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간 화려한 삶 살다 연예계 떠난 당대 최고 가수의 근황

조회수 2020. 10. 4. 15: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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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4년, 사업가로 40여년 그리고 택한 울릉천국에서의 삶
70년대 포크 대부 이장희
40여년 사업가로 살다 2004년 울릉도 정착
연달아 사업 성공시킨 비결은 '일단 시도하기'

‘울릉도’하면 떠오르는 명물이 이젠 오징어나 호박엿이 아니라 포크 대부 ‘이장희’(71)씨가 될 것 같다. 경북 울릉군 북면 현포 평리마을에 가면 '울릉천국'이란 팻말을 볼 수 있다. 이씨가 직접 이름을 붙인 그의 보금자리다. 2018년 5월에 연 울릉천국 아트센터라는 공연장 역시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이씨는 1971년 ‘겨울이야기’로 데뷔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그건 너’ 등 수많은 히트곡을 냈다. 후배 가수들이 수없이 리메이크를 하면서 지금까지 불리는 명곡이다. 하지만 그가 가수로 살았던 삶은 단 4년. 1975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가요계를 떠났다. 이후 후배 가수들의 프로듀서로 살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잠깐이었다.


대신 사업가의 삶을 택했다. 기성복 가게, 클럽, 라디오 방송국 등을 연달아 성공시켰다. 미국 LA를 주축으로 한 ‘라디오코리아’는 지금까지 한인 사회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2003년 12월 31일 은퇴하고 울릉도에 정착해 울릉도민으로 사는 그를 만났다. 

출처: 이장희씨 제공
포크 대부 이장희. 1971년 '겨울 이야기'로 데뷔했다. 영화 '별들의 고향', '그건 너' 등 영화 OST도 활발히 작업했다. 조영남, 송창식, 김세환, 사랑과 평화, 김태화, 김현식, 김수철, 김완선 등 가수 음반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1989년 한인 최초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코리아'를 창업했고 2003년 12월 31일 은퇴했다. 2004년부터 울릉도에 정착해 살고 있다.

하와이도 알래스카도 아닌 울릉도


울릉도에 처음 발을 디딘 건 1996년. 그가 은퇴 후 살 곳으로 하와이, 알래스카를 뒤로하고 택한 곳이 울릉도다. “내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건 ‘자연’입니다. 남극·타히티·페루 등 여행을 많이 했는데 울릉도에 왔을 때 ‘여기구나’ 싶었습니다. 첫눈에 반했어요.”


1997년 땅 1만 4000평을 샀다. 이때부터 틈틈이 울릉도에 와서 지냈다. 이중 7000평은 산이고 6000여평은 들이다. 120년 된 30평짜리 집을 직접 리모델링했다. 굴삭기 다루는 법을 배워 연못도 팠다. “당시 시세보다 비싸게 주고 샀어요. 그만큼 가치 있었죠. 캘리포니아에 갈 때마다 꽃을 갖고 와서 집 앞 들에 심었는데 어느새 정원이 됐습니다. 그러더니 주변 학교 학생들이 이곳으로 소풍을 오기 시작했죠.”


더덕 농사를 짓고 있던 그에게 2014년 김관용 전 경북지사가 찾아와 ‘공연장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처음엔 의아했어요. 울릉도 주민이 7000명인데 와서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싶었죠. 취지가 좋아서 결국 설득당했습니다.”

출처: 이장희씨 제공
왼쪽 파란 지붕이 이씨가 살고 있는 집이다. 하얀색 건물이 울릉천국 아트센터다.

이씨는 울릉군에 땅 1652㎡(약 500평)를 기증했다. 이 땅 위에 경북도와 울릉군이 70억원을 들여 ‘울릉천국 아트센터’를 지었다.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 카페, 전시홀 등이 있다.


그의 보금자리가 관광명소가 되면서 막상 그는 사는 데 불편을 겪고 있다. 관광객들이 그의 집 문을 시도 때도 없이 두드리기 때문이다. 그는 1년 중 반년 정도만 울릉도에 있고 나머지 3개월은 서울 그리고 또 나머지 3개월은 LA에서 보낸다.


울릉도민으로 살면서 잊고 있던 음악을 다시 시작했다. 2018년에는 5월부터 9월까지 울릉천국 아트센터에서 송창식, 윤형주 등 세시봉 멤버와 함께 공연을 했다. 가수 때도 안 하던 전국투어를 2013년 처음 했고 2019년 3월에도 두번째 전국투어를 할 예정이다.


“살면서 음악을 다시 하고 싶단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때 이게 마지막이라 했는데, 나중에 세시봉 특집 때문에 다시 소환되고 불후의 명곡에 출연했죠. 그때도 음악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울릉도에서 뒤늦게 상설 공연을 하면서 ‘그래 음악이 내가 이렇게나 좋아하는 거였지’라고 새삼 깨달았어요.” 

출처: 영화 '쎄시봉' 포스터, 스틸컷
영화 '쎄시봉'에서 배우 진구가 이씨의 청년 시절을 연기했다.

'안될 거다'라는 두려움? 경험하지 않고서 어떻게 아나


그는 중 2 때 운명처럼 음악에 빠져들었다. “고등학생이던 우리 삼촌 친구가 툇마루에서 기타 치면서 노래를 하는데 어린 마음에 그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어요. 그게 바로 조영남씨입니다.”


당시 유명했던 음악 살롱 세시봉에서 팝송을 부르며 많은 팬들을 몰고 다녔다. 데뷔하자마자 대스타 반열에 올랐고 당대 최고 스타만 한다는 동아방송 DJ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구치소 창밖에 내리는 눈을 보며 생각했어요. 내가 지금 가진 게 무엇인가···. 인기 스타였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느낌이었죠. 이런 상황이 마치 음악을 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얼굴을 다 아는 연예인이었고 대학 중퇴 학력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밑바닥부터 시작할 수 있는 장사에 도전했다. 1978년 광화문 대로에 ‘반도패션(현 LF)’ 대리점을 차렸다. 럭키상사(현 LG)에서 하던 기성복 매장이었다. “당시 기성복이란 장르가 막 생겨날 때였습니다. 유행이 일어날 조짐이었고 예상이 적중했습니다. 경리부, 총리부 같은 조직도 어엿하게 갖추고, 직원만 14명 있을 정도로 성공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출처: 이장희씨 제공, 조선DB
'그건 너' 재킷 사진, (맨 오른쪽부터) 1971년 주한 외교관 초청 행사에서 노래하고 있는 송창식, 이장희, 윤형주, 김세환. 맨 왼쪽은 ‘조약돌’을 부른 가수 겸 MC 박상규.

2년 정도 운영하다 오일쇼크, 즉 불황이 온다는 소리에 재빨리 가게를 정리했다. 1980년 미국으로 갔다. “첨부터 미국에 사업을 하거나 살려고 간 건 아니고, 여행을 했어요. LA를 비롯한 캘리포니아주에서 시작해 그랜드캐니언, 데스밸리 등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특히 뉴욕에 갔을 때 그 분위기에 반해 미국에서 살 결심을 했죠.”


그는 동업자와 함께 음식점 겸 클럽을 열었다. 그가 손수 디자인한 동양풍 인테리어와 이색적인 분위기가 한인뿐만 아니라 미국 현지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들국화·조영남 등 한국 가수들이 공연을 하기도 했다.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그의 가게를 빌려 영화 쫑파티를 하면서 더욱 명소로 거듭났다. 고객은 그를 ‘엉클(Uncle·삼촌)’이라 부르며 따랐다. “수용인원이 약 300~400명 정도인데 꽉 들어찼어요. 클럽에 들어오려고 두 블록이나 줄이 늘어져서 경찰이 ‘위험하다’고 문 닫으라 한 적도 있습니다.”


사업가로 성공가도를 달린 그의 다음 도전은 ‘라디오 방송국’이었다. 1989년 한인 대상으로 하는 ‘라디오코리아’를 개국했다. 그는 동아방송 DJ를 할 때 라디오 방송과 스튜디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매일 지켜봤기에 노하우가 있었다.

출처: 라디오코리아 홈페이지
라디오코리아 건물 모습.

“신문을 발행하려면 기사 써야지, 종이에 활자 넣고 인쇄해야지, 배달하고 수금까지 해야 해서 초기 비용이 많이 들어요. 반면 라디오 방송국은 스튜디오와 전파만 있으면 가능했습니다. 한국에서 방송을 하려면 라이선스를 따고 절차가 복잡한데, 미국에선 그런 절차가 필요 없었습니다. ‘전파 임대계약’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송사의 전파를 빌려 쓸 수가 있어요. 친구 한명을 불러서 스튜디오를 짓고 방송을 시작했어요. 보통 방송사가 4~5년 투자해야 손익분기점을 넘는다는데 저흰 6개월 만에 흑자를 냈습니다.”


뉴스뿐만 아니라 이민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나 이민자 중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도 다뤘다. 라디오코리아는 단숨에 LA 한인 사회 대표 라디오로 떠올랐다. 이민 사회와 라디오가 가진 특성이 라디오코리아를 흥행케 했다. “LA에 100만명이 사는데 제주도보다 많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민 가서 어렵게 생활을 했어요. 영어를 잘 못하니 주로 구멍가게나 세탁소를 합니다. 종일 가게에 있다 보니 라디오를 가까이해요. 또 미국은 땅이 넓으니 30분~1시간씩 차 안에서 보내는 게 익숙한데, 이때 라디오를 듣습니다. ”


1992년 LA 4·29 폭동 때 라디오코리아는 ‘재난상황실’ 역할을 했다. LA 폭동은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 경찰 4명이 무죄 판결을 받고 이에 대한 불만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닷새 만에 57명이 숨지고 2500여명이 부상당했다. 

출처: 라디오코리아 홈페이지
격려 중인 조지 H.W 부시 당시 대통령.

통금이 내려진 상황에서 24시간 특별 생방송을 하며 상황을 알렸다. 직원들은 전화 앞에 앉아 청취자들의 신고 전화를 받았다. "‘어디가 불타고 있다’하면 방송에 내보내고 다른 한인들이 달려가 도와주었어요. ‘물이 없다’는 방송이 나간 곳에는 생수 배달이 쏟아졌죠. 주차장은 피해자를 위한 모금 장소가 됐어요.”


LA타임스는 라디오코리아가 '한인 생명선'이라며 대서특필했다. 백악관에서도 주목해 조지 H.W 부시 당시 대통령이 방송국을 방문해 직원을 격려했다. 이씨는 사장실에서 부시 대통령과 면담하고 방송 출연을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 방송국이 내셔널 프레스나 다름없었어요. 외신은 못 들어왔는데, LA 특파원으로 활동하던 정동영씨가 하루만 사원으로 써달라고 해서 특종을 내기도 했죠.”


한인의 생명선 노릇을 하느라 방송국 생명은 간당간당했다. 재산과 가족을 잃은 교민들에게 광고료를 수금할 수가 없었다. 열흘 이상 밤샘근무를 한 직원 50여명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 은행에 긴급대출을 받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듣고 개그맨 故이주일씨가 라디오코리아에 2억원을 기부했다. 

출처: 1992년 5월 9일, 14일 조선일보 지면 캡처
LA폭동 때 라디오코리아의 활약이 알려졌다. 왼쪽은 조지 H.W 부시 당시 대통령이 방문한 모습, 오른쪽은 이주일씨가 라디오코리아에 성금 2억원을 기부했다는 기사.

그가 은퇴할 때 라디오코리아 직원수는 150명. 미국에서 단단한 입지를 굳혔다. 그는 사업 성공 비결로 ‘일단 해보는 시도’로 꼽았다. “대부분 머릿속에 생각만 하고 망설이다 그만둡니다. 과감하게 발을 디뎌야죠. 해보지 않고선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일단 해본다고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사업을 할 때 다들 성공할 거라 생각하는데 미국에서도 장사 시작하는 사람의 80%가 첫해에 망합니다. 3년 견디는 장사는 5%도 안될걸요. 한번의 시도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젠 좋아하는 일만 즐기며 살고파


그가 지금까지 만든 곡은 140여곡 정도. 2011년 발매한 ‘울릉도는 나의 천국’ 이후 신곡 발표 계획은 없다. “‘새로운 곡 안 쓰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요. 날 보러 오는 사람들이 대개 50~60대입니다. 옛 노래를 듣고 싶어서 오는 겁니다. 공연을 하긴 하지만, 음악은 여전히 본업이 아닌 취미인걸요.”

이장희씨 제공

그래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언제든 도전할 생각이다. “바위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옥천이라 하는데, 이걸 이용해서 사업을 해볼까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뚜렷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수질 검사를 하려고 수자원공사에 보냈더니 마시는 데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어요.”


여생을 살아갈 모토는 ‘즐거움’이다. “은퇴 후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즐거운 것만 하고 살고 있어요. 그동안에는 어떻게든 먹고살려고 했습니다. 이젠 사업가도 아니고, 노래하는 것도 제가 좋아서 합니다.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기에도 짧은 인생이에요.”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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