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대한민국 아빠들은 늘 등산복만 입을까?

조회수 2020. 9. 18. 15:3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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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좀 바꿔 입혔을 뿐인데, 아빠들의 인생이 달라졌다
《THE NEW GREY》 편집장 여대륜

청바지는 30년 만에 입어보고, 머리를 꾸며본 것도 결혼식 이후 처음이다. 사진이라곤 설악산 대청봉에서나 찍던 것이 일상인 가장들. 수줍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카메라 앞에 선 그들은 곧잘 자세를 잡고 숨겨둔 끼를 드러냈다.


변한 것은 패션뿐인데, 삶을 대하는 아빠들의 마음은 새롭다.

‘더 뉴 그레이’는 대한민국 평범한 아저씨를 대상으로 하는 패션 ‘메이크오버(Makeover)’ 캠페인이다. 평범한 중년 남성에게 새로운 패션을 제안함으로써 잊고 지낸 멋을 일깨워주고, 잃어가는 자존감을 되찾아주는 프로젝트다. 더 뉴 그레이를 이끄는 여대륜 씨를 이태원에서 만났다. 그는 더 뉴 그레이 프로젝트를 담은 잡지 《THE NEW GREY》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시작은 사진에 담긴 아빠의 패션에서였다. ‘아빠는 왜 늘 등산복만 입을까. 분명 젊은 시절에는 멋을 낸 경험이 있을 텐데. 아빠의 스타일은 없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던 것.


“멋은 일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아저씨들도 즐길 수 있어요. 단지 멋을 누릴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이 없을 뿐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그 용기를 만들어드리자’ 해서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20명의 중년 아저씨를 무작위로 만났다. 그들의 이미지에 맞는 패션을 제안하고 옷을 입혀 사진을 찍고 그들의 이야기를 잡지에 담았다. 반응은 놀라웠다. 단 하루,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패션 스타일 하나로 완전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또한 잊고 지냈던 청춘 시절을 되찾았다는 기쁨도 컸다. 그날의 촬영을 SNS 프로필 사진에 올려 주변의 주목을 받으면서 덩달아 자존감도 올라갔다.


“패션은 가장 직관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배가 나오고, 머리가 빠지고, 매일 같은 옷만 입는 우리네 아버지. 그들이 ‘짠’하고 변신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4년간 사업 실패, 다시 시작

더 뉴 그레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건 여대륜 씨가 몸담은 중년 남성 패션 에이전시 ‘헬로우젠틀’이다. 청년 창업가 권정현 씨를 대표로 여대륜, 이남건 씨 등이 합심해 2014년 문을 열었다. 중년 남성을 위한 패션 코디를 제안하고 중년 패션 리더를 키우는 것이 주 아이템인 스타트업이었다. 여대륜 씨는 권정현 대표의 한양대 컴퓨터공학과 후배로, 헬로우젠틀의 마케팅을 담당했다. 투자를 받고 사업을 키웠지만, 경험 부족으로 2017년 10월 문을 닫아야 했다.


“4년 동안 앱을 만들고, 쇼핑몰을 운영하고 카페도 열었지만 모두 망했습니다. ‘중년’이란 키워드로 수렴되는 사업이었는데, 잘 풀어내지 못했죠.”


사업을 접고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권정현 대표가 다시 그를 찾았다. “요즘 바빠? 다시 같이 일하자”, 단 두 마디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좋아요!”를 외쳤다.

더 뉴 그레이 프로젝트는 지난해 가을, 와디즈 펀딩을 통해 첫발을 내딛었다. 일명 ‘우리 아빠 프사 바꾸기’. 중년이라면 누구나 참여 가능하고 ‘아빠’를 강조해 자녀들이 신청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before & after’를 기본으로, 패션 스냅과 프로필을 촬영했다. 상·하의, 신발, 재킷을 포함한 옷 세트와 뉴 그레이 화보집을 선물하는 데 드는 비용은 총 19만 9000원.


펀딩은 개시 15분 만에 마감됐다. 추가로 열 명을 더 모집해 133% 달성, 총 800만 원이 넘는 금액이 모였다. 지난 2월에도 똑같은 리워드를 진행해 20분 만에 100%를 달성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기쁨과 안도의 눈물이었다.

“가족보다 직장이 먼저였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술을 좋아한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불행한 세대다.

요즘처럼 텔레비전에서 알콩달콩 신혼 생활 하는 걸 보면, 저렇게 사는 것도 사는 건데.

우리 세대 남자는 가장으로서 경제적 벌이가 전부였다.


돈 벌어다주는 기계.

친구 열 번 만날 거 한 번 만나고 애들과 놀아줬으면 어땠을까.”


- 어느 가장의 고백 -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서른세 분의 아버지를 만나고 느낀 건, 그들 모두 가족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며 살아왔다는 겁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면서 자신보다 가족이 늘 먼저였던 그들은 갑자기 주인공이 되니 분명 어색하고 불편했을 겁니다. 하지만 촬영을 하면서 어느새 그들은 30년 전 청춘으로 돌아간 듯했죠. 그걸 지켜보던 가족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그들은 옷을 바꿔 입혔을 뿐이지만, 그 작은 변화로 삶과 인생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움직임이다.


“멋을 포기하지 말라고, 인생을 포기하지 말라고 계속 메시지를 전하는 거죠. 변화는 도전입니다. 그동안 그들은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겁니다. 옷을 바꿔 입는 순간은 찰나지만, 그들의 인생이 조금이라도 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촬영이 끝나고 헤어지려던 찰나 여대륜 씨는그들의 눈에 고인 눈물을 봤다. 그 역시도 눈물이 났다. 두 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그 찰나의 순간을 공유하며 주고받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왜 그렇게 슬펐던 걸까.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주인공 김혜자는 ‘등가교환의 법칙’을 들어 이런 말을 했다. “귀중한 무언가를 희생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세상에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다”고. 아버지는 자신을 희생하는 대신 가정과 일터를 지켰다.


“대한민국 아빠들은 비슷해요. 가정을 위해 헌신하고 나보다 가정이, 가족이, 아이들이 먼저였어요. 패션에 대해서는 특히나 더. 그래서 지켜주고 싶은 겁니다. 더 뉴 그레이는 중년만을 위한 몰(mall)이나 브랜드가 아닙니다. 이 세상 남자를 위한 패션 제안이죠. 서울을 넘어서 더 뉴 그레이 도쿄, 상하이 등 세계적 기업으로 이끌어갈 계획입니다.”


글·사진 jobsN 서경리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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