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침대에 걸터앉은 이 의욕없는 청년을 그린 이유

조회수 2020. 9. 23. 15:2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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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도시에서 살아가는 쓸쓸한 현대인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 서동욱
잿빛 도시에서 살아가는 쓸쓸한 현대인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 서동욱

우리 시대의 초상을 보여주는 인물화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는 화가 서동욱을 서울 마포구 창전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 참여한 그의 그림이 1200만 원에 낙찰된 다음이었다. “아트페어든 경매든 화랑에서 추진하는 일이라 저는 잘 몰라요. 사실, 그 가격에 제 그림을 넘기기 너무 아깝죠. 1억 원을 받아도 팔기 싫은 작품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자부심이 느껴졌다.


“우리나라에 서양화가 도입된 지 100여 년밖에 되지 않았고, 인물화에서는 특별히 눈에 띄는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진지하게 그려보려고 합니다. 사실 인물화는 팔기 쉬운 작품이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의 초상을 선뜻 소장하려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작품 속 인물이 아니라 고유한 양식을 지닌 ‘서동욱의 그림’으로 인식되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1974년에 태어나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그는 2001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예술학교로 이름난 파리-세르지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사진, 영상, 설치작품 등 다양하게 시도했지만 결국 인물화로 돌아왔다. 자신의 감성과 직관을 드러내기에 인물화만한 장르를 찾기 어려워서였다.

〈아침–침실–MJ, Morning–Bedroom–MJ〉, 97x145.5cm, Oil on Canvas, 2015

2003년 그는 파리에서 지내다 한국으로 돌아간 여자 친구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녀에 관한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그러면 자신이 왜 그 여자의 초상화를 그렸는지 어려운 프랑스어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그는 여자친구가 남기고 간 사진, 수첩, 신분증, 서류들을 보고 그녀의 행적을 쫓는다. 그러다 그녀가 아니라 자신의 행적을 쫓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이야기다.


2005년 졸업 후 파리의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인 시테(Cit· internationale des arts) 입주 작가가 된 그는 첫 번째 개인전을 앞두고 다양한 시도를 하다 플래시 불빛에 포착된 인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플래시 불빛 아래 무방비로 노출된 청춘은 부서질 듯 불안해 보였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노출된 야생동물처럼 날것 그대로의 느낌이 좋았다고 한다. 그 그림 역시 지극히 예민하고 섬세해서 불안하고 쉽게 흔들리는 자신의 초상이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빌렸지만 제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 혼자 미술 공부를 하고 있으니 외롭고, 불안하고, 미래는 막막했습니다. 자기 연민과 센티멘털리즘에 사로잡혀 있는 내면을 담으면서도 그림은 센티멘털리즘이 되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플래시를 탁 터뜨렸을 때의 사진 효과를 그림으로 재현했습니다. 스냅사진 같은 찰나의 느낌이 하위문화를 연상케 하죠. 인물 뒤의 배경을 단색으로 처리해 현실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느낌을 주고, 얼굴이 플래시 불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평면적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고독의 힘

〈아침–거실, JE, Morning–Living Room–JE〉, 97x145.5cm, Oil on Canvas, 2015

2006년 한국에 돌아온 후 2007년 연 개인전 제목이 〈Myself when I am real〉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명랑한 척, 쿨한 척하지만, 혼자 있으면 대부분 이런 모습이 되지 않나요? 혼자 있을 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는 다른 사람의 인정과 이해, 사랑을 갈구하면서 다른 사람을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받으려고 연연했어요. 요즘은 고독이 힘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혼자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제 존재를 확인받지 않아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고, 불안한 마음도 사라지는 것 같아요.”


2010년대부터는 영화의 미장센을 연상시키는 배경 속에 있는 인물을 그렸다.


“영화를 좋아해요. 그중에서도 프랑스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나 핀란드 영화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처럼 미장센이 돋보이는 감독들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여배우 카티 오우티넨은 북유럽인 특유의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 은발에 가깝도록 밝은 머리카락 색과 움푹 들어간 눈두덩, 옅은 녹색이 감도는 회색 눈동자를 가졌습니다. 차갑고 무표정한 그가 등장하면 영화가 독특한 색깔로 물들게 됩니다. 그림에서 그런 느낌을 구현하고 싶었어요.” 

〈녹색터널, Green Tunnel〉, 130.3x97cm, 2017

예전에는 친구들을 모델로 그렸다면, 요즘은 제자나 후배들을 모델로 그릴 때가 많다.


“요즘 그리는 청춘의 모습은 제 자화상이라고 볼 수 없어요. 저도 나이가 들면서 어느 정도 현실에 적응하다 보니 모델과 거리를 두게 됩니다. 한편으론 나이 들어가는 친구의 모습도 꾸준히 그리고 있어요. 한 사람이 나이 들어가는 여정을 그때그때 다른 표현법으로 그리고 싶어요. 한 사람의 일생과 제 그림이 변화하는 과정을 함께 볼 수 있겠죠.”


침대에서 다리를 쭉 펴고 앉은 채 컴퓨터로 내려받은 영화를 보고 있거나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그림 속 인물들은 누군가의 자취방을 엿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친숙하다. 잿빛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 시대 청춘의 보편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기운이 다 빠진 듯 무기력한 모습에서 그들을 짓누르는 세상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늦은 밤 홀로 불을 밝히고 있는 한강공원 편의점이나 주유소 등을 그린 풍경화에서도 인물화처럼 쓸쓸함이 감돈다.


“시대정신을 읽어서 작품으로 표현하려는 작가도 있지만, 저는 그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제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합니다. 그랬더니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 같아요.”


쓸쓸함에 대해

〈옛날 영화, Old Movie〉, 130.3x97cm, Oil on Canvas, 2017

쓸쓸한 정서가 감도는 구체적이고 연극적인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무대와 의상을 준비하고 모델에게 연기를 시킨 후 사진 촬영을 한다. 그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사진 그대로 그리지는 않습니다. 회화에는 회화만의 표현 양식이 있으니까요. 구겨지고 바스러질 듯 메마른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 색깔이나 질감을 조정합니다. 잿빛 도시에서 살아가는 잿빛 청춘을 그리기 위해 제 그림에는 회색이 많이 들어갑니다. 빨간색을 표현할 때도 회색을 많이 섞어요. 쓸쓸함, 고독 같은 정서를 세련되게 표현하는 게 정말 어려워요. 연극에서 배우가 감정을 절제해야 관객이 더 몰입하면서 공감할 수 있잖아요?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WW〉, 97x145.5cm, Oil on Canvas, 2013

그는 영국의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가 남긴 ‘분위기가 나의 스타일이다’라는 말에서 많은 위안을 받았다고 말한다.


“‘나만의 스타일은 뭘까?’를 고민하던 중 이 말을 읽고 조금 편안해졌어요. 한 작가의 작품에 전체적으로 풍기는 고유한 분위기가 있다면, 그게 그 사람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뛰어난 화가라면 기술의 한계 때문에 표현하지 못할 게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운동선수처럼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요. 재능도 있어야 하고요. 그림은 지적인 언어가 아니라 시각적인 경험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도 감상할 수 있어요. 실력만 갖추면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40대의 이 작가가 그의 포부대로 우리나라 인물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길 기대해본다.


글 jobsN 이선주 조선뉴스프레스 객원기자, 사진 김선아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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