 옻칠장으로 나선지 50년을 맞은 2015년에는 윌리엄그랜트앤선즈코리아와 공동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윌리엄그랜트앤선즈는 당시 싱글몰트 위스키인 ‘발베니 50년산’을 한국에 첫 출시했는데 내가 나전칠기를 만들기 시작한지 50년이 된 것을 알고 신제품 출시 기념회에 작품을 전시해달라고 했다. 발베니 50년산은 두 병으로 구성된 한 세트 가격이 1억원에 달하는 명품 위스키다.


삼성그룹도 큰 고객이었다. 특히 창업주인 이병철 전 회장도 나전칠기 작품을 좋아했다.스승님 밑에서 일할 때 스승님은 이 회장의 사무실 집기나 외국으로 나가는 선물을 주로 맡았다. 나는 대형 PDP나 태블릿 PC 등의 외장을 꾸미는 일을 책임졌다. 외국에 나가는 선물이나 리움박물관 기념품 등 전통적인 작품 제작도 자주 의뢰받았다.


한국 대표 공예품으로 우리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할 때나, 외국 원수가 방한할 때 선물로도 많이 나갔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이 유럽 6개국을 순방했을 때 나비 문양 서류함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때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국을 찾았을 때도 선물을 만들었다."

출처: 손대현 장인 제공
(왼)십장생도교지함, (오)나전나비당초문봉채함.

-나전기법이 독특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은 습기가 많은 기후 탓에 칠기가 널리 퍼졌다. 칠기의 한 종류인 옻 재료와 정제기법도 우수하다. 그러나 장인의 기술로만 따져본다면 우리나라가 단연 최고다. 고려시대 확립된 섬세하고 세련된 칠기 기술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이 때 전복 껍데기와 바다거북 등딱지인 대모를 얇게 저며 각질 뒷면에 안료를 칠하는 복채기법이 개발됐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전통기술 중 하나인 화각 공예도 나전칠기가 뿌리다.


나전칠기를 우리나라 옻칠 공예의 대표로 꼽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중국도 자개를 쓰지만 우리와 달리 상감하듯 나무를 파서 끼워 넣는다. 일본은 옻칠이 발달했지만, 자개로 장식하지 않고 금가루나 은가루를 뿌리는 시회(蒔繪)기법을 주로 쓴다. 우리 민족만 자개를 붙여 토회작업과 옻칠로 두께를 맞춘 다음 다시 갈아내는 방법으로 작품을 만든다."

출처: 손대현 장인 제공
나비당초문이층농.

-훌륭한 전통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후학도 양성해야 할텐데.


"기회가 될 때마다 다양한 곳에서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문화재보호재단 전통문화의 집이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옻칠반 교육을 맡았다.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는 일반인이 전통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기초반 2개, 연구반 2개, 전문반 1개로 총 5개의 옻칠 과정을 맡았다. 강의 초기에는 학생들의 연령대가 30~70대였는데, 나중에는 10대들도 수강하더라. 옻이 올라 고생을 하면서도, 나전칠기의 매력에 빠져 공방을 차리고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제자들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 해마다 인사동에서 개최되는 ‘옻빛전’이 활성화하는 걸 볼 때마다 자부심에 마음이 뿌듯하다.


요즘 서울대에서 미대 공예과 학생을 대상으로 전통옻칠기법을 활용한 현대적 공예에 대해 강의한다. 겨우 초등학교를 마친 내가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셈이다. 똑똑한 제자를 키우다 보니 군자삼락(君子三樂) 중 하나를 알 것도 같다.”


군자삼락은 ‘맹자’에 나오는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을 말한다. 첫째는 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즐거움이요, 둘째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즐거움이며, 셋째는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가르치는 즐거움이다.

출처: 손대현 장인 제공
기물위에 나전을 붙이고 나전의 두께가 올라간 만큼 토회로 고르게 발라준 후 숯으로 나전이 나오게 갈아내는 모습.

-아무리 좋아하는 직업도 50년이 훌쩍 넘었으니 지겨울법도 하다.


"지겹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체력이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도 밤에 잠자리에 들 때면 ‘빨리 내일이 와야 또 일할 수 있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 아이들이 허락만 해주면 공방에서 먹고 자며 일을 하고 싶다. 스승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고 있다. 스승님은 늘 ‘겉칠을 번드르르하게 해놓으면 속이 보이지 않지만, 속이야말로 절대로 속이면 안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후학들에게 당부와 바람이 있다면.


"디자인이나 문양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어도 제작과정이나 기법은 바뀌면 안된다. 빨리 하려고, 쉽게 하기 위해 제작과정을 바꾸거나 현대화해 버리면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제대로 된 기법을 잃게 된다.


대신 디자이너와 협업해 새로운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면, 한국 최고의 전통 공예기술을 세계에 어필할 수 있는 날이 꼭 오리라 믿는다. 뒤를 이을 제자도 있으니, 이제 우리 나전칠기가 세계에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 jobsN 박지환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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