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 미라전문가, 알고보니 의사이자 교수이며 예술가

조회수 2020. 9. 21. 17:3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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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나면 현미경 속 세상도 예술작품이 된다
고려대구로병원 병리학과 김한겸 교수

고려대의대 김한겸 교수는 병리학자이자 ‘현미경 아트’ 작가다. 현미경을 통해 인체 조직세포를 관찰하고 병을 진단하는 그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작은 세상에서 찾아낸 재미있는 단상에 색을 입히고 이야기를 덧씌워 독특한 사진작품으로 만든다. 지난 연말에는 이 작품들을 추려 전시회도 열었다.

김한겸 교수의 작품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3년, 충청북도가 주관한 바이오사진전에서 대상을 받으면서부터다. 당시 그는 〈흰 수염 할아버지〉라는 사진을 출품, 대상 격인 교육과학기술부장관상을 받았다. 〈흰 수염 할아버지〉는 무릎관절 연부조직 중 일부를 100배 확대해 얻은 작품이다.


“우연히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있기에 그 부분만 따로 잘라냈어요. 영락없이 ‘막걸리 한 잔 걸치고 흰 수염을 휘날리며 먼 곳을 응시하는 할아버지 옆모습’이더라고요. 또 이건 통풍 환자의 조직인데, 요산 결정체들이 마치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보였어요. 〈보석〉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 사진은 곰팡이 균이고요, 대장 용종은 여러 마리의 뱀이 엉겨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메두사〉라고 이름 붙였죠. 이번 전시회에 많은 동료 병리학자가 다녀갔는데 이렇게 설명해주니 다들 깜짝 놀라더라고요. 매일 연구실에서 하는 일이 이런 조직세포를 관찰하는 건데, 그걸로 이런 사진을 만들었으니 얼마나 신기하겠어요.”


그는 “원래 오래전부터 병리의사들은 환자의 세포를 보며 병의 유무, 병명, 원인균 등을 찾아내는 중요하고 엄숙한 과정에서도 특이한 소견이나 형태가 관찰되면 현실에 존재하는 물체에 빗대서 표현하곤 했다”고 한다. 가령 울혈성 간경변은 그 모양이 향신료나 한약재로 쓰이는 ‘육두구’와 비슷하다고 해서 ‘육두구 간’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것처럼 보이는 자궁내막증 세포는 ‘스위스 치즈’로 부르는 식이다.


그는 “과학자의 눈으로 보면 단순히 암세포나 바이러스, 세균이 퍼져 있는 모습이지만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살펴보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각각의 사진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유방암 세포에서 ‘갓난아기와 젊은 부인을 두고 만주로 독립운동하러 떠나는 남편’을, 대식세포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 여행 중 만난 유리세공업자’를, 인체에 들어와 쌓여 길쭉한 모양이 된 석면에서 ‘무사의 검’을 찾아낸 것은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새로운 장면이 포착되면 그 부분만 따로 촬영해 보관해요. 이후 틈틈이 보정작업을 하며 작품을 만들어갑니다. 특별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건 아니고, 포털 사이트에 공개된 이미지 편집기를 써요. 어도비 포토샵보다 기능이 훨씬 간단해서 좋아요. 현미경 사진은 보통 분홍색이거나 청록색을 띠기 때문에 주제에 맞게 색상, 노출, 명도, 채도 등을 변경합니다. 작품 하나를 시작하면 마음에 들 때까지 수정 작업을 반복하는 편이라 완성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다양한 이력 가진 국내 의료계 대표적 ‘팔방미인’

〈불나방〉

그가 현미경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81년, 병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전공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에는 근무지에 있던 오래된 광학현미경에 한계를 느껴 사비로 장비를 샀을 정도로 현미경 사진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이미지 편집기를 이용해 지금과 같은 작업을 한 것은 2012년부터다.


현재 그는 페이스북에 작품을 보관하는 전용 수장고를 만들어 제목과 이야기를 붙여 기록하고 있다. 이미 1만 5000점 이상의 작품이 모였고, 이 중 일부를 ‘노마드 인 어 스몰 월드(Nomad in a small world)’라는 페이스북 계정에서 공개하고 있다. 

〈자작나무 숲〉

“고등학교 때부터 카메라를 들고 다녔어요. 그때 친구들은 제가 미대에 갈 것으로 생각했대요. 사진 찍는 걸 좋아했고, 해마다 새 학기가 되면 교실 꾸미는 건 언제나 제 담당이었거든요. 의대에서는 원래 정형외과를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학교 입학 후 검도에 미쳐 사느라, 또 학생회장을 하느라 성적이 좀 부족했죠. 결국 2지망으로 병리학을 골랐는데, 그게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현미경 사진을 접하게 됐고, 환자를 직접 대하는 분야가 아니라 이런 작업도 할 수 있으니까요. 일반 사진은 지금도 계속 찍고 있습니다. 몽골과 아프리카에서 찍은 풍경사진을 모아 전시회도 두 번 열었어요.”


몽골과 아프리카는 그가 해마다 의료봉사를 위해 찾는 곳이다. 국내 ‘미라’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한 그는 2000년대 초 몽골 고고학계의 초청으로 현지에서 미라 분석을 진행한 바 있다. 당시 몽골의 열악한 의료환경을 목격한 그는 2007년 동료 병리학자들과 봉사단을 구성해 몽골 의사들이 자궁경부암을 조기에 진단할 수 있도록 하는 ‘몽골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메두사〉

자궁경부암의 경우 현미경과 슬라이드만 있으면 비교적 간단히 조기 진단이 가능하지만 당시만 해도 현지에는 이런 실력을 갖춘 의사가 매우 드물었다고 한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암을 조기 진단할 수 있는 의사가 100명도 넘는다. 몽골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최빈국 중 하나인 마다가스카르에서도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2008년에는 모교인 고려대에 사회봉사단을 만들어 학생들과 함께 아프리카, 피지, 러시아, 네팔, 캄보디아 등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다. 지난 전시회 수익금도 전액을 말기 암 환자들이 생활하는 구로병원 호스피스회에 기부했다.


국내 의료계 대표적 팔방미인인 그는 사진, 봉사 외에도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공인 7단의 검객이자 미라 연구와 관련해 고병리학을 학문으로 정착시켰는가 하면 베일에 싸인 극지의학을 연구하기 위해 쇄빙선을 타고 남극에도 다녀왔다. 국내 최초로 연구용 동결폐조직 은행도 만들었다. 

〈흰 수염 할아버지〉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 열정적으로 도전하고, 또 성취하는 비결을 물으니 그는 “한 가지 일을 즐겁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일로 연결돼 범위가 넓어졌을 뿐 나는 특별한 꿈이 없다”며 웃었다.


“최근에는 유럽에서 현미경 사진전을 열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여유를 갖고 천천히 생각하려고요. 인체 조직과 관련된 현미경 사진은 세계적으로 사례가 많지 않기 때문에 계속 작업할 계획이고, 지금 당장은 미라 관련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저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고려대 사학과 학생이 공동 저자가 될 겁니다. 10년 전쯤, 《과학소년》이라는 잡지에서 전국 어린이들에게 책을 보내주는 캠페인을 했는데 제가 그때 미라 관련 책을 보낸 적이 있어요.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이 친구가 제 책을 받았는데, 그걸 지금도 달달 외울 정도로 미라에 관심이 많아요. 전공도 사학을 선택했고요. 둘이 함께 미라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보려고요.”


글 jobsN 최선희 객원 기자, 사진 김선아 기자, 본인제공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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