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다국적기업-LG..완벽한 그림 그리며 살아온 줄 알았죠

조회수 2020. 10. 4. 16:3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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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화양연화'
플로리스트 손은정

손은정 작가를 만난 건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 서울 은평구 불광동 서울혁신파크 미래청 옥상에서다. 전시 〈꽃집에서〉를 앞두고 설치 작업이 한창이었다. 짚더미로 가득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그는 ‘삶과 죽음, 연결과 소통,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꽃으로 보여줄 거라 말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연결고리에 ‘꽃’을 뒀다.


전시만큼이나 아리송한 말로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뱉은 화두는 ‘길(path)’이다.


“이제는 ‘퇴사’에 대해서 누구나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더는 직장을 삶의 일부라 생각하지 않아요. 지나가는 경로나 과정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입사 순간부터 언제 퇴사할지 생각하기도 하죠. 커리어 패스(career path), 즉 인생 목적지로 가는 길인 거죠. 인생을 하나의 길로 봤을 때, 걷는 과정은 중요해요. 길에서 만난 풍경이나 사람과의 만남 등 다양한 경험이 일생을 구성하죠. 경로가 목적지 그 자체라는 말이에요. 그걸 깨닫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손은정 작가는 ‘커리어 패스’로 보자면 완벽한 그림을 그려왔다. 연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2001년 네트워크 보안 분야에서 손꼽히는 다국적 정보기술(IT) 회사 시스코에 입사했다. 본사가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수한 뒤 아시아태평양지사가 있는 싱가포르에서 6년 동안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2008년 시스코 한국 지사로 옮기며 국내로 돌아왔다. 2010년에는 LG전자 해외 전략 파트로 이직하면서 프랑스 법인에서 프로젝트도 했다. IT회사에서 기술력을 바탕으로 마케팅과 영업까지. 그는 모든 게 최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욕망의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이 길을 따르고 싶었고 열심히 지나왔어요. 문득 뒤돌아보니 사회와 회사가 원하는 부품으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다, 나쁘다’의 기준이 아니에요. 상황에 맞게 선택한 것일 뿐. 직장인의 삶이 의미 없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연세대-시스코-LG전자, 그리고 플로리스트

누구보다 성실하게 직장인의 길을 걸어온 그는 5년 전 회사를 관뒀다. 직장에 몸담아 온 10년.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관성의 법칙으로 사람은 멈추지 않고 굴러갈 수 있어요. 살아온 습관대로 나를 굴리다 보니 이렇게 살다 미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삶의 의미도 모르겠고. ‘사람들은 왜 살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됐어요.”


미국에서 일하던 중이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도 회한이 됐다. 흔들리는 그에게 삶의 전환점을 심어준 건 다름 아닌 ‘꽃’이다.


“회사 일로 프랑스 파리에 머물면서 주말마다 플로리스트 수업을 들었습니다. 저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사람을 이해하고 싶었는데 마침 그 매개가 꽃이었을 뿐이에요”


꽃꽂이로 성향 분석


회사를 관두고 그는 2013년 12월, 서울 대치동에 꽃집 ‘수다 FAT’를 열었다. 명목상 꽃집이지, 실질적인 소득원은 꽃과 책의 배달서비스를 겸한 컨설팅이었다. 그는 FAT에서 꽃꽂이를 통해 인물의 성향을 분석하고 리더십을 개발하는 워크숍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유명 대기업과 로펌 종사자 등 1700여 명이 그의 고객이었다. 이 일을 확장해 IT와 꽃을 접목한 전시회도 열었다.


“수다는 손이 많다(手多)는 뜻이고, FAT는 꽃(Flower), 예술(Art), 기술(Technology)을 의미해요. 5년간의 긴 실험이었습니다. 삶을 배운 실험실이자 리얼리티쇼 같았죠. 꽃으로 돈을 벌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꽃은 실용적이거나 지속할 수 있는, 현대의 물질과는 거리가 멀어요. 꽃이 없다고 해서 생활이 안 되거나 배를 곯진 않죠. 꽃이라는 건, 자본주의 시선으로 봤을 때 실용적이거나 지속 가능하거나 현실에 맞는 물성이 아닙니다. 삶의 필수품이 아니죠.”


그는 물질과 자본의 반대 선상에 있는 꽃을 가지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시로 풀어냈다.


꽃으로 낯설게 보기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영원히 썩지 않는 것도 그저 초록의 유칼립투스에 불과할 뿐. 이를 통해 삶과 죽음에 관한 소통을 이야기한다. © 손은정

아름다움의 기준은 ‘개인의 취향’에서 비롯된다. 보석이나 옷, 혹은 자연에서도 우리는 쉽게 아름다움을 찾는다. 미적인 모든 대상을 통틀었을 때, 그 최고봉에 ‘꽃’을 꼽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백 살 넘은 할머니가 이런 말을 했어요. ‘꽃가마를 타고 시집왔으니 이제 꽃상여를 타고 떠나고 싶다’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쁠 때나 슬플 때, 탄생과 죽음, 사랑, 위로, 축하, 추모의 모든 순간에 꽃을 선물하죠. 꽃은 소통의 도구입니다. ‘왜 꽃을 가지고 작업하나’라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꽃이 좋아서라는 쉬운 답이라면 주저할 리 없겠죠. 꽃이 예뻐서 좋은 게 아니에요. 언젠가는 꽃도 져야 하는데,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핀 다음 시들고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 자랑스럽고 대견하죠.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차가운 첨단기술인 IT(정보기술)와 생명이 유한한 꽃(예술)은 극과 극의 대상이다. 그에게 있어서 꽃은 ‘낯설게 보기’의 존재다.


“꽃은 생의 주기가 짧아요. 피기 전의 꽃을 가지고 와서 다듬고 피워내고 시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이 고작해야 일주일. 꽃의 한생이 사람의 일생과 닮았다고 생각했죠. 우리는 아이가 태어나 노인으로 죽어가는 삶의 과정을 많이 봐왔어요. 꽃이 피어나고 죽어가는 모든 순간을 보는 게 저의 관심사였습니다.”


손은정 작가가 바라보는 꽃은 하나의 ‘생(生)’이자 얼굴이다. 꽃을 배합하는 일은 각각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장미 꽃다발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지만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요. 비슷한 꽃을 잘 꽂아 놓으면 마치 국가주의적 매스게임을 보는 것 같죠. 전체적으로는 아름답지만, 개개인은 보이지 않아요. 꽃꽂이는 각각의 존재를 보이게 하는 작업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이런 게 삶이죠. 이 안에 희로애락, 생로병사가 있습니다. 어떤 생이든 그 끝이 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5년간의 긴 실험, 일주일의 짧은 전시


그의 전시 〈꽃집에서〉는 단순히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지난 5년간 꽃집에서 일어난 사람들의 모습을 긴 여정 중 하나로 뚝 떼어 작품화하는 데 의미가 있다.


“꽃을 사는 행위는 한생의 순간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꽃은 받는 순간 의미를 다하죠. 그 에너지로 끝납니다. ‘격렬하게 살아가는 삶’ 그게 바로 화양연화죠. 수명을 늘리기 위해 애쓰지 마세요. 꽃이 질 때까지의 찰나를 즐기세요. 다만 의미 있게 살다 갔다, 그것만 기억하면 좋겠어요.”


그의 전시는 11월 10일부터 18일까지 단 일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 절화의 한생을 떠올린다면 애초에 연장할 수 없는 전시였다. 손 작가는 얼마 전 꽃집 문을 닫고 다시 사회라는 길 위로 돌아갔다. 아마존 웹서비스 회사(AWS)에 취업해 직장인으로서 삶의 여정을 걷고 있다.


5년간의 긴 실험, 일주일의 짧은 전시. 그는 그토록 원했던 질문의 답을 얻었을까. 우리는 왜 사는가. “어떤 삶이든 의미 없는 순간은 없다. 다만 모든 순간이 주목받지 않을 뿐. 피고 져야 꽃이다. 꽃이 진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답이 될까.


글 jobsN 서경리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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