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학벌도 나쁘고, 인맥도 없습니다" 어느 경단녀의 '반란'

조회수 2020. 9. 28. 11:42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14년간 뷰티 홍보하다 유기농 립스틱 브랜드 창업한 워킹맘

최근 스타트업 붐이 일면서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정부의 다양한 지원사업으로 창업의 길은 활짝 열려 있지만, 막상 창업을 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

홍보회사에서 14년 간 뷰티 브랜드 홍보를 담당하던 원혜성(39) 씨는 딸 출산 직후 창업을 결심했다. 유기농 립스틱을 아이템으로 ‘율립’ 브랜드를 만들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미국시장에도 진출했다. 1인 회사로 시작했지만 투자를 받아 주식회사도 만들었다. 경력단절녀에서 당당한 사업가로 거듭난 원 대표를 만났다.

jobsN
 - 브랜드 이름 '율립'에 대해 소개해달라.
“제 딸 이름 율희에서 딴 율(YUL)과 입술을 뜻하는 립(LIP)을 합쳐서 ‘율립’이라고 이름 지은 화장품 브랜드에요. 엄마와 딸이 함께 쓸 수 있는 립스틱을 만들고 싶어서 지은 이름이죠. 제 딸이 커가면서 자연스레 거울 앞에서 엄마 화장품을 쓰는 걸 보고 안심할 수 있는 립스틱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친환경 유기농 재료를 써서 립스틱을 만들었습니다.”

- 뷰티 산업은 이미 포화 상태인데. 창업 아이템으로 화장품을 선택한 이유는.
“레드오션이죠. 한국엔 정말 많은 화장품 브랜드와 제조업체들이 있어요. 창업을 결심하고 아이템을 고민하다가 그래도 가장 관심있고 잘 알고 있는 영역에 도전하는게 맞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창업 이전에 뷰티 관련해서 일해온 터라 화장품에서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10대를 대상으로 여린 입술을 보호할만한 순한 립스틱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10대 아이들이 성분 같은 거 따지면서 립스틱을 쓸까요’라는 의견이 많았어요. 시장조사를 해보니 맞는 말이더군요. 그래서 10대가 아닌 30~40대를 주요 소비층으로 정하고 다시 고민했습니다. 아이에게 해로울까봐 먹고 바르는 걸 조심하는 엄마들, 저처럼 민감한 피부를 가져서 고민이 많은 여성들을 생각해서 친환경 유기농 립스틱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건강이 안 좋은 분들이나 채식주의자들도 예비 고객 같았습니다.”
출처: 본인 제공
딸 아이가 율립 립스틱 바르는 중.

- 화장품에 대해 원래 관심이 많았는지.
“어렸을 적부터 화장품 ‘덕후’라고 불리울 정도로 관심이 무척 많았어요. 제 피부가 지나치게 민감했기 때문입니다. 해외 유명 브랜드 화장품을 써보고 싶어도 제 피부에는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해외 사이트를 보고 직접 천연 원료로 화장품도 만들어 보고 비누도 만들어 써보곤 했습니다. 방산 시장 같은 곳에 가면 원하는 천연 재료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 습관이 지금 사업의 바탕이 된 것 같아요.”

- 회사에 오래 다녔다고 들었는데, 창업 전에는 어떤 일을 했었는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뷰티 매거진에 취업해서 에디터를 했어요. 잡지에서 글도 쓰고 기획을 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만해도 뷰티 매거진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시절이었어요. 잡지가 없어지기 일수였죠. 4년 동안 3번의 잡지 폐간을 경험했어요. 그래서 그만두고 일반 회사에 여러 번 문을 두드린 끝에 홍보대행사에서 제2의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전에 하던 일이 뷰티 쪽이라 아모레퍼시픽, 헤라, LG생활과학 등 뷰티 관련 브랜드 마케팅과 홍보를 주로 담당했어요. 아이를 낳기까지 홍보회사에서 14년 정도 일했습니다.”


- 창업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
“개인적으로 아픈 기억이 있어요.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는데 IMF 시절부터 하나씩 잃어가면서 무너지기 시작하는 걸 직접 봤습니다. 빚이 점점 늘어가면서 부모님이 어떻게 변하는지,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대하는 게 어떻게 변해가는지 다 지켜봤어요.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생기더군요.


잡지사를 그만두고 직장을 구하러 다닐 때, 입사 지원했던 200군데에서 떨어졌어요. 궁여지책으로 알바를 했었는데, 알바비마저 제때 받지 못하자 급격히 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카드비를 제때 내지 못해서 매일 아침 9시에 카드사에서 독촉 전화를 받은 때도 있었어요. 이런 생활이 반복되니까 극단적인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기억들 때문에 두려움이 많은 성격이에요. 창업을 결심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출처: 본인 제공
코스트코에서 율립 홍보 중.

-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직후 창업을 결심하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아이를 늦게 가진 편이었어요. 집이 용인이었는데, 직장이 있는 서울까지 왕복 3시간 거리여서 임신한 몸으로 출퇴근이 쉽지 않았어요. 그리고 14년 차 차장이었는데, 홍보회사는 직급이 올라갈수록 일에서 영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어요. 임신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도 일하기는 쉽지 않을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표를 내고 일을 그만뒀어요.


아이를 낳은 후 100일이 지났을 때부터 다시 직장을 구하러 다녔어요. 육아 문제 때문에 회사가 너무 먼 곳은 힘들었어요. 그래서 우선 분당이나 판교 등지의 회사에 원서를 냈는데 모두 떨어졌어요. 조금 영역을 넓혀서 강남에 있는 회사들에 원서를 냈어요. 면접을 봐도 14년 차에 아이 엄마를 쉽게 받아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퇴직금 받아놓은 돈도 떨어져가니까 산후 우울증이 오기 시작했어요. 사업 아이템을 떠올리기 시작했던 것도 그맘 때 부터였는데, 우울증 영향으로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어요. 그때 발견한 것이 구글 캠퍼스에서 엄마들의 스타트업을 도와주는 ‘캠퍼스 포 맘스(Campus for Moms)’였습니다.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 구글 캠퍼스 ‘캠퍼스 포 맘스’에서 어떤 것들을 배웠나.
“엄마들에게 창업을 위한 교육과 조언을 해주는 교육 프로그램이었어요. 다양한 전문가들로부터 컨설팅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엄마들을 위해 교육 시간이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였어요. 아이들의 유치원에 있을 시간이었죠. . 저같이 아이를 데려와야 하는 엄마들을 위해 보육 시설과 아이를 봐주는 베이비 시터가 있었어요. 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맘 놓고 교육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구글 캠퍼스에 들어갔을 때 처음 제출했던 창업 아이템은 ‘실버 세대를 위한 SNS앱’이었어요. 그런데 수업을 들어보니 앱을 개발하는 기술자의 역할이 큰 아이템이라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업을 들을수록 창업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죠. 내가 좋아하고 잘 아는 분야를 해야 안 지치고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했습니다. 화장품 아이템을 찾아보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해요.”

출처: 본인 제공
트레이드쇼에서 립스틱 홍보 중.

- 오랫동안 회사에서 일하다가 창업을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텐데.
“뷰티 브랜드의 홍보 마케팅 일을 오래 해왔다고 자부했지만, 막상 사업으로 하려니 차원이 다른 일이었어요. 천연 원료를 선택해서 제조하고 완제품을 생산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유기농 화장품 전문 OEM 공장을 찾아서 수도 없이 테스트를 했어요. 천연 재료를 섞어 실험실에서 만든 색감과 공장에서 나오는 시제품 색감을 맞추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케이스를 디자인하고 포장할 상자를 만드는 일까지 신경써야 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죠. 제품을 출시하기 까지 1년이 걸렸습니다.”


- 창업 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는지.
“창업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그동안 모아뒀던 돈과 함께 창업 지원 사업들도 이용했어요. 작은 돈도 절실했거든요. 문제는 생산을 위한 자금이었습니다. 직업도 담보도 없던 저는 은행에서 대출 받는 게 불가능했어요.


방법에 대해 조언을 구하려고 구글 캠퍼스에서 도움을 받았던 스트롱벤처스 배기홍 대표께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어요. 그랬더니 클라우드 펀딩을 추천해 주시더군요. 펀딩을 해보고 실패하면 접자는 생각으로 텀블벅에 500만원을 목표로 펀딩을 올렸어요. 그런데 3일 만에 500만원을 넘더니 최종적으로는 1750만원이 모였습니다.


목표했던 것에 비해 3배 이상의 선주문이 들어온 셈이죠. 뛸듯이 기뻤습니다. 생산을 위해 필요한 나머지 돈은 제2금융권에서 빌렸어요. 그렇게 첫 생산으로 립스틱 3000개를 만들었습니다. 펀딩에 성공하자 유통업체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요. 3개월 만에 1차 제조물량을 모두 팔았습니다.”

 

- 제품을 처음 발송했을 때 고객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제가 뷰티 브랜드 홍보 담당이었는데, 막상 일인 기업으로 사업을 하다보니 내가 만든 제품을 홍보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어요. 요즘 유행하는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를 이용해보려고 만나보니 판매 금액의 50프로가 넘는 수수료를 요구하더라구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품을 받으신 분들이 스스로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율립 립스틱에 대해서 후기를 올려주기 시작했어요. 진솔하게 장점을 써주신 분들이 많아요. 그런 포스팅이 하나 둘 쌓여가고 있어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출처: 본인 제공
고객에게 보낼 상품을 직접 준비한 직후.

- 이후 어떤 방법으로 사업을 확장시켰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스킨 케어를 위한 화장품이나 생리대 등은 천연 재료를 사용한 제품에 관심이 많지만, 천연재료를 쓴 립스틱에 대해서는 그다지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외국 시장을 공략해보기로 했어요.


미국은 천연 립스틱이 많고 오가닉 시장이 커요. 우선 아마존(AMAZON)에 입점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때 마침 한국무역협회와 아마존 글로벌 셀링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셀러 교육 프로그램이 열렸어요. 교육에 참여해서 아마존에 입점하기 위한 과정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화장품의 경우 제조업자의 인증을 받는 증명서를 비롯해서 제품시험성적서 등 여러 과정을 거쳐야 아마존 등록이 가능했습니다. 8주의 교육 끝에 2018년 5월 드디어 아마존에 율립 립스틱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어요.”


- '율립'의 매출은 어느정도인지.
“ 한국에서는 현재 네이버 스토어팜과 일부 편집샵에서 판매하고 있어요. 매출은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에요. 월 약 2500만원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대형 유통업체를 통해 판매하지 않아서 아직은 성장 단계지만, 선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존은 시작 단계라서 이제야 서서히 이윤이 생기고 있어요.”


- 유기농 재료를 고집하면 이윤을 남기기가 힘들텐데.
“율립 립스틱 심지의 경우, 제조 가격이 일반 립스틱의 4배에요. 재료의 차이 때문이죠. 기본 베이스 재료로 비타민나무열매오일, 동백 오일, 달맞이꽃 종자유, 시어버터, 보리지 오일 등을 써요. 색소 재료로는 천연 무기 염료, 자색 고구마, 자색 무, 적색 산화철 등을 사용하죠. 재료가 비싸 대량 생산을 하지 않으면 이윤이 줄어드는 립스틱이에요. 우리 립스틱을 찾는 진성 고객을 많이 만드는 게 브랜드를 힘있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 최근 시드머니 투자를 받게 됐다고.
“직원이 저를 포함해 세 명이에요. 일주일에 한 두번 공유 오피스에서 만나 회의하는 시간 외에는 모두 재택 근무를 하죠. 율립을 계속 지켜본 스트롱벤처스로부터 최근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씨드머니를 투자받았어요. 아마존에 입점하고 미국 진출을 시도하는 것을 보고 투자하신 것 같아요. 일인 기업이었는데 주식회사로 형태를 바꿨습니다.”

출처: 본인 제공
미국 홍보영상 촬영 중.

- 무척 바빠보인다. 취미를 즐길 여유는 있는지.
“영화를 좋아하는데 아이를 낳고 본 영화로는 ‘라라랜드’가 마지막이에요. 눈 뜨면 아이 유치원 보내고 일을 하다가 아이가 돌아오면 잘 때까지는 육아를 해요. 아이가 잠들면 새벽 3~4시까지 다시 업무를 봅니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가 이렇게 일하다가는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틈 나는 대로 운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플라잉 요가나 필라테스를 해요. 며칠 전에는 필라테스를 하다가 그대로 잠든 적도 있어요. 사업을 하다보면 늘 피곤합니다.”


- 직장을 다니는 것과 사업을 해보니 느끼는 차이점이 있다면.
“직장을 다니다보면 너무 힘들 때는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꿈이 보이지 않았거든요. 사업을 하다보니 힘은 들어도 꿈이 있어요. 성공과 실패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내가 져야하잖아요. 돈 한 푼 없이 용감하게 뛰어든 사업이지만, 꿈을 꿀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미국 시장에서 성공해보고 싶어요. 미국에서 스타트업에 성공하신 한국계 분들이 많아요. 근데 면면을 살펴보면 학벌도 좋고 경력도 화려해요. 그에 비하면 전 지극히 평범한 애 엄마죠. 학벌도 약하고 인맥도 없는 ‘경력단절녀’지만, 반란을 한 번 일으켜보고 싶습니다.”

글·사진 오종찬

jobarajob@naver.com

잡스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