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 막다 꺾인채 굳어져..제 손은 이렇게 휘어져 있습니다

조회수 2020. 9. 27. 23:2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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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못 하겠다 싶을 때, 한 번 더!
태권도 세계랭킹 1위 이대훈 선수

지난 1월 2일 MBC 〈라디오 스타〉 ‘스포츠 레전드’ 편에는 골프 여제 박세리, 바람의 아들 이종범,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등이 출연했다. 그리고 여기에 유일한 현역 선수인 이대훈 선수도 함께 했다. 그가 현재진행형 레전드라는 이유다.


방송 일주일 후인 1월 9일, 서울 강남의 ‘라미나 홈스토어’에서 그를 만났다. 이대훈 선수는 약속 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해 카페 안 갤러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태권도보다 방송으로 더 유명해진 것 같다”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이대훈 선수가 태어난 건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후 4년이 지나서다.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태권도 사범이자 관장이었고, 3살 터울의 형도 태권도 도복을 입고 있었다. 아버지와 형, 이대훈 선수는 모두 태권도 명문인 한성중·고등학교 동문이다.


“어릴 적부터 도장에서 놀고, 도장에서 자랐어요. 네 살 무렵부터는 늘 도장에 있었던 거 같아요. 아버지, 어머니도 늘 그곳에 계셨고, 형도 도장에서 운동하고 있었으니까요.”


한 분야에서 10년이 지나면 전문가 대접을 해준다는데, 그가 태권도를 시작하고 10년이 지났을 때는 고작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 사이 이대훈 선수는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큰 형들과 함께 훈련하고 뒹굴며 대회에도 출전했다. 그의 아버지는 ‘출전해서 경험을 쌓는 데 의의를 두자’고 했지만, 이대훈 선수는 형들에게 맞고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발차기를 날렸다. 승부욕이 남달랐던 어린 선수는, 점점 지는 경기보다 이기는 경기가 많아졌다.


“초등학생 때도 중학생 형들과 겨루었어요. 친형과 붙었을 때도 생각나요. 형한테 발차기를 한 번 맞았는데, 숨이 턱 하고 막히더니 안 쉬어지더라고요.(웃음)”


최연소 국가대표, 비운의 올림픽 스타


2009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청소년대표로 처음 발탁된 이대훈 선수는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낸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모든 대회가 다 중요했어요. 주변에서는 ‘이번 대회에서 이겨야 다음 대회를 나갈 수 있다’ ‘이번 대회가 네 인생에 정말 중요한 대회다’라고 이야기했죠. 당시에는 부담이 많이 됐어요. 슬럼프에 빠져 메달을 따지 못할 때도 있었고요. 한 번의 대회로 제 인생이 결정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어요. 과거의 대회가 제 현재를 바꾸는 게 아니라, 현재의 제가 저를 바꾼다는 걸요.”


워낙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가 된 터라, 그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됐다. 더구나 한국이 종주국인 태권도는 메달을 따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아직 있다. 체력만큼이나 멘털을 지키는 게 관건인 종목이다.


“태권도가 매력 있는 이유는, 동작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정신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태권도는 자기를 수련하는 종목이에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정신력을 지키는 게 중요하죠.”

이대훈 선수는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모두 금메달을 땄다. 월드태권도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하지만 올림픽에서는 ‘비운의 선수’로 불렸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는 체중을 줄여 58kg급에 출전해 은메달을 땄고, 2016년 브라질 리우올림픽에서는 다시 체중을 증량해 68kg급에 출전했지만 동메달을 땄다.


그러나 이대훈 선수는 이를 ‘불운’이라 여기지 않았다. 부상이라는 악재가 겹쳐 동메달리스트가 된 그는 뜻밖에 ‘올림픽 정신’의 상징이 된다. 당시 이대훈 선수는 8강에서 요르단 아흐마드 아부가우시 선수를 만나 8-11로 석패한다. 그럼에도 경기를 마친 뒤 웃으며 상대 선수를 축하해주고, 그의 팔을 번쩍 들어주었다.


“여러 대회를 치르면서 이기든 지든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선수가 되자’고 생각했어요. 누구에게나 올림픽은 큰 경기고, 모든 선수는 오래 준비하거든요. 비록 지더라도 상대방이 멋진 경기를 보여주었다는 건 그만큼 노력했다는 거니까 축하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이대훈 선수는 패자부활전으로 다시 경기에 임해 동메달을 딴다. 비록 3위였지만, 그가 승자에게 보여준 예의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투지는 ‘올림픽 정신’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고 그를 금메달리스트보다 더 화제가 된 동메달리스트로 만들었다.


“내년에 있을 도쿄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큰 대회라고 더 부담을 갖거나, 꼭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강박은 없습니다. ‘전보다 더 나은 선수’가 되길 바랄 뿐이죠.”


승부는 한계점에서 결정된다


이대훈 선수의 경기는 ‘역전승’이 많다. 경기가 길어지다 보면, 누구나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 이대훈 선수는 다른 선수보다 그 한계가 좀 늦게 찾아오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상대가 한계를 느꼈을 때 허를 찌를 수 있다. 그 순간, 승부가 결정된다.


“훈련하다 보면 정말 더는 못 하겠다고 느껴질 때가 와요. 그때 멈추면 안 돼요. 한계라고 느껴질 때 멈추면 그 지점이 한계치가 되지만, 거기서 한 번 더 차면 한계점이 더 높아지거든요. 그러다 보면 스스로 한계라고 느끼는 지점이 점점 더 멀어지는 거죠.”


어릴 적부터 시작한 운동이 힘들어 도망치고 싶은 순간은 있었지만,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의 멘털을 지켜준 건 다름 아닌 체력이었다. 바둑으로 인생사를 풀어낸 만화이자 그가 즐겨 본 작품인 〈미생〉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거든 체력을 먼저 길러라. … 이기고 싶다면 충분한 고민을 버텨줄 몸을 먼저 만들어. ‘정신력’은 ‘체력’이란 외피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 된다.”

이대훈 선수는 스포츠 영화를 좋아한다. 메이저리그 만년 꼴찌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마침내 메이저리그 최초 20연승에 도달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머니볼〉, 급조된 스키점프 국가대표들이 우여곡절 끝에 하나의 팀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 〈국가대표〉, 마라톤 경기를 다룬 〈페이스메이커〉나 야구 선수의 일대기를 그린 〈퍼펙트게임〉 등은 그가 즐겨 보는 영화다.


“종목은 달라도 정신은 비슷하더라고요. 포기하지 않으면,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거요.”


좋아하는 게임은 ‘축구’다. 그는 “태권도에서 지는 건 마인드 컨트롤이 되는데, 축구게임에서 지면 너무 분하다”며 웃었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한다. 악기를 다루고 싶어 기타를 배운 적도 있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OST 같은, 그가 좋아하는 곡을 한 곡 정도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구력과 끈기의 힘

이대훈 선수의 손. 네 번째, 다섯번째 손가락이 휘어있다. 겨루기를 하다가 손이 꺽인채 굳어졌다고 한다.

이대훈 선수의 손가락을 보면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손가락이 휘어있다. 겨루기를 할 때 방어를 하다 보면, 손이 꺾여 그렇게 굳어진다고 한다. 기타를 칠 때만은 손가락을 방어하는 데가 아니라 연주하는 데 쓸 수 있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풀고 나면, 다시 연습장으로 간다. 인터뷰 중 그의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오후 3시, 특별할 것도 없는 시간이라 ‘무슨 알람인지’ 물으니, “연습하러 갈 시간”을 알려주는 알람이라고 했다. 이 알람은 오전과 오후 하루에 2번 울린다. “선수에게 ‘단체운동’은 당연한 일이고, ‘개인운동’은 필수”라던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쉴 때도 개인운동을 쉬지 않는 게 이대훈 선수의 오랜 습관이다.


“제가 다른 선수들보다 유연성이나 순발력이 좋진 않아요. 다만 지구력이나 끈기는 좀 더 있는 것 같아요. 경기의 마지막까지 ‘힘이 남아있다’는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해요.”


태권도 세계 랭킹 1위 선수의 비결이 ‘성실함’이라니 어쩐지 맥이 풀리는 기분이지만 그의 경기를 보면 그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 경기한다. 과거의 기록이 현재를 잠식하지 않도록, 현재의 부담이 미래를 발목 잡지 않도록. 그가 알려주는 방법은 하나다. ‘오늘, 발차기를, 한 번, 더, 하는 것.’


글 jobsN 유슬기, 서경리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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