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회사가 게임팩에 '지옥의 맛' 발라 놓은 뒤 생긴 일

조회수 2020. 9. 23. 15: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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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제일 쓰다는 걸 굳이 맛보는 사람들, 왜?
소비자 안전 위해 쓴맛 나는 물질 도포
'제조물책임법(PL)'에 걸리지 않으려는 노력
창업·사업한다면 PL 반드시 고려해야

지난해 12월 게임기 ‘닌텐도 스위치’ 한국 정식 발매 당시, 사양이나 새 기능 못지않게 화제였던 요소가 있다. 바로 카트리지(게임 데이터 저장 장치)의 ‘맛’이다.


여느 게임기 부속품이 다 그렇듯, 카트리지는 먹으라고 만든 물건이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이 플라스틱 조각을 핥은 사람 수가 적지 않았다. 닌텐도 스위치 카트리지 중고품은 어지간하면 사람 혀끝에 닿은 적이 있을 테니, 더러워서 못 사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일부 네티즌은 그 핥는 광경과 테이스팅 후 감상을 동영상으로 찍어 남기기도 했다.

어쩌다 이렇게


이 기괴한 풍습은 닌텐도가 새 안전사고 예방 조치를 도입한 뒤 생겼다. 이번에 새로 나온 닌텐도 스위치 카트리지는 사이즈가 가로 23mm, 세로 34mm 정도로, 예전 기종보다 크기가 훨씬 줄었다. 자연히 아이들이 삼키기 쉬워졌고, 닌텐도는 이를 막고자 혀에 닿는 순간 바로 뱉어낼 만큼 쓰디쓴 물질을 코팅했다. ‘쓴맛’을 뜻하는 영단어 ‘bitter’와 ‘왕’이란 의미가 담긴 라틴어 접미사 ‘rex’를 더해 ‘bitrex’라 불리는 물질. 기네스북이 세상에서 가장 쓴맛 나는 화학합성물로 인정한 물질. 데나토늄벤조에이트(Denatonium Benzoate·화학식 C28H34N2O3)다.


덕분인지 닌텐도 스위치 카트리지를 아이가 삼켰다는 보고는 없다. 대신 이를 핥는 어른이 속출했다. 물론 데나토늄벤조에이트는 사람 입에 드나들 물질이 아니다. 산업안전보건법에서 유해물질로 지정했을 정도다. 하지만 아주 약간 맛보는 건 몸에 별 영향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쓴맛’에 호기심을 느낀 사람들이 혀를 대보는 것이다.

출처: 유튜브 채널 '최고기 Gogi Choi' 캡처
한 유튜버 부인이 선명하게 카트리지를 핥고 있었다.

쓴맛 코팅을 한 이유


오묘한 결과로 이어지긴 했지만, 아무튼 카트리지에 데나토늄벤조에이트를 바른 건 안전사고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당연히 닌텐도가 유달리 자애롭거나 착해서 사고예방 노력을 한 건 아니다. 그저 제조물책임법(PL·Product Liability) 관련 분쟁을 피하려는 시도다.


PL이란 기업이 만들고 유통한 제조물의 안전을 직접 보장하고, 결함에 따른 사고를 책임지도록 규정한 법률이다. 이전엔 소비자가 제품 하자를 발견해도 기업의 고의나 과실을 증명해야만 배상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PL 시행 이후엔 기업 의도야 어쨌건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것만 입증해도 배상을 요구하는 게 가능해졌다.


게임기 부품에 구토 나게 만드는 화학물질을 바르거나, 인터넷에서 화제가 될 정도로 황당한 내용이 담긴 사용설명서를 만드는 건 대개 이 PL과 관련이 있다. 물건을 사서 온갖 기상천외한 용도로 쓰다, 문제가 생기면 PL에 근거해 기업 책임을 묻는 사람이 종종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소송 결과 “사용 목적(intended use)에 어긋나기 때문에 기업 잘못이 아니다”는 판결이 나올 때가 많다. 하지만 뜻밖의 지점에서 “소비자가 착각할만 했다”는 결론이 나와 기업이 패소하는 때도 가끔 있다.

출처: 블로그 'Bear Tales' 캡처
'지퍼는 당신 성기에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특히 이런 건 바지를 용도에 맞게 입다가도 벌어질 수 있는 사고니, 안내가 없다면 기업이 소송에서 질 가능성도 있긴 있다.

다이내믹 아메리카


특히 1963년부터 PL 판례를 인정해온 미국에선 이런 분쟁이 잦은 편이다. 오죽하면 한 로스쿨 교수가 PL을 악용하면 별 해괴한 상황에서도 소비자가 기업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고양이 전자레인지’ 가상 사례를 만들어냈을 정도다. 젖은 고양이를 말리려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가 고양이가 죽어도, 기업에 “이를 금지한 설명이 전혀 없었다”며 소송을 걸면 배상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제품 사용설명서를 읽다 보면, 이런 상식까지 적어 종이를 낭비해도 되나 싶은 내용이 나오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출처: 인터넷 캡처
한 이어폰 사용설명서.
출처: Michigan Lawsuit Abuse Watch
'유모차를 접기 전에 아이를 빼세요' 안내문.

다툼을 피하려면


물론 PL은 미국에만 있는게 아니다. ‘소송 천국’이라 불리는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웬만한 선진국엔 대부분 PL 법률이 있어 이와 얽힌 다툼도 제법 벌어진다. 유럽연합(EU) 가맹국에선 1980년대 후반부터, 필리핀·호주·중국에선 1992년 7월, 일본은 1995년 7월부터 PL 관련 법률이나 판결이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난 2002년 7월 1일부터 PL을 시행했다.


그러니 미국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 창업·사업을 하건, PL은 꼭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닌텐도처럼 창의적인 방법을 동원해 ‘우리는 사고를 예측하고 막고자 노력했다’는 티를 내도 좋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대비책은 꼼꼼한 ‘사용설명서’다.


안준성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객원교수(미국 메릴랜드주 변호사)는 “사용설명서에 예상 가능한 ‘잘못 쓰는 사례’를 모두 알려주고, ‘여기서 안내한 용도 이외로 활용하다 사고 나면 기업이 책임질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는 게 기본 중 기본”이라고 했다.


글 jobsN 문현웅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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