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훈·이상민과 연대 전성기 이끈 구본근, 요즘 뭐하세요?

조회수 2020. 9. 24. 23:4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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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선수 생활 접고 선수들 뒷바라지에 매진하는 왕년의 농구 스타
구본근 현대모비스 농구단 사무국 과장
티켓영업부터 선수들 뒷바라지까지
“사무직 어색하지만 농구판에 남아 행복”

1997년 KBL 프로농구가 출범하기 전, 농구대잔치의 열기는 대단했다. 1990년대 농구대잔치에서 뛴 연세대와 고려대 농구부원들은 요즘 아이돌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서장훈, 이상민, 우지원, 문경은 등 당시 연세대 농구부 선수들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화보도 나왔고 CF도 수차례 찍었다.


구본근(43) 과장도 당시 연세대 농구부였다. 94학번인 그는 1년 선배인 서장훈의 백업 센터였다. 화려했다. 하지만 그는 일찍 선수 생활을 접었다. 농구팀 코치와 매니저를 거쳐 현재는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농구단 사무국에서 일한다. 벌써 사무직으로 근무한 지 8년. 티켓 판매부터 시즌 회원 관리, 전지훈련 관리, 연봉협상까지 농구단의 뒷바라지를 담당한다. “인생의 대부분을 농구만 하고 지내 아직도 컴퓨터 다루는 게 익숙지 않아요. PPT(파워포인트)도 어렵고, 독수리 타법입니다. 그래도 아직 농구판에 남아있어 행복합니다.”

출처: 현대모비스 제공
구본근 과장.

화려했던 연세대 농구부였지만 프로에서 밀려나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농구공을 들었다. 중학생 시절 벌써 키가 180㎝를 넘었다. 그는 서장훈의 뒤를 이을 센터로 주목받았다.


-어떤 경기가 기억에 남나요.


“1994~1995 시즌 삼성전자와의 경기가 기억에 남아요. 몸싸움도 심한 치열한 경기였죠. 생애 첫 덩크슛을 했고 19득점, 9리바운드를 했어요. 하지만 졌어요.”


-그 시합을 마치고 호흡곤란으로 코트에서 쓰러졌죠.


“게임을 잘하고도 졌다는 게 너무 화가 났어요. 라커룸에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핑 도는 느낌을 받고 쓰러졌죠. 당시 신문에 신부전증이라고 나왔는데 그건 아니었어요. 원래 안으로 화를 삭이는 스타일인데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터진 거죠.”


-당시 연대 농구부의 인기는 대단했죠.


“CF도 여러 개 찍었고, 화보집도 찍었고, 책도 냈었죠. 전 대학교 2학년 때 올스타에 뽑혔고, 3학년 때는 22세 이하 대표팀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1998년 프로에 진출한 후는 빛을 못봤죠.


“신인 드래프트 전체 10순위로 대전 현대 다이냇에 입단했어요. 하지만 제 포지션에 외국인 선수가 버티고 있어 출전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대학 때 수술한 무릎도 좋지 않았죠. 4년차인 2002년 대학 은사인 최희암 감독이 찾아 모비스로 이적했습니다.”

출처: 구본근 과장 제공
연세대 농구부 시절 구본근 과장.
출처: 구본근 과장 제공
연세대 농구부 모습. 왼쪽 첫번째가 구본근 과장.

역대 최연소 코치였다가 팀 매니저로 활동


구 과장은 모비스에서 새로운 인생을 맞았다.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박승일 코치의 뒤를 이어 코치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그는 “어영부영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보다 남들보다 빨리 다른 길을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고 했다. 만 27세, KBL역대 최연소 코치가 됐다.


-나이 어린 코치였는데 선수들이 잘 따르던가요.


“저보다 선배 선수가 7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때 최고참이던 오성식 선수가 선수들을 불러 놓고 코트 안에서는 무조건 코치님이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정말 고마웠죠. 그런데 정작 성식이 형은 반말로 ‘구 코치’로 부르더라고요. 하하.”


-1년 만에 코치를 그만두고 팀 매니저를 맡게 된 이유가 있나요.


“사실 말이 코치지 선수를 가르치는 코치는 아니었어요. 백보드에 공을 튀겨주고 밤새 비디오테이프 돌려보며 전력분석 하는 게 일이었습니다. 최연소 코치라 주변에서 말도 많았어요. 감독님이 ‘일단 팀 매니저를 하면서 더 배우고 나중에 코치하자’고 말씀하셔서 두말없이 따랐습니다.”


-매니저가 하는 일은 뭔가요.


“농구단 살림을 맡는 것이에요. 선수들 먹는 것, 자는 것, 쉬는 것, 이동하는 것 등을 관리합니다. 7년 반을 매니저로 지냈습니다. 선수들 관리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그만두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사직서도 들고 다녔죠. 선수들 스케줄에 문제를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출처: 구본근 과장 제공
구본근 과장이 현대모비스 농구단 코치로 활동하던 모습.

사무직 되고 나서 가장 힘든 것 3가지


-어쩌다가 농구단 사무국에 오게 된 건가요.


“2009~2010년 시즌을 우승하고 회식 때였어요. 유재학 감독님이 계속 저에게 윙크하는 거에요. 왜 그러나 싶었죠. 알고 보니 감독님이 현대모비스 부회장에게 절 사무국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더라고요. 당시엔 정말 황당했고 화도 났죠. 감독님이 저에게 사무국 관련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 없거든요. 제가 생각했던 미래가 아니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 안정적인 게 낫겠다 싶어 2010년 7월 사무국으로 왔습니다.”


-사무국에서 하는 일은 뭡니까.


“맨 처음엔 티켓 영업과 예산, 유소년 팀 관리를 맡았어요. 티켓 관련 민원이 들어오며 무조건 직접 전화를 걸어 당사자와 통화했죠. 처음 사무국에 왔을 때는 연 총 관중수가 7만명이었는데 제가 14만명까지 늘려봤습니다. 시즌회원도 200명에서 500명으로 늘렸고요.”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요.


“처음 1년은 의자에 오래 앉아있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선수들은 운동 후 낮잠을 자는데 사무직은 낮잠을 못 자는 것도요. 매일 정장 입는 것도 익숙지 않았죠. 또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다루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엑셀로 예산을 맞추다가 밤을 새기도 했어요. 지금도 명함 주고받는 게 어색해요.”

출처: 현대모비스 제공
현대모비스 농구단이 2014~2015년 시즌 우승을 차지할 때의 모습. 환호하는 농구단 우측 흰색 옷을 입은 사람이 구본근 과장이다. 그는 "우승 시 함께 환호하기 보다는 선수단을 살뜰히 챙기는 게 사무국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선수 출신 사무국원이 많은가요.


“제가 왔을 땐 모비스엔 선수 출신 사무국 인원이 없었습니다. 예전 선수 출신이 한 명 있었는데 사고를 많이 쳤더라고요. 그래서 부담이 컸죠. 제가 잘해야 제 후배들도 사무국에 올 가능성이 커지잖아요. 선수 출신은 선수들의 요구 사항을 이해하기가 더 쉽고 감독님과 의사소통도 잘 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연봉협상 등에서 선수 입장에 좀 더 마음이 가는 단점도 있어요. 선수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구단이 제시한 연봉보다 더 받으려면 합당한 이유로 먼저 날 설득시켜라. 설득할 수 있으면 내가 대신 구단과 싸우겠다고요.”


-잘 안 풀리는 경기를 보면 직접 뛰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나요.


“선수단을 떠난 이후 우리 팀 경기는 일부러 안 봐요. 아쉬운 장면을 보면 계속 머리에 남아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성격이거든요. 지금은 울산 모비스 홈구장에 가서도 슛 한번 안 쏩니다. 농구공이 이제 크고 무겁더라고요. 하하.”


-농구 선수들은 은퇴 후 무슨 일을 주로 하나요.


“저야 사무국에서 안정적으로 일하고 있지만, 예전 난다긴다했던 애들은 지금 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잘 풀리면 지도자를 하고, 프로 생활에서 돈을 좀 모았으면 사업이나 장사를 많이 하더라고요.”


-앞으로 계획은 뭡니까.


“양동근 선수가 은퇴 시점을 고려 중인데 좋은 모습으로 잘 마무리하게 돕는 게 첫 번째 목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보고서 쓸 때 오타를 좀 줄이려고요(웃음).”

출처: 현대모비스 제공
구본근 과장.

글 jobsN 김성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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