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전 '미쳤다'는 직업 택했던 서울대 공대생, 지금은..

조회수 2020. 9. 18. 19:0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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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공대 출신이 사물놀이에 빠져든 사연
주재연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예술감독
사물놀이·판소리·아리랑 세계화 앞장서
예술이 인생 바꾼다는 믿음으로 26년

케이팝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BTS가 최근 발매한 노래 ‘IDOL’에 ‘덩기덕 쿵더러러’ 같은 우리 전통 추임새가 들어간다. 뮤직비디오에는 사물놀이를 연상케하는 춤이 등장한다. 무아지경에 이를 때까지 신명 나게 몰아치는 리듬도 사물놀이를 떠올리게 한다.


꽹과리·징·장고·북 네가지 악기가 함께하는 사물놀이는 우리 국악의 대중화·세계화를 이룬 성공적인 국악 장르로 평가받는다. 주재연(53) 예술감독은 사물놀이 창시자 김덕수 명인과 함께 1990년~2000년대 사물놀이 세계화에 청춘을 바쳤다.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 후 대기업 연구원으로 일하다 그만두고 1993년 김덕수 사물놀이 한울림예술단에 입단했다.


사물놀이뿐만 아니라 판소리, 아리랑 공연도 기획했다. 미국·유럽·러시아 등 내로라하는 세계 각지 축제에 우리 가락을 소개했다. 그가 참여한 공연 횟수만 2000회가 넘는다. 10월12일부터 15일까지 열리는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준비로 바쁜 주 감독을 만났다. 올해 26년차 공연문화기획자의 삶을 들었다. 

출처: jobsN
주재연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예술감독. 그의 공연기획 인생은 사물놀이-판소리-아리랑 3줄기로 설명할 수 있다.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이 끝나면 11월 영국에서 있을 안숙선 명창, 김준수 소리꾼 공연 준비에 돌입한다.

”자신들만의 아리랑 있었으면”


-예술감독, 공연문화기획자는 무슨 일을 하나.


“공연을 만든다는 정의보다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고 말하고 싶다. 아티스트와 아티스트, 아티스트와 스태프, 아티스트와 관객을 연결한다. 내가 소개한 서로 다른 장르의 아티스트가 이후에도 계속 만나 함께 작업할 때 보람을 느낀다.”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은 2012년 아리랑 유네스코 등재를 기념하는 축제다. 2013년부터 매년 10월 광화문 한복판에서 색다른 아리랑 공연을 볼 수 있다. 이번 주제는 ‘춤추는 아리랑’. 3일간 50회 공연한다. 개막식에서 댄스팀 저스트절크와 김덕수 명인이 40분간 창작 아리랑 공연을 선보인다. 둘째날에는 밴드 YB, 데이브레이크, 로맨틱펀치가 자신들만의 감성으로 아리랑을 편곡해 부른다. 셋째날에는 1178명의 사물농악대가 퍼레이드를 펼친다. 주 감독은 “음악가들이 자신들만의 아리랑을 갖고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출처: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사무국, 저스트절크 제공
사물놀이 김덕수 명인, 댄스팀 저스트절크.

-’음악가들이 자신들만의 아리랑을 가졌으면 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


“아리랑을 보존하는 방법이다. ‘우리 전통이라서, 역사이기 때문에 보존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는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다. 먼저 관심을 갖게 하고 그 속에 전통을 배치해야 한다. 익숙한 아티스트가 아리랑을 불러야 한다. 한번이라도 더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아리랑도 장르다. 그 장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아티스트에 달렸다.”


-퓨전이 전통을 해친다는 의견도 있는데


“때를 구분해야 한다. 퓨전만 추구하는 건 아니다. 국내에서 국악을 알리기 위한 대중화 작업과 해외에 우리 문화를 알리는 작업은 다르다. 개인적으로 수교 행사를 하거나, 외국에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자리에서는 퓨전보다는 정통을 들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오리지널 음악을 듣고 싶어 한다. 캐논이나 G선상의 아리아를 해금이나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과거 퓨전 국악단이 프랑스에서 공연을 했는데, 프랑스 신문에 ‘한국 악기로 장난한다’는 악평이 실린 적이 있다.” 

출처: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사무국 제공

-그럼 외국에 한국 전통 음악을 알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조명이나 무대 세팅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음악을 듣는 사람이다. 만약 어느 나라 대통령이 듣는다며, 그 대통령의 취향과 배경 조사는 당연하다. 그가 탱고를 좋아한다면, 탱고 음악을 우리 악기로 연주하기 보다, 우리 씻김굿에 유사한 장단이 있기 때문에 그 장단을 이용해 공연하는 식이다.”


-우리 공연을 본 외국인들의 반응은 어떤가.


“우선 사물놀이는 설명이 필요 없다. 타악기는 어느 나라에나 있다. ‘한국에서 온 타악기’라고만 말한다. 겉보기엔 작은 악기가 큰 소리를 내는 걸 보고 놀란다. 1부에서 사물놀이패가 앉아서 연주하면 관객이 점점 흥분하다, 2부에서 상모까지 돌리면 무아경에 빠진다. 사람의 맥박과 타악기 리듬이 비슷하다. 사람의 정신을 마비시킨다. ‘와 재들은 연주하면서 춤추고 아크로바틱도 한다’ 놀란다. 뒤풀이 공연을 하면 관객이 같이 풀쩍풀쩍 뛴다. 판소리는 완창하는데 기본 4~5시간이 걸린다. 사전에 작품 설명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관객이 몰입한다.”

출처: 주재연 감독 제공
2010년 주 감독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사물놀이와 4D 홀로그램 기술을 결합한 ‘디지로그 사물놀이’를 기획·제작했다.

'미쳤다'는 주변 만류에도 꿈찾아 도전


-취업 걱정할 필요 없는 공학도였는데.


“화학과 수학을 잘해 공대에 갔지만 막상 수업을 들어보니 인문사회, 예술 과목이 재밌었다. 성적도 전공보다 좋았다. 졸업 후 연구소에서 5년간 산업요원으로 복무해야 했는데, 입사 1개월 만에 회의감이 들었다. 6~7개월 다니다 퇴사하고 현역으로 입대했다. 5년간 일하느니 군대를 다녀오는 게 시간을 버는 거라 생각했다.”


-어떤 진로를 택해야겠다 정확한 계획도 없이?


“막연히 음악이나 문화 쪽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록과 프로그레시브 음악에 심취했다. 다들 미쳤다고 했다. 그렇지만 지금 해도 늦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사물놀이를 만난 건 제대 후 방송국 PD 시험을 준비할 때였다. 우연히 김덕수 사물놀이패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사물놀이의 어떤 점에 빠진 건가


“당시 그 이유를 몰랐다. 음악과 장면이 머릿속에 박혀 떠나가지 않았다. ‘왜 이 좋은 걸 이제 알았지?’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왜 빠졌는지 궁금해서 김덕수 선생님이 계시던 한울림예술단에 갔다. 취업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해보지 않겠냐 제안받았다. 그때 발을 들여 여기까지 왔다.”   

공연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그는 공연 로드매니저 일부터 시작했다. 당시 김덕수 사물놀이패는 수잔나 삼스탁씨 주도로 해외 축제에서 공연했다. 삼스탁씨는 미국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머물며 해외에 우리 전통문화를 알렸다. 한국에는 축제 개념이 자리 잡지 않았을 때였다. 주 감독은 사물놀이패 공연을 따라다니며 축제 문화, 사물놀이, 무속음악 등을 공부했다.


-당시 생활은 어땠나


“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1993년 월급이 45만원이었다. 모자란 생활비는 과외로 충당했다. 아마 과외를 할 수 있어서 어려운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주 감독은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난장컬쳐스’로 법인화하고 사물놀이 교육원을 만드는 등 공연 예술단체 체계를 만들었다. 현지 에이전시와 정식 계약을 맺어 해외 투어를 한 것도 주 감독의 공로다. 1997년부터 미국에서 시즌 투어를 했다. 미국 15~20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150회 이상 공연을 했다.


-정식 해외 투어를 한 전통 공연은 사물놀이가 유일했다고


“축제에 초청을 받으면 공연료 없이, 항공료나 숙식비만 제공받는 경우가 절반이다. 그런데 90년대부터 우리는 몸값을 책정하고 마케팅을 했다. 사물놀이를 정식 공연문화로 자리 잡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5명으로 이뤄진 사물놀이패가 한 공연 당 1만5000~2만 달러를 받았다.”

전세계 음악 감독들에게 편지를 손편지를 쓰거나 팩스를 보내 사물놀이를 알렸다. 한동안 사물놀이의 신명 나는 가락에 심취했던 그는 2002년 파리가을축제에서 ‘판소리 완창 공연’을 기획했다. 

출처: 주재연 감독 제공
2009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개교 800주년 행사 때.

-판소리 공연으로 눈을 돌린 이유는?


“당시 파리가을축제를 맡은 조세핀 감독이 내게 의뢰했다. 공부를 하긴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춘향가를 완창하는 데 7시간이 걸린다. 3시간 30분씩 두번 나눠 공연했다. 한국에서도 듣지 않는 판소리가 프랑스에서 통할까 싶었다. 예상과 달리 300석 극장 10회 공연이 모두 매진됐다. 관객도 교포가 아닌 현지인이었다. 첫 공연에서 관객들이 울면서 나오는데 ‘이거다’ 싶었다. 프랑스 르몽드 등 현지 언론도 우리 공연 기사를 좋게 써줬다.”


-외국인들에게는 새로운 공연이어서 그런가?


“물론 낯선 문화에 대한 호기심도 있겠지만, 외국인이 우리 전통문화를 보는 시각 자체가 다르다. 당시 한 관객에게 판소리의 어떤 점이 좋았냐 물어보니 ‘배우 한명이 7~8명의 배역을 하는 건 판소리가 유일하다’고 했다. 보통 우리는 판소리가 ‘고수와 함께하는 1인 오페라’ 정도로만 설명한다. 외국인들은 다양한 시각에서 본다. 또 프랑스 사람들은 살풀이를 좋아하고, 독일인들은 승무를 좋아한다. 한 프랑스 관객은 한국 춤은 땅과 가까워지고, 서양 춤은 땅과 멀어지려 한다고 평하더라.”


예술이 인생 바꾼다는 믿음 있어야


주 감독은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을 위해 7~8개월 동안 전념한다. 이외에 1년에 2~3개 해외 공연에 몰두한다. 국내에서 한 축제를 총괄하는 예술감독의 수입은 2000만~5000만원 선. 축제 측과 공연문화기획자로 개별 계약을 하거나, 직원 3명과 운영하고 있는 난장인터렉티브 회사 차원에서 계약을 하기도 한다. 회사의 2017년 매출은 5억원 정도다.


-예술감독, 공연문화기획자에게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


“공연문화기획자는 예술이 사람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해외 공연을 가면 학생 대상 워크숍을 연다. 공연 전후에 주변에 있는 중·고등학교에 들러 학생들에게 한·중·일의 문화 차이, 사물놀이 악기와 한국 문화를 소개한 뒤 공연을 한다. 음대생은 따로 모아 워크숍을 열기도 한다. 무료다. 이때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친한파가 된다. 특히 사물놀이는 우렁찬 소리 때문에 한번 보면 잊지 못할 만큼 강렬하다.”


-친한파가 된다? 사례가 있나


“스위스에서 우리 워크숍을 들었던 학생이 한국으로 와 무속 장단을 배우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석사 공부 중이다. 또 한번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800주년 기념 공연을 하러 간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행정직원이 과거 독일에서 우리 워크숍을 본 적이 있다더라. 그때 기억으로 우리를 초청한 거였다. 이걸 일본이 잘했다. 일본은 해외에 자국 문화와 역사를 오래전부터 노출했고, 그 결과 해외에서 일본 문화는 익숙하고 고급으로 통한다. 그런 의미에서 BTS 등 케이팝의 역할이 중요하다. 케이팝이 좋아 한국어를 공부하고 한국 문화를 배우는 팬들이 많다.” 

출처: BTS 'IDOL' 뮤비 캡처.
BTS 'IDOL' 가사에 '얼쑤', '지화자 좋다', '덩기덕 쿵더러러' 등 우리 전통 추임새가 들어있다. 사물놀이, 탈춤 등에서 따온 춤도 볼 수 있다.

-공연문화기획자가 되려면


“현장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 문화재단이나 공연 회사를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공연마다 옮겨 다니는 프리랜서도 있다. 큰 무대를 경험하려면 유럽으로 가야 기회가 많고 대우도 좋다. 하지만 마냥 이 직업을 권유하고 싶진 않다. 나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공연문화기획 일을 한번쯤 배워볼만하다. 한 프로젝트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배우기 때문에, 어디에 가서든 일을 잘할 수 있다.”


-사물놀이-판소리-아리랑. 그다음은 뭔가


“미디어아트는 2010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이어령 선생님과 디지로그 사물놀이 공연을 한 적이 있다. 도시재생에도 관심이 많다. 예를 들어 경북 영주 담배 공장을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바꾸는 거다.“


-미래를 철저히 계획하는 편인가


“전혀 아니다. 내년에 아예 다른 걸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하는 건 아니라, 도전하고 싶어 직접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도 경험해볼 수 없다.”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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