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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가 꿈이었던 중국어 전공 취준생의 특별한 선택

조회수 2020. 9. 23. 00:0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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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은 농산물을 찾아 새로운 판로를 열어준다
비봉농원 농산물 MD 정의정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자리한 아로니아 재배 농원에서 농산물 유통 전문가를 꿈꾸는 농부가 있다. 귀촌 8년 차의 새내기 농부 정의정 비봉농원 농산물 MD다. 서울에서 차로 1시간 거리. 안산과 군포, 수원과 맞닿은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자리한 비봉농원에서 정의정 씨를 만났다.


“농산물 MD는 상품, 즉 농산물을 생산, 발굴해내고 디자인을 입혀 판매하는 등 농산물 마케팅 전체를 디자인하는 전문가를 말합니다. 농사일을 시작할 때, 저만의 아이덴티티를 갖기 위해 만든 말이죠. 기존의 MD가 하는 마케팅 일에 생산이라는 농부의 업무가 추가된 개념입니다. 잘 지은 농산물을 찾아 새로운 판로를 열어주는 게 제가 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대학에서 중국어와 물류유통학을 전공한 정의정 씨는 1년 전까지만 해도 막 대학을 졸업한 ‘취업 준비생’이었다. 식품유통 분야로 직장을 알아보던 중에 미래에는 농업에 비전이 있다는 확신이 들어 부모님의 농원으로 들어갔다.


“어릴 때 꿈은 요리사였어요. 대학을 졸업하고서는 음식과 관련한 식품유통 업종에 취업하고 싶었죠. 부모님이 농원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면서 농산물 유통이나 상품개발 분야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주말농장에 나가 작물을 재배했던 터라 농사가 처음도 아니고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봉농원은 정의정 씨가 부모님과 함께 운영하는 가족농원이다. 부친이 2003년 회사를 관두고 창업하면서 자재 야적장으로 산 땅에서 자그마하게 만든 텃밭이 지금의 농원이 됐다.


비봉농원의 첫 농산물은 ‘춘란’이었다. 식물을 좋아하던 아버지 정태교 씨가 동네 사람들과 사귀기 위해 ‘난 동호회’에 들어가며 춘란을 사들인 게 시작이다. 농원에서 기른 춘란은 매월 양재 aT센터에서 열리는 경매시장에 출품한다. 정의정 씨는 이를 위해 경매사 자격증도 땄다.


“아버지와 함께 참여하다가 작년 말부터 혼자 가고 있어요. 난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은 건 아니지만, 난을 다루기 위해서는 보는 눈을 높여야 한다고 해서 꾸준히 보고 배우고 있습니다. 난 시장은 트렌드와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해요. 해마다 바뀌는 인기 품종을 살피고 관련 분야 사람들을 사귀는 일이 재밌습니다.”


아로니아와 만나다

비봉농원이 아로니아와 연을 맺게 된 것도 아버지의 동호회 활동 덕분이다. 동호회원이 운영하는 육묘농장에서 아로니아를 처음 접하고 그 효능에 반해 키운 데 더해 연구회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연구회에는 현재 60여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아로니아를 공부해보니 과일 중 이렇게 좋은 과일이 있나 싶었어요. 효능은 말할 것도 없고 병해충에 강하고 키우기가 수월해요. 또 블루베리처럼 알로 따는 게 아니라 송이째 따기 때문에 수확이 쉽죠. 알이 탄탄해 생과로 보존할 수 있는 기간도 길어요.”


아로니아 묘목을 농원에 들인 건 어머니다. 귀농·귀촌 모임에서 농장 답사를 갔다가 묘목 100주를 사 왔고, 세 식구가 합세해 키운 결과 1년 만에 1000주로 불렸다. 텃밭에서 시작한 농사가 8250㎡(2500평) 농원을 이뤘다.


베리 중의 왕이라 킹스베리(King’s berry)라 불리는 아로니아는 과거 유럽의 왕족들이 즐겨 먹는 열매였다. 중세 유럽에서는 만병통치약으로 활용되기도 했는데, 실제로 안토시아닌 함량이 베리류 중에서 가장 높아 현대에 와서도 건강식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몸에 좋은 음식이 쓰다고, 떫은맛이 생과를 먹기에는 거부감을 줬다. 생과의 떫은맛은 ‘타닌’이라는 성분 때문인데 쓰고 시큼한 떫은맛에 ‘숨이 막힌다’고 해서 영어로 ‘초크베리(chokeberry)’라고 불릴 정도다. 정의정 씨 가족은 어떻게 하면 생과의 모든 성분을 섭취하면서도 떫은맛을 줄일 수 있을까 연구하다가 원액과 분말을 만들기 시작했다. 비봉농원에서 만든 아로니아 원액은 다른 곳과 달리 붉은색이 진하면서도 투명하다. 일반적으로 건강원에서 만드는 원액은 물을 섞고 가열하기 때문에 색이 탁해진다고 한다. 색만으로도 성분을 보증할 수 있다는 게 정씨의 설명이다.


“아로니아는 당도가 19~21° 브릭스(Brix)로 높은 편이에요. 다만 타닌 성분이 있어서 당분이 덜 느껴지는 거죠. 동결건조해 분말로 만들거나 원액으로 만들면 떫은맛이 줄어들어요. 식물을 80℃ 이하에서 가공하면 영양소 파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 농원에서는 진공 상태의 75℃에서 즙을 내죠. 최대한 생과 그대로를 담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블루베리는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형태로 나온 게 많지만, 아로니아는 가공식품으로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맛있는 과일이라기보다 건강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비봉농원이 만든 젤리에 관심을 두는 이들이 많다.


“젤리나 강정은 아로니아를 맛있게 먹기 위한 간식이지 건강식품은 아니에요. 아로니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가공품이죠. 안타까운 게 소비자를 직접 만나보면 아로니아 생과를 구매하고서도 막상 어떻게 먹는지 몰라 1년을 냉장고에 넣어뒀다고 해요. 타닌 성분이 주는 떫은맛 때문이죠. 타닌은 저온 숙성하면 맛이 덜해집니다. 냉동 보관했다가 먹거나 주스, 잼으로 가공해서 먹을 수 있죠. 최근 유행하는 효소로 만들어도 좋아요. 분말을 떡 만들 때 넣거나 고기 양념에 넣을 수도 있고요. 다양한 변신이 가능합니다.”


밤새 가족과 토론

정의정 씨 가족은 농원을 함께 운영하다 보니 얼굴만 마주치면 아이템 회의를 한다. 상품 개발을 위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라고.


“가족이 모이면 밤새는 줄 몰라요. 매일 새로운 아이디어가 쏟아지죠. 그런 시간이 즐거워요. 가족이 함께 일할 때의 이점이라면 빈자리를 서로 메울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주말 판매가 많은 편인데, 궁극적으로 무인 판매를 하고 있어요. 집 앞 정자에 냉장고를 두고 누구나 자유롭게 사 가도록 했죠.”


비봉농원의 철칙 중 하나는 물건 가격을 절대 깎지 않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동하면 젤리나 강정을 서비스로 준다. 상품 가격을 한번 낮추면 올리기가 어렵기에 농산물 가격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이다. 지금은 농원에서 나는 아로니아 생과와 가공식품만 다루고 있지만, 점차 주변에서 나는 모든 농산물을 직접 선별해 판매할 계획이다. 집 앞에 농산물 직판장을 겸한 카페를 세우는 게 그 시작이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마케팅은 꼭 필요합니다. 전략을 짜고 나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MD가 필요해요. 집 앞에 농산물 직판장을 겸한 카페를 세워 본격적으로 농산물 MD 일을 하려 해요. 마케팅에서는 8 대 2 전략이라고 하는데, 100명을 만나면 그중 20명은 산다고 해요. 많이 만나야 그만큼 많이 팔린다는 말이죠. 그 시작점이 될 곳입니다.”


이를 위해 정의정 씨는 경기도 농업기술원과 화성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수업을 받으며 농사와 유통, 마케팅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청년여성농업인연합회에도 참여해 사무차장직을 맡으며 청년 농부들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다.


“농사일을 시작한다 했을 때 친구들이 대단하다며 응원해줬어요. 요즘은 취업난이 심하다 보니 새로운 일에 관심이 커졌고, 농부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죠. 농산물 MD는 제 성격에도 맞아요. 밭에서 일하는 지금이 행복해요. 아버지는 늘 사람의 네트워크가 큰 자산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누구나 머물다 가고 싶은 공간으로 만드는 게 우리 가족의 꿈입니다.”


글·사진 jobsN 조선뉴스프레스 서경리 기자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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