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기자 그만두고 5년간 맛본 쓴맛이 성공 밑거름됐죠

조회수 2020. 10. 4. 16: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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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누비던 JTBC 기자, 부동산 디벨로퍼로 전업한 사연
[n잡시대 ④] 부동산 디벨로퍼 민동기씨
JTBC 기자 출신으로 12년차에 전업해
“사기도 당해…인생의 쓴 맛 힘들었다”

<편집자주> 직장 한 곳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정년퇴임으로 은퇴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직장을 넘어 ‘n번째 직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당신의 n잡은 무엇인가요. 이직·창업·프리선언 등 전업에 성공한 ‘프로 전업러’들에게 물어봤습니다.


2013년 2월 대만 타이중(臺中). 당시 30대 후반의 열혈기자였던 민동기(43)씨는 야구장을 누비고 있었다. JTBC 스포츠 담당 기자로 국민타자 이승엽, 끝판대장 오승환 등을 취재했다. 이후에도 월드컵 최종예선과 동아시안컵 등을 취재했다.


그리고 5년 뒤. 그는 부동산 디벨로퍼로 변신해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최근 경기 용인 수지에 있는 지하철 신분당선 동천역 인근에 있는 모델하우스에서 민씨를 만났다. 그는 부동산 개발회사 이룸주택개발의 대표를 맡고 있다.


세상 바꾸고 ‘큰 꿈’ 떠올리며 입사…‘루게릭’ 보도로 한국기자상


마산 중앙고와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한 민씨는 2002년 서울경제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이듬해인 2003년 중앙일보로 옮겼다. 기자가 된 이유를 묻자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민씨는 기자에 첫 발을 디딜 무렵, ‘대성’을 해서 정치를 해보고 싶었다는 욕심도 없지는 않았다고 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기자 출신 국회의원이 적지 않았던 시기였다. 이낙연 국무총리도 2000년 2월 동아일보 국제부장을 끝으로 16대 국회의원에 입성했고, 박영선 민주당 의원도 2004년 MBC 경제부장을 마친 뒤 17대 국회의원이 됐다. 하지만 막상 기자를 시작하면서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어 본업에만 충실했다고 한다.


기자가 된 후 민씨는 취재 현장을 부지런히 누볐다. 상도 많이 받았다. 대표적인 기사는 ‘루게릭 눈으로 쓰다’란 기획 보도였다. 당시 탐사기획부 기자였던 민씨는 선후배들과 함께 농구선수 박승일씨의 투병기에 대해 생생한 묘사를 기반으로 한 ‘내러티브 저널리즘 기법’을 활용한 보도를 했고, 이는 많은 독자의 공감을 얻어 한국기자협회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민씨는 “감각은 살아 있는데 몸은 움직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감각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 언젠가는 죽음과 맞닥뜨릴 운명에 선다는 것. 그것은 어떤 느낌일지 취재하면서 계속 생각해 봤다. 박승일씨를 취재하면서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을 하게 됐다”는 말로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 그는 또 2005년에는 ‘한국사회 파워엘리트 대해부’라는 기획보도로 삼성언론상을 받았다.

출처: JTBC 캡처
민동기씨가 송민교 아나운서와 함께 출연했던 JTBC 뉴스.

2011년 민씨는 당시 신생방송인 JTBC가 개국하면서 방송기자로 전업했다. 아무리 스토리텔링과 내러티브 저널리즘을 추구해도, 영상의 시대라는 흐름에는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민씨는 말했다. 하지만 전업 후 2년만인 2013년, 그는 JTBC에서 나왔다. 전업해 보니 오히려 변화에 대한 한계를 더 많이 느꼈다고 한다. 지금은 국민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동료들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전업 결심 후 사업 시작했지만…세상은 냉혹했다”


퇴사한 민동기씨는 이후 건설 자재업에 입문했다. 비노코리아라는 회사를 차렸다. 타일 등 욕실 용품을 사다가 건설 시행사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2년 만에 투자금 3억원을 날리고 회사는 폐업했다. 업계에 새로 입문한 중소기업 대표로서, 판로를 뚫는데 눈이 멀어 정작 대금 회수를 제대로 하지 못 한 탓이다. 한 업체에서 5700만원을 못 받는 등 손해를 거듭하다가 접었다.


그때 배웠던 교훈은 ‘민사 재판에서 승소하더라도, 이기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었다. “사실 떼인 원금 5700만원 중 5000만원 정도는 회수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내가 쓴 변호사 선임비나 재판 10건을 진행하는 수고로움, 시간, 추가로 발생한 이자 등은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이후 민씨는 청소용역업체 등을 운영하면서 사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 역시도 그리 잘 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던 민씨가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은 공인중개사를 하면서다. 공부에 꼬박 1년이 걸렸다. 경비원용역업체와 청소용역업체를 운영하면서 하루에 4시간씩 1년을 공부해 공인중개사를 땄다. 그리고는 서울 신당동에 있는 작은 빌딩 5층에 있는 원룸에서 사무실을 열었다. 그 때 보증금이 300만원에 월세 50만원이었다. 중개 수요가 꽤 쏠쏠해 직원 월급과 공과금, 임대료 등을 떼고 주머니에 연간 약 5000만원 정도가 들어왔다고 했다. 현재는 구파발역 인근에 공인중개사 사무소 하나를 운영하고 있다.

출처: jobsN
경기 용인에 있는 죽전 솔하임 모델하우스에서 만난 민동기 대표.

2017년 부동산 디벨로퍼 전업…죽전 인근 2개 단지 개발


민씨는 2017년 초 투자자를 모아 이룸주택개발을 창업했다. 부동산 중개보다는 매출의 단위가 비교 안 될 정도로 큰데다, 작은 마을을 개발해서 주민을 입주시킬 수 있다는 보람에 매료됐다고 한다. 관리사무소와 경비원, 청소용역, 건설자재 납품 등의 경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부동산 개발 전문가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꼬박 5년의 시행착오와 노하우가 쌓였다. 회사에서는 기본 연봉 1억원을 받는다.


민씨는 부동산 중개 경험이 단지 개발에 가장 도움이 된다고 했다. 현재 분양 중인 단지들이 죄다 원룸 위주인 것도 마찬가지의 전략이다. 이유를 묻자 이런 답이 나왔다. “최근에는 1인 가구가 많이 늘었다. 집을 무조건 늘리기보다는 수입차를 타더라도 오피스텔에 사는 사람도 많다. 이런 트렌드를 감안해 원룸과 1.5룸(원룸과 거실 일체형) 오피스텔 개발에 집중했다.“


부동산 디벨로퍼 사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죽전역 인근에 있는 원룸과 1.5룸으로 구성된 단지 200여 세대의 80%를 분양완료했다. 분양이 끝나면 인근 지역에 있는 또 다른 단지의 분양에도 들어간다.


순조로운 사업의 이면에는 현장을 누비는 그의 발품이 있다. 5년간의 실패 덕분에 꽤나 꼼꼼하고 또 깐깐하다고 자부한다. “부동산 디벨로퍼는 좋게 말하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지만, 나쁘게 말하면 개발지 인근 주민 전체의 민원실장이다. 한 개의 단지를 개발하려면 이해관계자 수백~수천명과 논의를 해야 한다. 다들 ‘대표 나오라 그래’라 할 수 있는 분들이다. 그 분들 모두가 첫 고객이라는 생각으로 말씀을 듣는 것이 이 업(業)의 첫 걸음이라 할 수 있다.”


부동산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전 재산’과 동일한 의미다. 그래서 민씨의 말도 움직임도 더 조심스러워진다고 한다.

글 jobsN 이현택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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