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같던 시절, 달력 X표 치며 하루하루 오기로 버텼더니..

조회수 2020. 9. 27. 23:4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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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에 X표 치며 오기로 버티던 평범한 나에게도 기회가 오더라"
박인숙 삼성물산 현장소장
업계 1위 건설사의 첫 여성 현장소장 발탁
“여성도 현장소장 잘한다는 평가 받는 게 1차 목표”

그동안 건축·건설업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여성들이 건축·건설업에 진출해도 설계나 디자인, 기획 등의 역할에 그쳤고, 현장은 철저히 남성 중심으로 돌아갔다. 수십톤에 달하는 중장비와 억센 근로자들을 다뤄야 하고, 여름엔 끓는 듯한 무더위, 겨울에는 살을 에는 찬바람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많이 바뀌었지만, 예전엔 건설현장에서 욕설은 다반사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성평등 의식이 높아지면서 각종 ‘유리천장’을 뚫는 여성들이 많아졌다. 보수적이며 남성 중심적인 건설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작년 연말 인사에서 삼성물산은 박인숙(45)씨를 부산 아파트 재개발 공사 현장소장에 임명했다. 그동안 중견건설사 등에서는 간혹 여성 소장이 배출됐지만, 업계 1위인 삼성물산에서 여성 현장소장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물산 첫 여성 현장소장이 탄생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자 일부 네티즌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여자가 건설에 대해 뭘 아느냐’는 댓글이 주였다. 박 소장(부장급)은 댓글들을 읽고 웃었다. “기분 나쁘진 않았어요. 나에 대해 모르니 당연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그런 말을 못하게 하려면 내가 실력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지요.”

출처: 삼성물산 제공
박인숙 소장이 부산온천2구역 재개발 사업 타임테이블 앞에 섰다.

내성적이지만 자존심 셌던 20대


박 소장은 건축설계를 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자랐다. 집안 곳곳엔 다양한 건축물 사진을 실은 건축문화 잡지가 놓였다. 잡지 속 세상은 박 소장에게 신세계였다. “그렇게 멋있는 것들을 만들고 싶었다”며 부산대 건축공학과에 진학했다. 93학번이다.


하고 싶은 일과 자신의 재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 소장은 “건축 디자인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영역에 걸쳐있는 것”이라며 “말재주가 없는 난 내가 디자인한 것들을 유창하게 설명하고 표현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난 건축가를 하기엔 너무 평범하다”고.


어느새 졸업반이었지만 대안이 없었다. 취업에 손을 놓고 있던 그에게 한 선배가 종이를 건넸다. 삼성물산 입사원서였다. “넋 놓고 아무런 취업 준비를 하지 않는 절 보는 게 안쓰러웠나봐요. 그 서류를 받고는 ‘일단 삼성이니 넣어보자’는 마음에 지원했죠. 따놓은 건축기사 자격증이 있어서 기술직으로 지원했습니다.”


동기 70여명 중 기술직으로 뽑힌 여성 신입사원은 박 소장을 포함해 총 3명이었다. 박 소장의 건설사 합격 소식을 들은 지인들은 축하와 함께 걱정을 했다. 박 소장은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내성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모님께서도 건설사에 들어가는 딸이 걱정됐는지 ‘하다가 못하겠으면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며 “그 말에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수습 교육 후 박 소장은 포항 택지개발 아파트 현장에 투입됐다. 현장의 유일한 정규직 여직원이었다.

출처: 삼성물산 제공
박 소장이 관여한 건설 프로젝트 조감도. 왼쪽부터 현재 착공한 부산온천2구역 재개발 , 서울 강동복합개발 현장, 안양 덕천 재개발 현장 조감도.

버티고 버티고 버텼다


당시는 1998년. 현장엔 여성 직원에 대한 배려가 지금보다 적었다. 내성적인 성격의 박 소장은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숙소 생활도 어려웠다. 여성 숙소가 따로 마련되지 않아 박 소장은 당시 현장소장, 남직원 2명과 함께 숙소를 공유했다.


박 소장은 “일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오면 방문을 잠그고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억센 근로자들은 작업 중이던 현장에 락카 스프레이로 성적인 그림을 그리는 등 박 소장을 조롱했다. 한 근로자는 수년 동안 박 소장을 스토킹했다. 그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가서 풀기보다는 혼자 앉아서 다독이는 스타일”이라며 “처음에는 매일 현장에 출근해야 하는 것이 지옥 같았다. 달력에 현장 준공 날짜를 동그라미치고 날마다 날짜 위에 X표를 치며 하루하루 버텼다”고 했다.


그는 2009년까지 11년간 울산, 대구, 서울, 인천 등의 아파트 건설 현장에 투입됐다. 박 소장이 현장을 도는 동안 다른 기술직 여자 입사 동기들은 모두 퇴사했다. “그때는 지방에만 박혀있어서 내가 특이 사례인 줄 몰랐어요. 진작에 알았다면 나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하하하.”


박 소장은 “현장이 너무너무 힘이 들었지만 ‘여자니까 편한 곳, 좋은 곳에 보내달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직접 실력을 쌓고 당당하고 싶었다”고 했다.


현장 밥을 10년 정도 먹으니 일에 자신이 붙었다. 그때부터 일이 재밌어졌다고 했다. 그는 2010년 현장 직원들이 선망하는 부서인 본사 공사팀으로 옮겼고, 2014년 안양덕천 재개발 공사 부소장 직책을 얻어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다. 그때부터 그의 소통 능력이 빛을 발했다. 불만을 제기하는 근로자들을 달래고, 요구 사항을 잔뜩 들고 오는 입주 예정자들을 응대했다. 그는 “근로자들의 요구 사항을 끝까지 들어주고 이해하는 척이라도 하고, 내 선에서 해줄 수 있는 것들을 해주니 근로자들도 날 믿기 시작했다”고 했다. 삼성물산 측은 이러한 박인숙 소장의 ‘고객과의 활발한 소통과 조직관리 역량’을 첫 여성 현장소장 발탁 배경의 하나로 꼽았다.

출처: 삼성물산 제공
박인숙 소장이 현장 사무실에서 도면을 살펴보고 있다. 오른쪽은 현장을 돌아보는 모습.

“직원들에게 길 보여주는 전략적인 현장소장 되고 싶어”


박 소장이 처음으로 책임지는 현장은 부산온천2구역 재개발(동래래미안아이파크) 사업이다. 지하 4층~지상 최고 35층에 32개동, 총 3853가구가 들어서는 대단지다. 이 중 삼성물산은 2000여가구를 짓는다. 작년 12월 착공해 2021년 12월 준공 예정이다.


박 소장은 아침 7시반(하절기엔 7시) 아침조회를 주재하고, 현장을 돌아보며 주요 작업과 위험 관리사항을 확인한다. 오전 ‘패트롤’ 이후 설계 검토와 골조·마감업체 선정과 관련한 일을 한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패트롤을 한다. 박 소장은 “한 달 된 현장이라 초반 조직 시스템 등을 세팅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현장은 터파기와 흙막이 공사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여성 현장소장이 된 소감을 묻자, 그는 “동료와 선배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크다”고 했다. “저보다 나이나 기수가 많은 선배 중에도 아직 현장소장이 안 된 분들도 많아요. 여성이라 수혜를 받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감도 보였다. 오랜 현장 경험에서 나오는 관록이다. “회사에 다닌 21년 중 본사에 있었던 3년반을 빼고 전부 현장에 있었어요. 남직원들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아요. 일단 여자도 현장소장 충분히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 게 1차 목표입니다. 나아가 직원들에게 길을 보여주는 전략적 소장이 되고 싶네요.”


그는 또 “난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버티며 회사에 남아있어 이 자리에 오른 것일 뿐,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다. “전 지방을 돌며 일만 하느라 가정을 못 꾸렸어요. 만약 내가 가정을 이뤘다면 지금처럼 회사에 올인하지는 못했을 거에요. 큰 것을 기대하지 않고 그때그때 할 수 있는 것을 준비하며 오기와 자존심으로 버티니 저에게도 기회가 온 거죠. 끝까지 버티면 전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건설업계에도 박 소장처럼 여성 현장소장이 많이 등장할 수 있을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공사 현장도 공사기법, 관리방법 등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어요. 나가서 직접 몸으로 하는 것보다 전반적으로 조율하는 역할이 커졌습니다. 여성들도 충분히 할 수 있죠. 대신 남직원들과 견줄 수 있는 기본적인 경쟁력을 갖추는 건 필수죠.”


글 jobsN 김성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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