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이 반한 그녀..소주 쌓아놓고 마시는 꿈 이뤘다

조회수 2020. 9. 21. 17:3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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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도 반한 일러스트레이터 집시(zipcy)
모호하다 했던 그림이 이젠 저만의 특색이 됐어요
일러스트레이터 집시(zipcy)
만화 꿈 접고 방황··특색있는 그림으로 주목
최근 롯데주류 처음처럼과 콜라보

예술가와 기업의 협업을 ‘아트콜라보’라 한다.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활용해 기업의 제품이나 브랜드가 재탄생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기업은 부가가치를 만들고, 예술가는 일감을 얻으며 서로 윈윈(win-win) 할 수 있다.


‘집시(zipcy)’를 예명으로 쓰는 양세은(30) 작가는 ‘아트콜라보’하면 떠오르는 일러스트레이터다. 음반사, 게임회사, 출판사, 주류 회사 등 여러 기업이 그를 찾는다. 최근에는 롯데주류에서 만드는 소주 ‘처음처럼’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처럼이 주는 부드럽고 청량한 느낌을 표현한 일러스트를 라벨에 담아 달라는 것. 요즘 대형마트에 놓인 초록색 소주들 사이에서 그가 그린 그림이 감싼 처음처럼이 눈길을 잡아 끈다.


“라벨에 제 그림이 있는 소주를 쌓아놓고 마시는 게 꿈이었어요. 과거 인터뷰와 주변 사람들에게 수없이 말했는데, 처음처럼에서 제 꿈을 알고서 제안을 주셨더라구요. 드디어 꿈을 이뤄 기쁩니다.”


예명 '집시'에는 내가 온전히 나인 채로 존재하고 싶다는 뜻이 담겨있다. 노틀담의 꼽추에 나오는 집시 '에스메랄다'를 동경해 지은 이름이다. 집시 작가는 동양적이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그림으로 독특하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몇년 전만 하더라도 자신의 그림에 특색이 없어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가 꿈을 이루기까지의 여정을 들었다.

출처: 롯데주류 제공
집시 작가가 그린 처음처럼 라벨 이미지.

만화가 전부인 줄 알았던 세상에서 만난 일러스트


어릴 때부터 만화가를 꿈꿨다. 만화책으로 책장을 빼곡히 채웠고 디즈니부터 일본 만화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교과서와 공책에는 만화 주인공을 그린 낙서가 가득했다. 친구들이 그의 그림을 보고 감탄했고, 그는 남들보다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세일러문과 웨딩피치가 싸우는 모습을 그린다든지, 나름 온갖 만화를 보고 이리저리 재해석해 그렸던 것 같아요.”


교직에 있던 부모님도 딸의 꿈을 응원했다. 고2 때부터 입시 미술을 준비해 2007년 세종대 애니메이션과에 입학했다. ‘공포의 외인구단’ 이현세 작가, ‘미생’ 윤태호 작가 등 최고의 만화가들이 교수로 있었다. 하지만 방황은 이때부터. 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만화를 그리는 데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만화는 그림 뿐만 아니라 스토리텔링이 중요합니다. 주인공이 왜 그 행동을 하는지 이야기를 이끌어 가야해요. 저는 사건을 구성하고 연출하는 재능이 부족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만화가 이외 다른 꿈은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오랜 꿈을 포기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꿈이 흔들리자 학교 생활이 힘들었다. 휴학을 2번 했다. ‘노력하면 할 수 있다’와 ‘포기해야 한다’.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3년 동안 갈등하며 방황했다. 결국 꿈을 포기하고 3학년 때 복학했다.


그때 일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학비를 벌기 위해 여러 회사에 무작정 포트폴리오를 보낼 때였다. 서점에 있는 일러스트 관련 책을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 장면에 메시지를 응축해 보여준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일러스트를 필요로 할만한 출판사에 집중적으로 포트폴리오를 보냈어요. 수십군데 보냈는데도 연락이 없더라구요. 그러다 딱 출판사 한 곳에서 표지 일러스트를 그려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 이름 건 첫 작업이었어요.”

출처: 집시 작가 인스타그램
(왼쪽) 그라폴리오에서 연재 중인 '닿음-Touch' 시리즈 중 하나인 '수고했어, 오늘도(End of a long day)'.

다른 또래 작가들보다 지각했다 느끼기도


2012년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택했다. 광고회사 인턴을 했고 아동출판사와 남성복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무가지에 삽화를 여러번 실기도 했다. 작가로 독립하기 위해 2014년 퇴사했다.


“직장 다니면서 종종 외주 작업도 하니까 먹고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퇴사하니 거짓말처럼 일이 뚝 끊기더라구요. 주변에 있는 또래 작가나 디자이너들은 큰 계약도 척척 따내는데,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나를 찾아주는 곳이 없다는 생각에 무기력해졌어요.”


자신의 그림에 특색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집시 작가는 주로 사람을 그린다. “제 그림을 보면 경계가 흐릿해요. 만화도 아니고, 순수 회화도 아니예요. 현대적이긴 한데 옛날 민화 느낌도 나고···. 실제로 애매하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남보다 뒤진다는 열패감, 좌괴감을 느꼈죠.”


찾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직접 찾아나서기로 했다. 블로그, 페이스북 같은 SNS에 그림을 올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일주일에 3~4번은 완성작을 올렸다.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해 그림을 그렸다. “혼자 우울해하지 말자, 환경을 바꾸자는 생각이었어요. 대학생 때부터 올리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좋아요’가 10개였어요. 꾸준히 올리다보니 좋아요가 점점 늘고 제 그림을 좋아해주는 분들이 늘었습니다.”


온라인에서 입소문이 나자 2016년부터 작품을 만들어달라는 의뢰가 들어 오기 시작했다. 아이돌 그룹 우주소녀의 중국인 멤버 성소를 그렸을 때는 중국에서도 화제였다. 음반사 파스텔 뮤직이 만든 CD, 출판사 민음사의 책, 게임 테일즈러너, 영화 조선마술사에 그녀가 만든 작품이 들어갔다.


‘애매하다’는 소리를 듣던 그림이 오히려 집시 작가만의 특색이 됐다. 관능적이면서도 동양적인 인물 묘사가 특징이다. 그림 속 인물은 저마다 사연을 가진듯 다른 눈빛을 띤다.


“‘간절히 바라면 다 이뤄진다’는 말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말이 맞는 것 같아요. 슬럼프에 빠지면 다 싫어져요. 아무것도 하기 싫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춰있으면 상황이 점점 더 안좋아집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출처: jobsN
작업하는 모습. 그는 오전 11시쯤 작업실에 도착해 밤 10시 넘어까지 작업한다. 영감은 모든 콘텐츠에서 얻는다. "학창시절부터 스크랩이 취미였어요. 책, 잡지,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이나 사진, 글귀를 모두 적어요. 왜 스크랩을 했는지, 무엇이 인상적이었는지도 함께 적어둡니다."

생계형 일러스트레이터


집시 작가는 스스로를 ‘생계형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부른다. 그는 작품활동과 외주 작업 뿐만 아니라 학원 강사로도 일하고 있다. 주말에 6시간씩 성인반에서 드로잉을 가르친다. 집시 작가의 수업을 듣고 싶은 대기자가 120명이 넘어 클래스 추가할 예정이다. 기업에서 의뢰 받는 외주 작업 수는 한달에 1~2개 정도다.


“어릴 적 형편이 넉넉치 않았고, 장녀라서 집안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요.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미술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지낸 적도 있는데, 저는 고정 수입이 없으면 불안해서 작업을 못하겠더라구요. 강사 일과 그림 연재 등 고정수입으로 250만~300만 정도 벌고 있습니다. 외주 작업은 계약 건마다 편차가 커요. 보통 100~1000만원 정도로 다양합니다.”


최근에는 그라폴리오에서 연인의 스킨십을 주제로 그림을 연재하고 있다. “세미 춘화를 지향하고 있어요. ‘춘화’라고 하면 선정적인 장면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감촉’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연인들의 넘을듯 말듯한 아슬아슬한 기류에 초점을 맞췄어요. 어떤 분들은 애잔하다, 애틋하다 말하기도 해요. 제 그림을 보고 마치 내 귀에 숨결이 닿는 것 같은 공감각을 경험하셨으면 해요.”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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