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엄마는 40년째, 딸은 4년째..사람 살리는 통화 모녀

조회수 2020. 9. 28. 17:45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자살 결심한 사람 힘 내도록 이야기 들어주는 게 우리 일입니다"

첫 2년은 고민을 털어놓는 분들의 아픔을 그대로 느꼈어요.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적도 있죠. 죽을 만큼 억울한 일을 겪었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후유증이 몇 달은 가더라고요.

출처: jobsN
박주선 한국생명의전화 상담원.

서울시 19개 한강다리에는 조금 특별한 전화기 74대가 있다. 일반적인 공중전화가 아니다. 전화를 거는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다.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을 찾은 이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가져다 놓았기 때문이다. 이 전화기의 이름은 ‘SOS 생명의전화’. 상담원들이 24시간 365일 고민을 들어주고 삶의 고단함과 아픔을 나눈다. 학교 성적 때문에 고민이라는 학생부터 동료와 불화로 퇴사를 고민하는 직장인까지. 전화를 거는 사람도 각양각색이다.


SOS 생명의전화를 운영하는 곳은 사회복지법인 한국생명의전화. 1963년 호주에서 알렌 워커(Alan Walker) 목사가 설립한 국제기구다. 1976년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상담 기관으로 출범했다. 늦은 새벽까지 삶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전화를 받는 상담원은 보수를 받지 않는 자원봉사자. 1980년 25살 나이에 전화상담을 시작해 40년째 봉사를 이어오고 있는 박주선(65)씨를 만났다.


-한국생명의전화를 알게 된 계기는.


“일신제강(현 동부제철)에 다니고 있었다. 출근 전 한 시간 동안 피아노를 배우고 퇴근하고 나면 중국어를 공부했다.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그러다가 1980년 급성늑막염에 걸렸다. 늑막은 폐 표면과 갈비뼈 부분 안쪽을 덮고 있는 막이다. 늑막염에 걸리면 발열·호흡곤란·가슴통증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병원에 입원해 병상에서 생활했다.


병상에 있을 때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었다. 우연히 지면 끄트머리에 있는 ‘한국생명의전화 제1회 시민상담교실’ 홍보 기사를 봤다. 서울 시민을 모집해 전화상담원 교육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퇴원 후 이 교육을 듣고 봉사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몇 시간이나 활동하나.


“낮·밤 상담이 있다. 낮에는 3시간30분씩 상담원끼리 일정을 정해서 활동한다. 오전 8시부터 11시30분, 11시30분부터 오후 3시, 3시부터 6시30분, 6시30분부터 10시까지 한다. 밤 상담은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한다. 24시간 상담 전화를 받는 것이다. 규정상 한 달에 2번 이상 상담해야 한다. 나는 격주로 상담 봉사를 한다. 상담 사례를 공부하기 위해 상담원끼리 소모임을 열어 활동한다. 한 주에 한 번 정도 사무실에 나간다.”


-상담 전화가 자주 오나.


“전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다음 전화가 걸려온다. 빨리 받지 않는다고 화내는 사람도 있다. 전국 19개 센터가 있다. 전화를 건 사람과 가장 가까운 센터에서 받는다. 한 사람당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다.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과는 가급적 오래 통화한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길게는 2시간가량 통화할 때도 있다.”

출처: 한국생명의전화 홈페이지 캡처
전화상담사 양성과정 교육내용.

-어떤 전화가 주로 걸려오나.


“일상에서 겪는 문제부터 자살 생각까지 다양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학생들은 학교 성적이 잘 안 나왔는데 부모님이 야단쳐서 속상하다고 전화를 한다. 직장인은 동료와 갈등 때문에 회사를 다니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해고를 당해서 못 견딜 만큼 힘들다고 털어놓는 사람도 있다.”


-본인만의 상담 노하우가 있다면.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공감 능력을 활용한다. 전화를 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일단 다 들어주고 믿어준다. 우리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수 있지 않나. 당사자가 미처 못 본 해결 방안을 제안할 수 있다. 또 힘을 낼 수 있도록 지지하고 격려해준다.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만 받던 사람들이 응원을 받으면 힘과 용기를 얻는다.”


-상담원에게 화풀이하는 사람은 없나.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나에게 화풀이를 한다고 같이 화내지는 않는다.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 화를 내는 게 아니지 않나. 오히려 화를 내면 그만큼 이 사람이 힘들다고 생각하고 얘기를 잘 들어준다. 이야기를 잘 듣고 공감해주면 전화를 건 사람이 화내서 미안하다며 사과한다. 힘들고 삶이 고달파 생명의전화를 찾는 것 아닌가. 우리는 상담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마음 공부를 한다.”


-일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은.


“1년에 한 번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봄 학기에는 상담에 필요한 이론 수업을 한다. 가을에는 실습을 한다. 지금 학기당 교육이수 비용은 30만원 정도다. 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상담을 시작했을 때는 25살 이상만 지원할 수 있었다. 남의 고민을 들어주려면 어느 정도 나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금전적인 이익은 전혀 없나.


“없다. 전화상담 기관이라 예산도 넉넉하지 않다. 행사 때문에 차를 대절할 때도 상담원끼리 1,2만원씩 모아서 낸다. 오히려 내가 돈을 쓰는 편이다.”

박주선씨 제공

-어떤 분들이 이 봉사를 하나.


“생명을 아끼는 사람들이 온다. 성비로 따지면 여성이 대부분이다. 연령대와 직업은 다양하다. 나처럼 어렸을 때 봉사를 시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은퇴한 학교 선생님이나 사회복지사도 온다.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직장인도 상담 봉사를 한다.”


-일 하면서 뿌듯할 때는.


“상담이 끝나고 전화를 끊기 전 ‘고맙습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라고 인사하는 분들이 있다. 자살 생각을 했던 어떤 분은 상담이 끝나고 ‘1년만 더 살아보겠습니다’라고 했다. 전화로 하는 상담이라 내가 상담을 잘 했는지 제대로 알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힘이 나고 보람을 느낀다. 요즘엔 국제전화 요금이 저렴해 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분들도 종종 전화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이 위기만 잘 넘기도록 도와주면 희망을 스스로 찾는 사람들도 많다.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린다. 추운 겨울 한강에 뛰어들려고 하는 사람에게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지금은 너무 춥지 않냐, 다시 한 번 생각해봐라’고 하면 살 마음을 다시 먹는 거다.”


-애로사항은.


“장난으로 성 상담을 해 달라는 전화가 가끔 온다.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니라 도움을 못 준다고 말한다. 오래 봉사한 사람들은 대처 능력이 있다. 하지만 신입 봉사자들은 많이 힘들어한다.


반복적으로 상담 전화를 하는 분들도 있다. 자신의 얘기를 누구도 들어주지 않아서 우리 기관에 계속 전화하는 거다. 병원에서는 우울증 약만 처방해주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히 상담을 해주고 있지만 환자를 우리에게만 의존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걱정할 때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전화하는 분들이 한 달에 한 번만 전화할 수 있도록 돕는다.”

출처: 조선DB
대를 이어 전화상담 봉사를 하는 박주선·조승하 모녀.

-전화상담 봉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한 마디.


“대가 없이 남을 돕는 일은 내 삶에 좋은 영향을 준다.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사회도 건강해진다. 시간이 없고, 경제 상황이 넉넉지 않아서 못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불가능한 이유를 찾다 보면 봉사활동은 시작하기 어렵다. 지금 당장 남과 나눌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전화상담은 교육이 필요한 전문 봉사활동이다. 자긍심도 가질 수 있는 일이다. 관심이 있으면 도전해보라.”


-언제까지 할 생각인가.


“20대에 시작해 40년째 봉사를 하고 있다. 귀가 잘 들리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는 한 계속 하고 싶다. 내 딸도 25살 때부터 4년째 상담 봉사를 하고 있다. 좋은 이야기만 듣고 살기를 바라는 엄마의 입장에서 처음은 말렸다. 나이가 더 들면 그때 하라고 권했다. 그랬더니 ‘엄마도 그 나이에 시작하지 않았냐’면서 자신이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어서 좋다고 하더라. 그래서 ‘좋아서 하는 일이면 해보라’고 했다.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누구에게나 축복이 아닌가.”


글 jobsN 송영조

jobarajob@naver.com

잡스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